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재판을 받기위해 광주지방법원에 도착한 가운데, 이 장면을 지켜본 인근 초등학생들이 학교 복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전두환을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재판을 받기위해 광주지방법원에 도착한 가운데, 이 장면을 지켜본 인근 초등학생들이 학교 복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전두환을 물러가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말로 4·3 때는 제주도민을 죽였고 4·19 때는 경무대 앞에서 학생들을 죽였고 5·18 때는 광주시민을 죽였다. 자서전에 또다시 이런 소리를 쓰는 자가 있으니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다."

지난 2017년 4월, 지금은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전두환 회고록> 출간을 두고 이러한 명문을 남겼다. 국내외 보통의 학살자들이 하는 변명인 '그때는 어쩔 수 없다'가 관통하는 한국사회 비극들과 이를 이용한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의 후안무치, 그리고 그 원죄를 촌철살인으로 전경화해낸 것이다.

"심한 얘기죠, 정말. 그렇게 사람이라는 건 균형감을 잃기도 한다는 좋은 예입니다. 자기 합리화가 그렇게 끔찍한 일이기까지 합니다. 그걸 우리가 일일이 얘기할 거리는 아니죠.(중략) 민중이 다 분노해서 때려죽여야 할 수도 있는 그런 악행을, 사람을 무수히 죽여 놓고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합니까? 참, 그건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을 하면 자꾸 분한 소리만 나가니까."

올해 초 "내 남편(전두환)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던 이순자씨의 망언 역시 이러한 후안무치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했던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은 이씨의 망언을 위와 같이 평했다. 전두환씨보다 4살이 적은 1935년생인 채 이사장은 박근혜 정부 당시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던 인터뷰로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잇달아 '노인'들의 일침을 소개한 것도 다 전두환씨 덕분이다.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훼손 재판과 관련해 알츠하이머 등을 이유로 출석을 거부하던 전씨의 23년 만의 법정 출석이 온 국민의 관심을 모은 11일, 개인적으로 눈길을 잡아끈 건 광주 동산 초등학교 학생들의 '기개'였다.

재판이 열린 광주지방법원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이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날 오후 창밖을 내다보며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광경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언론 카메라와 일반 시민의 카메라에 포착, 소셜미디어상에서 화제를 모은 이 광경은 전씨가 총칼로 학살했던 광주시민의 후손들이 시간이 흘러서도 역사와 진실을 부정하는 전씨를 또다시 부정하는 상징적인 장면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우리 나이로 88세인 '노인' 전씨는 퇴임 이후 처음 밟았다는 광주 땅에서도 변함없이 역사를 부정하며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중이었다.

학살자 전두환의 얼굴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방법원에 들어서며 '(5.18당시) 발포명령 부인하냐?'는 취재진 질문에 "왜 이래?"라고 말하며 짜증을 내고 있다.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방법원에 들어서며 "(5.18당시) 발포명령 부인하냐?"는 취재진 질문에 "왜 이래?"라고 말하며 짜증을 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역정'(逆情),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서 내는 성.

이날 전씨가 온 국민들에게 확인시킨 모습은 바로 그 '역정'에 다름 아니었다. 국민들의 눈을 대신한 언론 카메라 앞에서 "이거 왜 이래"라며 짜증을 내는 전씨의 얼굴은 완고한 고집쟁이의 그것이었다.

서울 연희동 전씨의 자택 앞에 나타난 보수 단체 회원들은 전씨의 건강을 걱정하며 "대통령님, (광주에) 가지 마세요"라며 울부짖고 난동을 피웠다지만, 알츠하이머를 앓는다는 전씨의 얼굴에 나타난 '역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과오를, 원죄를, 죗값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는 아집을 지닌 채 그대로 늙어버린 노인네의 똥고집.

성격은 '얼굴'에, 마음의 힘은 '목소리'에, 인간성은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이날 시종일관 카메라에 잡힌 전씨의 얼굴과 그가 보여준 역정은 대개가 애처롭거나 도리어 천진해지는 노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게 전씨는 도리어 사죄를 받아도 모자랄 광주 시민들 향해, 고 조비오 신부의 유족들을 향해, 국민들을 향해 성을 내는 중이었다.

이미 예견됐던 바다. 23년 전 내란죄 등으로 검찰 수사에 나서며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던 그 당당함(?)을 다시 볼 수 없으리란 예감은, 안타깝게 적중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대국민 사과가 없으리란 예감은 이날 확신이 됐다.

그저 시간이 흘러서, 전씨가 노쇠해서가 아니다. 불과 두 달 전 "내 남편(전두환)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던 부인 이순자씨의 망언에서부터 감지됐던 결과다. <전두환 회고록> 출간 역시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학살자의 논리 그대로였고, 회고록 출간 이후 전씨 측은 진실 왜곡과 관련해 단 한 번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실로 판명된 군의 헬기 사격에 대한 입장 표명 역시 없었다. 그저 지만원씨와 같은 극우 인사를 등에 업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활시킨 극우 세력과 태극기 부대를 방패 삼아, 한국 현대사의 진실을 부정·왜곡하면서 구차하게 제 살길만 도모해왔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상징적·물리적 지위는 놓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천문학적인 추징금 납부는 나 몰라라 한 채로.

법정에서라고 달랐을까. 이날 전씨 측은 법정에서 "과거 국가 기관 기록과 검찰 조사를 토대로 회고록을 쓴 것이며 헬기 사격설의 진실이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라며 공소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기소 내용을 전면 부인한 것이다. 또 전씨 측은 "고의성을 가지고 허위사실을 기록해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역시나 예상 그대로다.

이날 전씨의 법정 출석을 통해 국민들이 알게 된 진실이 하나 있다. 전씨가 그간의 출석 거부 사유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정정했다는 것, 국민들을 향해 역정을 낼 만큼 의사 표현 역시 확실하다는 것, 그리고 피고석에 동석했다는 이씨를 비롯해 변호사와 더불어 혐의를 부인할 자신들만의 논리를 탄탄하게 구축했다는 것 말이다.

재판 과정까지 TV 생중계 허가해야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전두환씨가 11일 오후 광주지법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관련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 재판에 참석한 뒤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으며 법원을 떠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비단 선고만이 아닌 재판 과정까지 TV 생중계를 허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개를 드는 것도 그래서다. 이번 재판의 경우, 광주의 법정에 선 전씨의 얼굴, 표정, 목소리 하나하나를 국민들이 확인하는 과정이 공공의 이익에 위배되기는커녕 오히려 '역사부정죄(역사왜곡죄)' 도입이 시급히 요구되는 작금의 사회 분위기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기의 재판이라 불렸던 미국의 O.J 심슨 재판의 경우도 미국에서 생중계가 허락된 대표적인 경우다. 한편으로 법원 내규에 달린 문제라고는 하지만, 중요 사건의 경우 선고만이 허락된 지금의 관행 아닌 관행을 꼭 지킬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전씨의 이번 재판의 심리 과정을 국민들이 생중계로 지켜본다면, 5·18 망언과 역사부정죄에 대한 개개인의 의견들이 좀 더 확실해지지 않겠는가.

"오늘 시작된 전두환 전대통령의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세간의 미진한 의혹들이 역사와 국민 앞에 말끔히 해소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자유한국당은 이번 재판이 가진 국민적 관심과 역사적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재판 결과를 차분히 지켜보며 지난 역사 앞에 겸손한 당, 후대에 당당한 당이 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이날 자유한국당 민경욱 대변인이 내놓은 논평의 전문이다. 신임 황교안 대표의 평소 화법만큼이나 오락가락하고 애매모호한, 가치 판단은 배제되고 추상적인 언어로 가득한 문장이요, 논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재판에 대한 제1야당 한국당의 입장은 어떻다는 것인가.

이번 재판이 역사에 남을 중요한 재판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전씨의 광주행과 법정 출석, 이어질 재판 과정은 '5·18 망언'과 같이 역사적, 사법적 단죄와 진상규명이 끝났다고 여겨졌던 사안을 끝끝내 들춰내고, 망언을 일삼으며, 지지자 결집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에게 경종을 울릴 반면교사가 돼야 마땅하다. 사자명예훼손죄가 형량이 높지 않다고는 하지만, 판결 역시 그러한 경종의 지렛대가 될 테고.

또 하나. 전·현직 대통령 12명 중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이 4명이다. 그 4명 모두 감옥에 갔다 왔거나 수감 중에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일각에서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대며 석방에 대한 요구를 시도하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례 없는 목하 '보석' 상태로 풀려난 상태다.

일본 우익들이 한국을 비하할 때 쓰는 용례가 바로 "한국의 대통령은 퇴임하면 감옥에 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끄러운 과거보다는 부끄럽지 않은 미래가 더 중요한 법이다.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친 동산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석방 운운하며 꼼수를 부리려는 두 전직 대통령과 지지자들에게 철퇴를 내리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번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에 대한 단죄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학살자 전두환'으로 인해 1980년 5월 이후 평생 고통 속에 살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수많은 광주 시민들을 위해서도 물론이고. 

태그:#전두환
댓글4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