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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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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참석한 한 행사에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고 잠을 청하기 위해 수면실로 지정된 방에 누웠다. 그 넓은 방에는 이미 사람들이 여기저기 누워 곯아떨어져 있었고 에어컨을 다소 세게 튼 탓인지 쌀쌀했다. 그리고 몇 분이 흘렀을까 누군가 누워있는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명백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람이 그냥 이 상태로 자자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불편함은 표시했던 것 같다. 내가 떨었던 것인지 '춥냐'는 질문도 했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그 방을 나온 나는 마셨던 술을 모조리 토했다.

사건을 가능한 상세하지 않게 적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나를 만졌던 그 사람은 지금도 내 주변인으로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흘러 나는 그를 내가 운영 중인 모임에서 다시 마주했다. 그는 나를 껴안은 일은커녕 우리가 그 행사에 함께 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이따금 그는 모임에 나왔고 가끔은 나의 옆자리에 앉았으며 때로는 내 몸에 손을 댔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그 사람이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싫었다. 불쾌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모임은 지지부진 했고 심란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끄는 사람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풍파를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일을 끄집어냈을 때 벌어진 소란과 헝클어질 인간관계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조용히 묻어놓고 지나가고 싶다. 그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최근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두 건의 '무고죄' 관련 청원.
 최근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두 건의 '무고죄' 관련 청원. 사진은 6월 4일 오후 기준 청원 참여인원 수.
ⓒ 국민청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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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죄' 관련 청와대 청원, 무엇이 문제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있다. 무고죄와 관련한 두 건의 청와대 국민청원 때문이다. 한 건은 무고죄의 형량을 '살인, 강간'의 수준으로 높여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성폭력 가해 지목인이 무고로 피해자를 고소하는 경우 성폭력 여부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지 무고 혐의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겠다는 검찰의 성폭력 수사 매뉴얼의 개정을 취소해달라는 것이다.

전자는 20만 건이, 후자는 10만 건이 넘는 동의를 기록했다. 특히나 '무고죄 특별법 청원'은 해당 페이지에 첨부된 뉴스 링크에서 알 수 있듯 얼마 전 공론화 된 사진 모델 성추행·협박 사건이 허위라는 주장을 주된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의 근거는? 바로 사건 이후 피해자가 보낸 메시지다. 피해자는 사건 이후에도 가해 지목인에게 촬영 일이 더 있는지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성추행 피해자가 저럴 수 있냐'는 의혹을 보냈다. 아니 의혹을 넘어 무고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의아하다. 청원에 링크된 기사에서조차 '학원비 등 금전적인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촬영에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당 상황이 발생한 맥락을 짚고, 공개된 메시지에서 피해자가 '촬영 사진이 유출될지에 대해 걱정'하는 모습이 보임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사에는 해당 메시지는 경찰에 제출된 자료가 아니기에 당장은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으며, 메시지가 공개돼 심각한 2차 피해가 발생했다는 경찰의 입장도 함께 담겨있다. 말하자면 참고를 위해 첨부된 기사는 청원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안전한 나라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안전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피해자다움'이 만드는 악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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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다움'이 만드는 악영향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청원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소위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강력함을 뜻하지 않을까. '성폭력 피해자는 이러할 것이다(혹은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피해자다움'이 강한 사회일수록 제대로 된 성폭력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피해자의 고소와 공론화가 손쉽게 허위이자 무고로 치부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 기준에 어긋난 피해자의 모든 행동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지시하는 증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성추행 피해자는 손쉽게 의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거기에 '여성은 남성을 위험에 빠트리기 위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용한다'는 오래된 혐오적 편견 또한 이런 상황을 가중시킨다. 나는 저 청와대 국민청원이야말로 '무고죄 특별법' 같이 위험한 법 따위는 만들어져서는 안 될 이유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 개정된 검찰의 성폭력 수사 매뉴얼 또한 되돌려져서는 안 된다. '피해자다움'에 대한 통념에서 경찰과 검찰조차도 자유롭지 못함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로 인해 조사 과정에서 거꾸로 피해자가 사건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증거 수집이나 사태 파악에 있어 난항을 겪은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일한 수사기관이 피해자를 동시에 피의자로 지목하는 것은 피해당사자에게 진술 철회의 압박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진술이 피해가 아니라 무고의 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제대로 된 증거 수집과 수사는 어려워진다.

국제경찰장협회(IACP)는 성폭력 무고 기소의 요건으로 반드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철저하고도 완벽한 수사를 완료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의 조사 시 반응과 행동을 무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선 안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수사 결과 어떠한 성폭력도 없었으며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검찰의 성폭력 수사 매뉴얼 개정은 국제적인 상식에 기반하고 있다.

'상식적'이라 생각한 편견을 깨닫기를 바라며

다시 서두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따금 만약 내가 겪은 일을 공론화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호소할 때에 어떤 일이 발생할까 생각해보곤 한다. 신뢰 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마 당연히 나를 믿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과 웃으며 대화를 하고 모임 참석을 독려했으며 심지어 신체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가만히 있었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그런 충격적인 일이라면 잊힐 리가 없는데 왜 어떻게 상황을 모면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냐고 채근하지는 않을까.

물론 남성인 나와 여성인 피해자의 증언력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성범죄 피해를 꾸며내 사익을 취하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꽃뱀론'이 활개 치는 게 이 나라니까. 아마 나는 성별 때문에 무고라는 오명을 피해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실 이는 서두에 나의 경험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여성인 피해자의 일을 인용했다면 '그 사람 말은 어떻게 믿느냐, 이미 편향된 판단을 내리고 말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피해자'의 위치에 선다면 많은 것들이 달리 보이며, '상식적'이라 생각했던 기성의 판단 기준이 사실은 편견에 불과함을 알 수 있기에 내가 가장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성범죄는 많은 경우 낯선 사람보다는 같은 공동체 내부에서 사적인 관계에 놓인 이들에 의해 발생한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신고를 통한 공적 절차보다 개인적인 해결을 시도하거나(피해에 대한 사적인 보상과 사과 요구) 혹은 묻고 가기를 선택한다. 두 사람 사이에 명백한 권력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가해자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불편한 티를 내기도 힘들다. 나는 이런 현실이 정확하게 전달되었기를 바란다. 

두 건의 청원에 3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동참한 것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변화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디 간절하게 요청한다. 우리 사회가 이루어낸 약간의 진전을 무위로 돌리지 말자. 용기를 낸 피해자들이 정의로운 처분을 쟁취하는 것을 가로막지 말자. 피해자들이 그늘에 숨는 게 너무도 당연해져 버린 사회를 내버려 두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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