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본은 노벨상 많이 받는데, 우리 한국은 왜...'라는 말은 매년 10월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한국의 학계·언론계가 짚는 원인의 허구성, 일본 현황, 그리고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11월 1일과 2일 이틀 4회에 걸쳐 모색해 봅니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 
①'한국이 노벨상 못받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환상

막스 피셔가 2013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조사 결과를 보면, 1901년부터 2013년까지의 노벨상 역사를 통틀어 전체 수상자의 약 3분의 1은 미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반 이상이 미국, 영국, 독일의 3개국에서 배출됐다. 프랑스를 포함하면 이 비율이 3분의 2가 된다. 지역으로 나눠 본다면 서유럽과 북미 지역이 역대 노벨상의 80%가량을 가져갔다. 동유럽을 포함하면 90%가 된다(관련 자료 보기).

막스 피셔의 통계는 노벨 평화상과 문학상도 포함하고 있다. 통상 평화상과 문학상의 경우, 서유럽과 북미 이외 지역에도 상당수가 수여됐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과학 계열 노벨상의 경우 서유럽과 북미 지역에의 집중도는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쉽게 말해 노벨상이라고 하는 상은 지난 120년간 유럽과 북미 지역 국가들, 특히 그중에서도 소수의 강대국들의 놀이터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유럽과 북미 이외의 지역에서 이 아성을 깬 것이 일본이다.

노벨상은 서방 강대국들의 놀이터
 
노벨상 시상식 장면.
 노벨상 시상식 장면.
ⓒ 노벨상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던져야 할 올바른 질문은 '왜 지난 120년 가까이 노벨상이 몇몇 국가 내지는 몇몇 지역에 의해 독점돼 왔는가?'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갑자기 그 독점의 틈바구니를 일본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가 돼야 할 것이다.

노벨상을 싹쓸이한 지역, 국가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본주의와 산업경제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특히 노벨상의 무려 3분의 2를 싹쓸이한 4개국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는 사실 지난 2세기 동안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호령했던 나라들이다. 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여 비교적 인구가 크고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이들 나라들이 노벨상을 싹쓸이했을까?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 나오려면 장기간에 걸쳐 꾸준한 투자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 연구자가 혼자서 골방에 틀어박혀 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다.

특정 세밀한 전문 분야 전공자들이 다수가 모여서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장기간에 걸쳐 활발하게 교류하고 협력을 해야 한다. 능력 있고, 특정 분야에 높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여럿 모여 앉아서 하나의 팀이 되어 서로 돕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동일 주제에 대해 반복적으로 장기에 걸쳐 새로운 발견을 위한 시도를 거듭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새로운 과학적 업적 창출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대규모 장기 연구 투자를 가능케 할 강력한 '경제력'이 필수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거대한 경제와 산업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거대한 경제와 산업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대규모 고등연구기관 혹은 그런 기관들로 구성된 연구 클러스터(집적지)가 조성돼야만 한다. 다수의 전문가들을 지리적으로 압축적인 공간 속에 대규모로 밀어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만 가지고는 안된다. 연구기관 간의 경쟁과 교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고등연구기관의 클러스터가 복수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규모 고등연구기관의 클러스터를 복수로 확보하려면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인적·경제적 투자가 필요하다. 그 정도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나라가 전세계에 몇 나라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수의 대규모 인구-경제 국가들이 노벨상을 싹쓸이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고등 연구 클러스터의 중요성은 실제로 데이터로도 확인되고 있다. 1994년에서 2014년간 과학 계열 노벨상 수상자를 전수 조사한 2016년도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보면, 1994년에서 2014년간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기관이 3개 있다. UC버클리, 콜럼비아 대학교, 그리고 MIT이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연구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소속 기관을 세 시점으로 나눠 분석했다. 즉, 노벨상 수상자들의 박사학위 취득 대학, 노벨상을 받은 업적을 산출했을 당시의 소속 기관, 그리고 노벨상을 받을 때의 소속 기관이다. 이 세 시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기관이 이 3개 대학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세 대학교가 미국의 3대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이다. UC버클리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클러스터, 콜럼비아 대학교는 뉴욕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클러스터, 그리고 MIT는 보스턴을 중심으로 하는 북동부 클러스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 규모와 고등연구 클러스터의 중요성이 실제로 일본의 사례에서 확인되고 있을까? 일본은 이미 1967년에 영국, 독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세계은행 세계개발지표 자료). 이 지위는 2010년도에 중국에게 2위 자리를 내주기까지 무려 43년간 유지된다.

세계은행 데이터로 달러화 경상가격 기준으로 비교해 보면 1980년대 후반 일본의 GDP는 미국의 절반을 돌파하게 된다. 1995년이 되면 일본 경제규모가 미국의 70%를 넘어선다. 일본의 인구가 미국의 절반도 안되고 땅 넓이는 캘리포니아 주보다 작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엄청난 성과이다. 일본 경제의 전성기에 일본 경제의 규모는 독일의 2배를 넘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의 2배 정도에 이른다. 중국이 미국을 아무리 많이 따라잡았다 해도 2017년 달러화 경상가격 기준으로 아직 중국 경제는 미국의 63%밖에 안된다.

쉽게 말해 지난 반세기의 일본 경제를 돌아보았을 때, 경제규모 면에서 일본은 복수의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낼 힘을 갖고 있던 것이다.

일본의 3대 고등연구 클러스터: 관동, 관서, 중부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세 클러스터에서 고루 나왔다. 관동, 관서, 중부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세 클러스터에서 고루 나왔다. 관동, 관서, 중부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실제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대부분이 동경대, 동경공업대, 동경이과대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 클러스터, 교토대, 오사카대, 오사카시립대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 클러스터, 그리고 나고야대를 중심으로 하는 중부 클러스터의 세 군데에서 나왔다.

수상자의 분포도 어느 한 쪽 클러스터에 치우치기보다는 비교적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 3대 고등연구 클러스터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이 세 개의 클러스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본의 과학연구를 이끌어 나가는 삼두마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세 개의 클러스터는 일본에서 가장 커다란 세 개의 산업 중심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도 지역총생산 기준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지방 단위는 단연 동경도(약 940조 원)이다. 그 다음이 오사카부(약 380조 원), 그리고 3위가 바로 나고야시가 위치한 아이치현(약 360조 원)이다.

2014년도 서울시의 지역총생산이 328조 원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3개 산업 클러스터는 서울시를 5개 정도 묶어 놓은 것과 유사한 규모가 된다. 이러한 거대 산업경제 클러스터가 일본의 3개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떠받치고 있는 경제적·산업적 기반이 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기사에서 거론했던 다섯 개의 요인을 놓고 본다면 투자 확대, 기초과학 중시, 풍족한 연구환경, 해외 네트워크, 장인 정신 등으로는 일본의 성공 그리고 서방 대형 국가들의 노벨상 싹쓸이가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지난 120년간 노벨상의 대부분을 가져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이들이 강력한 경제력과 산업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복수의 대규모 고등연구 클러스터라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 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이 2000년도 이후 이들 4개국가들을 추월하거나 혹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 역시 일본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가 해낸 것처럼 강력한 경제력과 산업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복수의 대규모 고등 연구기관 클러스터라는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역시 뚜렷해진다. 지금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추가적으로 가일층 투자 규모를 늘리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구개발 투자를 양적으로 늘리기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복수의 고등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서 과학기술 연구의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복수의 산업경제 기반과 철저히 결합시켜야 한다.

(* 다음 기사 '일본의 노벨상 빅뱅의 세 가지 수수께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장부승 교수는 현재 일본 오사카시와 교토부 중간에 위치한 간사이외국어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글쓴이가 2018년 10월 26일 내일신문에 기고한 칼럼, "일본의 노벨상 빅뱅의 미스터리"를 확대 보완한 것입니다.


태그:#노벨상, #일본
댓글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학교수.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스탠포드대학교 쇼렌스틴 펠로우, 랜드연구소 스탠턴 펠로우를 거쳐 현재는 일본 오사카 소재 관서외국어대 교수 재직중. 일본 및 미국, 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을 상대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booseung.chang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