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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빈소로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 고 김복동 할머니 영정 모시는 윤미향 대표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2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 김복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빈소로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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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가 28일 숨을 거뒀다. 항시 인자한 모습이던 할머니는 1년여의 암투병 끝에 9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1992년 1월 할머니와 인연을 맺은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에 따르면, 임종 직전 할머니의 마지막 말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였다고 한다. 그 말을 남기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3명으로 줄어들었다. 지난 2018년 9월까지 27명이었는데, 그새 네 분이 세상을 떠났다.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국민적 반대 속에 체결됐다. 이 합의에 따라 일본이 위로금 명목으로 내놓은 10억 엔을 기초로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됐다. 김복동 할머니는 "(그 돈) 바로 돌려보내라"고 호통쳤다. 암 수술 닷새 뒤인 지난 2018년 9월 4일, 김 할머니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서울 외교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들을 팔아가 그 돈을 가지고... 우리가 위로금 받으려고 여태까지 싸웠나? 위로금이라 하는 건 1000억을 줘도 우리는 받을 수가 없다. 바로 돌려보내라!"

"해도 해도 너무한다"

할머니는 남한테 잘 베푸는 분이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닌데도, 본인보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선뜻 돈을 내놓곤 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 선전활동을 벌이던 중에 동포들이 기림비 건립 문제로 힘들어 한다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1000불을 기부했다. 그해 일본에 가서는 조선인 학교를 방문하던 중에 울컥 하며 100만 원을 선뜻 내놓았다. 차별받는 동포 학생들을 보고 차마 그냥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기부의 뜻을 밝혔다.

부자는 아니지만 돈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김복동 할머니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근 30년간 일본과 싸웠다. 아베 신조 총리와 일본 정부는 그런 분들한테 위로금 명목의 돈만 내밀었다. 제대로 사과만 해도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될 텐데, 할머니의 마지막 말처럼 '해도 해도 너무하는 일본'이었다.

그래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가 암투병 중인데도 1인 시위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말렸을 텐데도 수술 5일 만에 빗속을 뚫고 나와 시위를 했다는 것 자체가 그 분노를 잘 설명해 준다.
 
고 김복동 할머니(92세)가 지난 9월 3일 종로구 외교통상부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화해치유재단 해산하라" 92세 김복동 할머니 1인 시위 고 김복동 할머니(92세)가 지난 9월 3일 종로구 외교통상부앞에서 화해치유재단 즉각 해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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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1992년(당시 66세)부터 자신의 피해 사실을 세상에 고발했다. 지금과 달리,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 어렵던 때였다. 가해자 일본한테 분노하기보다, 피해 생존자 여성들에게 편견의 시선을 더 보내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할머니는 투사가 되어 일본에 맞서 싸웠다.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날아갔다. 거기서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일본의 만행을 고발했다. 이때 동행했던 윤미향 대표은 8년 전에 쓴 칼럼 '위안부 피해자에서 인권운동가로, 김복동 할머니의 20년'에서 할머니의 당시 활약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할머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성들에게 명확하고도 절절하게, 전쟁에서 자행되었던 여성에 대한 국가의 폭력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했던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남달리 구체적이었던 할머니의 기억력과 사리판단력은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읽어내시는 것 같았다. 기자들과 만났을 때, 작은 포럼을 할 때, 대중집회를 할 때, 그때마다 할머니의 파워는 다르게 드러났다."
-2012년 11월 7일자 <민중의 소리>.
 
할머니는 유럽과 미국과 일본 등지를 무대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집회를 무대로 일본 정부의 사실 인정과 사죄를 촉구했다. 동료 피해 생존자들과 함께한 할머니의 이런 노력은 '위안부' 문제를 널리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로 냉전질서가 해체되던 1990년대 초반에 중국이 탈냉전을 이용해 세계적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데 반해, 일본은 당시 세계 2위 경제력을 갖고도 정치적 지위를 높이지 못했다. 일본이 탈냉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데는, 남북한과 중국·대만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각시켜 정치적 운신 폭을 축소시킨 것도 크게 작용했다.

독도 영유권을 탐내는 일본에 맞서 우리 국민들이 일치된 목소리를 낸 것, '위안부' 및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이 용감하게 나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한 것 등이 일본의 정치적 지위 향상을 견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일본 눈치 보느라 시도할 수 없는 일들을 국민들이 해낸 것이다. 그 대열에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있었다.
 
고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2012년 3월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으로부터 법적 배상금을 받게 되면 전액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에서 성폭행 피해를 본 여성들을 돕는 데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2012년 3월 오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으로부터 법적 배상금을 받게 되면 전액 콩고민주공화국의 내전에서 성폭행 피해를 본 여성들을 돕는 데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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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동 할머니는 201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당국자들을 만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직접 겪은 당사자가 증거다"라며 "증거가 왔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라"고 호통쳤다. 산 증거, 살아 있는 피해 생존자들이 이렇게 용감하게 일어나 고발하니, 일본도 움찔할 수밖에 없고 세계인들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분들의 투쟁이 있었기에, 일본이 세계적 경제력을 갖고도 1990년대의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21세기 하고도 19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이 여전히 대국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해 대국화를 완성하지 못한 것은 김복동 할머니를 비롯한 일제 식민지배 피해 생존자들의 꾸준히 과거의 잘못을 증언하고, 책임을 물었기 때문이다.

열다섯, 더는 고향의 매화를 보지 못하게 됐다

할머니는 통도사로 유명한 지금의 경남 양산에서 딸 여섯 있는 집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권주리애 북코리아 대표의 취재 및 정리로 할머니의 삶을 자전적으로 소개한 <Remember Her 1 김복동>에 이런 대목이 있다.
 
"양산 우리 집은 가스나만 여섯인 딸 부잣집이라. 내가 네짼데, 아부지가 남의 빚보증을 서서 망하기 전까지는 땅이 많아 소작인도 거느렸제."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김복동은 낭만적인 추억을 쌓아갔다. "매화가 봄을 알리면 홍매화 백매화 보러 엄마 손 잡고 꽃구경도 갔네"라고 위 책에서 회고했다.

일본은 해마다 매화를 기다리며 봄을 즐겼던 그를 끌고가 버렸다. 김복동 할머니의 어머니는 딸들이 '위안부'로 강제동원 될까 두려워 언니 셋을 시집보내면서도 '설마 저 어린 것을' 하며 어린 김복동을 그냥 뒀다고 한다. "내사 열다섯 살이라, 어리니까 설마설마 했는데"라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위 책에 따르면 할머니가 강제동원된 해는 1941년이다. 어느 날, 동네 구장과 면장이 누런 군복을 입은 일본인과 함께 불쑥 집에 들이닥쳤다. "어무이는 본능적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고 할머니는 회고한다. 방문자들은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오"라며 "3년만 일하면 되고, 그 전에 시집 가게 생겼음 보내주고, 만약 돈을 더 벌려면 3년이 지나도 일을 더 할 수 있소"라고 말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어린 김복동을 보낼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나 힘이 없었다. 일본은 그를 끌고갔다. 이후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건너간 뒤, 배를 타고 대만(타이완)-광동성-홍콩-인도네시아-말레시이아-싱가포르를 전전했다.

군복을 입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생활은 끔찍했다. "내 앞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득한 위안소에서 첫날밤은 끔찍했어"라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위안소 관리인은 창 밖 건물을 가리키며 "전쟁 끝나면 저렇게 큰 집 살 만큼의 돈을 줄게"라고 다독거렸다. 하지만 그에겐 쓸데 없는 장밋빛 환상이었다. 몸도 마음도 망가지고 있었다.

주린 배와 병든 몸으로 일본의 강압을 견뎌야 했다. 쉬는 날도 없었다. "평일에는 15명쯤, 토·일요일에는 셀 수가 없다. 너무 많아서. 한 50명쯤 됐을 기라"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그렇게 찢기고 패이고 살점 뜯긴 채 짐승만도 못한 삶을 견뎌냈다"고 할머니는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애탔던 것은 어머니가 딸이 이렇게 된 줄도 모르고 열심히 기도하고 계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에도 한가닥 위안이 되어준 게 있다. 바로 아리랑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리랑을 불렀다. 가슴의 한을 담아 부르면 좀 편해지곤 했다.
 
"아리랑을 부르네, 우리가 아는 노래, 우리말, 우리 노래 ······. 살아 있는 생명체가 바랄 수 있는 최소한의 행운이 우리에게 깃들기를 기도하며 소원하고 고향을 그리며 불렀지, 한을 담아 부르는 아리랑을 일본 군인들도 알게 되었고, 우리와 접하는 현지인들도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입에 맴도는 아리랑!"
- <Remember Her 1 김복동> 중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위안소를 폐쇄하고 '위안부'들을 간호사로 전환시켰다. '일본군 위안'에서 '일본군 치료'로 역할을 강제로 바꾼 것이다. 이에 따라 할머니도 군복을 벗고 간호사복을 입어야 했다.

일본군은 피가 필요하면 '위안부'들에게 수혈을 요구했다. 할머니 혈액형은 B형이었다. 할머니의 혈액은 B형 일본군 환자들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일본 정부는 할머니가 간호사로 일하는 사진을 찍어 전쟁 직후 오사카 박물관에 보관했다. 자신들이 할머니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를 은폐하고 그런 식으로 홍보한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가 귀국한 것은 1948년이다. 일제 패망 뒤로도 싱가포르에 3년을 더 체류한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일본은 '위안부'들의 귀국을 책임져 주지 않고 무책임하게 방치했다. 그래서 김복동 할머니는 미군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이때서야 귀국했다. 끌려간 지 7년이 지난 뒤였으니, 당시 나이는 스물둘이었다.

딸이 생환하자 어머니는 결혼을 종용했다. 스물두 살 된 처녀는 자신이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딸이 결혼하기 싫어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은 뒤 "세상에 어데 그런 일 다 있노?"라고 고함치며 혼절했다. 깨어난 뒤에 어머니는 자신을 원망했다. 끌려가는 딸을 막아주지 못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탄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심장병을 앓게 됐다.

어머니의 간청을 끝내 못 이긴 김복동은 여덟 살 많은 남성과 결혼했다. 하지만, 불행했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심한 구박을 당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결국 견디다 못해 짐을 싸서 귀가했다. 4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지난 2016년 9월 14일 열린 1248번째 수요시위에 참여한 고 김복동 할머니가 이날 시위 사회를 맡은 김동희 정대협 사무처장(오른쪽)의 부축을 받으며 일본대사관을 향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 한국 정부가 이 할머니의 손 잡아줄 수 없나요? 지난 2016년 9월 14일 열린 1248번째 수요시위에 참여한 고 김복동 할머니가 이날 시위 사회를 맡은 김동희 정대협 사무처장(오른쪽)의 부축을 받으며 일본대사관을 향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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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렸지만 외쳤고,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그 뒤 재산을 처분하고 부산에서 구멍가게를 했다. 강제, 강제, 할머니 인생에는 이 '강제'라는 말이 늘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도시개발 명목의 강제 철거를 당해 구멍가게를 잃었다. 그 뒤 근근이 살다가 1992년 1월 7일 텔레비전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위안부' 피해에 관한 소식이었다. 비밀을 보장할 테니 피해 사실을 신고하라는 방송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극구 말렸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의 7년을, 밀림에서 짐승처럼 학대 당한 7년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어서 신고했지"라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숨죽인 피해 생존자로 살았던 할머니가 포효하는 투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일본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인자한 얼굴을 무섭게 바꾸며 일본을 상대로 맹공을 펼쳤다. 윤미향 칼럼 표현처럼, 할머니는 대중을 움직이는 파워를 발휘했다. 다른 피해 생존자들과 함께, 국민들과 함께 벌인 할머니의 투쟁에 힘입어 세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세계인들도 일본의 범죄를 어느 정도 알게 됐다. 이 문제만 거론되면 일본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리게 됐다. "내가 곧 증거다!"며 밀어붙이는 할머니들의 투쟁이 산출한 결과물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눈을 감았지만, 그의 유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할 때까지 계속될 투쟁이다. 이 투쟁이 승리를 거두는 날이 오면, 김 할머니는 홍매화·백매화 보러 엄마 손 잡고 꽃구경도 가던 때처럼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지도 모른다.

이 일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뻗어나가기를, 할머니는 소망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17년 9월 고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300차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지난 2017년 9월 고 김복동 할머니가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300차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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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복동 할머니의 생애 부분은 책 'Remember Her 1 김복동'를 참고하여, 재정리했습니다.


Remember Her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1 : 김복동 - 기부 천사

권주리애 지음, 북코리아(2018)


태그:#김복동,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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