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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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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그런데 저희들 향해서 맨날 앞에서 친북 붙여가지고 친북좌파다, 심지어 종북좌파다 말끝마다 그러니까 좌파라고 해서 싫은 게 아니라 그걸 그렇게 꼭 연결을 시키니까. 과거에 툭하면 친북으로 몰고 용공으로 몰아서 사람 죽이고 잡아 가두고 했던 그 악몽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이제 좌파, 우파라는 표현보다는 보수, 진보 이렇게 표현하는 쪽이 좀 더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준표= 보수, 진보가 아니고 좌파, 우파라니까? 근데 어떻게 좋은 말은 자기들이 가져가고 인식 나쁜 말은 우리보고 하라고 하니까 그게 무슨 경우야? 그건 아니지.

유시민= 억울하시죠?
홍준표= 억울한 게 아니고 잘못 용어 정리를 하고 있다 이 말이야.


11월 22일 KBS TV '정치합시다' 첫 방송에 자유한국당 전 대표 홍준표와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이 출연했다. 여러 정치현안에 대해서 토론을 했는데 시작하면서 양 진영을 규정하는 이름에 대해서 언급했다. 유시민은 진보-보수가 좋다고 했고 홍준표는 좌파-우파가 맞다고 주장한다.   

'진보-보수'란 용어는 한국 특산품

연세대 교수 김호기가 언젠가 논문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분단체제와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이념문제 연구자들 숫자가 적고 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됐다. 지금 이념을 둘러싼 갈등이 극심해졌음에도 참고할 연구논문을 찾기 어렵고 기초적인 문제들이 혼돈속에 방치돼 있는 이유다. 대표적 사례가 진보 보수 좌파 우파의 개념 규정이다. 
 
유시민의 말처럼 좌파라고 하면 친북 용공이 연상되어서 거부감이 느껴진다. 좌파 대신 진보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그 이름만으로 불로소득을 얻게 된다. 홍준표가 "그게 무슨 경우야"라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 이해된다. 몇 해 전에 어느 사회학 교수가 수강학생들을 대상으로 물었다고 한다.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명중 6명인데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2명밖에 안됐다.

보수주의는 프랑스혁명 중에 위협을 느낀 영국의 귀족 출신 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저서에 등장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학문적 족보가 있는 사회과학 개념이다. 그러나 진보는 특히 진보주의는 뿌리가 없는 말이다. 이 사실을 동국대 교수 홍윤기가 2002년 발표한 논문에서 밝혔지만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진보주의를 서양의 사회과학사전에서 찾아보니 항목 자체가 없었다며 놀라워했다. 모든 이념은 진보를 지향하므로 진보주의라는 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90년대 중반경부터 언론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등장한 좌파가 세력화하자 그들을 지칭하기 위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진보주의와 달리 진보(프로그레스)는 서양에서도 이따금 사용된다. 그러나 '진보-보수'가 쌍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지구촌 어느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한국특산품이다. 80년대 이전에는 주로 보수 혁신, '보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진보는 나의 것" 진보쟁탈전 치열

정체가 모호한 채로 한국정치의 키워드가 된 진보는 각 정파가 서로 차지하려는 대상이 되었다. 좌파, 자유주의자, 사전적 의미의 진보파, 심지어 보수도 "진보는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보쟁탈전이라 부를 만하다. 다음은 몇 해 전의 사례인데 여기에도 유시민이 등장한다. 

2011년 3월 진보대통합을 논하는 프레스센터 토론회에서 좌파의 대표격인 노회찬과 자유주의자 유시민이 함께 앉았다. 이때 노회찬이 우리와 함께 하려면 "좌클릭해서 진보쪽으로 오시오"라고 했더니 유시민은 "아니 내가 진보인데요"라고 말했다. 양정파의 수장격인 두사람이 봉숭아 학당같은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노무현은 정치적 동업자였던 유시민과 이념적 색깔이 달랐다. 노무현은 자신이 자유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좌파를 자처한 기록도 찾기 어렵다. 그는 자신을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나아가자는 사전적 의미의 진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필자가 조사한 출판계의 일화를 소개한다. 미국의 사회과학 원서를 번역하다보면 리버럴리즘이 수없이 등장한다. 한국의 출판계는 이것을 자유주의가 아닌 진보주의라고 번역한다. 폴 크루그먼의 저서 <미래를 말하다>의 번역자는 이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고 역자의 글에서 고백했다. 일종의 내부고발로 들린다. 리버럴을 진보주의자라고 번역한다면 프로그레스는 무엇으로 번역했을까. 필자가 직접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 정치를 말하다> 번역자를 만나서 물었다. 그 말은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노회찬 유시민 노무현과 같이 이념의 결이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한다. 이뿐 아니다. 보수 이데올로그인 조갑제는 2005년 국민대 강연에서 "보수가 진보다"라는 거꾸로 선 말로 충격을 주었다. 그의 말이 허언은 아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통해 민중의 빈곤을 구제하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 박정희가 남긴 서예 글자 중에 "진취와 도전"이 경매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팔린 것도 참고할 만하다.

사색진보 다툼 끝에 진보 혐오증까지
        
진보 용어의 혼돈이 실제 정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통합진보당 통합시에 좌파도 진보, 리버럴도 진보인데 같은 진보가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노회찬의 진보정의당과 유시민의 국민참여당 간에 통합이 이뤄졌다. 이런 일이 잘 될 리가 없다. 진보대통합은 곧 실패했고 그 여파로 나타난 진보 혐오증으로 진보 탈출 러시가 일어났다. 

이때 너도나도 진보라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진보는 진부하다는 비아냥이 들렸다. 진보정의당은 정의당으로 진보신당은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그리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통합진보당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갑제의 영향을 받아 명명한 것으로 보이는 뉴라이트단체 '자유주의진보연합'만이 진보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현상들은 이념갈등을 희화화시키고 무질서의 도가니로 밀어넣는다. 결과적으로 갈등을 악화시킨다.

진보라는 가짜 월계관을 차지하기 위해 네 정파가 각축하는 모습을 필자는 사색당파를 패러디 해서 '사색진보'라고 이름 지었다. 이들이 진보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혼돈은 이념갈등 이전의 문제이다. 이념 자체가 복잡한 세상을 반영하기 때문에 난해한 데다 우리 사회 특유의 혼란이 더해졌다. 그래서 진보 보수 좌파 우파 이념을 거론하면 다들 골치아프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런 혼돈으로 인해 실생활에서 겪는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오늘 저녁에도 직장인 동료들이나 대학생 친구들이 모여 술을 한 잔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정치가 안주로 올라온다.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진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같은 말이지만 제각기 부여한 함의가 달라서, 말이 얽히고 꼬여 불필요한 다툼이 종종 일어난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현상이다. 

세계 학계에 보고해서 국제적 공동연구에 나서도록 하고 싶다. 그 이전에 양진영의 연구자들이 만나 진보 보수 용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학술토론회를 열어야 한다. 필자의 의견을 붙이자면 좌파는 왼쪽으로 진보하자는 것 우파는 오른쪽으로 진보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대혼란으로부터 탈출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홍준표 유시민처럼 이런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다시 보고싶지 않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직접민주주의뉴스 www.ddnews.io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이념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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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간에이념연구소’ 대표. '부동산보유세강화시민행동' 집행위원. 80년대 도서출판 오월 발행인을 거쳐 90년대 프랑스동포신문 오니바를 펴냈습니다. 2000년대 재외동포신문 편집국장과 세계로신문 대표, 재외국민참정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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