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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약하는 이상룡은 조상 대대로 물려져온 안동 임청각(국가 보물)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가족들과 함께 걸어서 추풍령까지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만주로 망명했다.
 뒷날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활약하는 이상룡은 조상 대대로 물려져온 안동 임청각(국가 보물)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가족들과 함께 걸어서 추풍령까지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만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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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일제 총독부는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한다. 총독부는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을 체포, 그 중 105인을 투옥한다. 흔히 '105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신민회는 해체되고, 신민회 회장 윤치호 등이 친일 경향으로 돌아서며,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된다. 하지만 많은 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105인 사건은 국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왜 일본 총독부는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탄압했을까? 당시 신민회가 전국 최대의 항일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1901년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구, 이동녕, 박은식, 이희영,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등 독립협회 청년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밀 결사단체이다.

일제가 신민회를 특히 탄압한 이유

신민회는 입헌군주국을 지향한 독립협회와 달리 공화정 체제를 추구했다. 회원끼리도 서로 알 수 없게 점조직으로 꾸려졌음에도 1910년 들자 주요 애국계몽운동가의 거의 대부분이 가입했고, 군 단위까지 지부를 두었다. 평양 대성학교 등 국내에 많은 학교를 세웠고, 국외에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新興)무관학교의 신흥은 '신(新)민회가 나라를 부흥(興)시킨다'는 의미였다. 일제 총독부로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막강한 항일 단체가 바로 신민회였던 것이다.

구찬회 생가를 찾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 회원들
 구찬회 생가를 찾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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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의 최연소 회원은 대구 서변동 출신 구찬회(具璨會, 1890.1.27.∼1910.5.13.)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울산 서생포 전투 등지에서 공을 세웠고, 류성룡의 군관으로도 활약했던 구회신(具懷愼)의 12대손인 구찬회는 (당시 주소로)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서변동 1111번지(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로3길 47-12)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던 구찬회는 15세였던 1906년 3월 신학문을 학습하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다시 융희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16세 되던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다.

1909년 신민회는 비밀간부회의를 통해 독립군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의한다. 이 방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안동의 이상룡(1858∼1932)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임청각(보물 182호)을 팔아 마련한 독립운동 자금을 들고 1911년 1월 5일 안동을 떠난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3세였다.

일주일 내내 걸어서 추풍령에 도착하는 이상룡 가족

이상룡 가족은 일주일 동안 계속 걸은 끝에 1월 12일 추풍령에 닿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이상룡은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무릎을 꿇고 종이 될 수는 없다"라고 다짐한다. 안동을 떠나고 한 달 뒤인 2월 7일, 이상룡 가족은 먼저 만주로 망명한 처남 김대락의 거주지 횡도촌에 당도한다. 그 날 이후 이상룡은 1925년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활약하는 등 1932년 병사할 때까지 줄곧 항일 투쟁에 매진했다

이상룡 소개 이유


본래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령제였고,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미국의 조선 위임 통치를 주장하자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했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이 취임했다. 그 후 임시정부의 대통령제는 국무령제로 바뀌었고, 이때 이상룡이 취임했다.

이 글에서 신민회 주요 인사 중 이상룡을 특별히 소개하는 것은 그를 기려 세워진 '이상룡 구국 기념비'가 대구 달성공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룡은 만주 벌판에서 고령과 병으로 말미암아 고단했던 74세의 삶을 마감했지만, 구찬회는 불과 20세에 이승을 떠났다. 1909년 이래 만주로 간 그는 각종 독립운동 독려 문서들을 자필로 옮겨 국내 인사들에게 배포하던 중 1909년 12월 일제에 체포되었다.

19살 독립지사에게 배후를 추궁한 일제

그의 나이가 겨우 19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일제는  '배후 인물을 실토하라는 잔혹한 고문'을 했다. 그러나 지사는 '굴하지 아니하고 악형을 받았다. (결국) 1910년 5월 13일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권대웅 <달성의 독립운동가 열전>)' 

정부는 그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외세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스무 살 젊은 청춘, 그의 생가터에서 답사자는 그저 애잔할 뿐이다. 무엇으로 그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으랴! 땀을 쏟고 피를 흘리고 마침내 스무 살 새파란 생명까지 바쳐 얻은 독립인데, 오늘날 두 동강 난 유일한 나라로 지구상에 남아 있으니….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이 두문불출의 조상 구홍을 기려 세운 사당 표절사. 구찬회 생가터에서 동화천을 건너 동변동으로 들어서면 산비탈에 서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이 두문불출의 조상 구홍을 기려 세운 사당 표절사. 구찬회 생가터에서 동화천을 건너 동변동으로 들어서면 산비탈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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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나무와 잡다한 건물들에 가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10대이던 무렵에는 생가에서 동화천까지가 그냥 물가였을 터,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구회신이 두문불출로 이성계를 거부한 8세조 구홍(具鴻)을 기려 세운 표절사(表節祠)가 눈에 들어 왔으리라.

조상은 왕조를 뒤엎은 세력도 거부했는데, 어찌 바다를 건너온 일본 세력에게 무릎을 꿇을 것인가. 비록 이상룡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무릎을 꿇고 종이 될 수는 없다"라고 다짐한 때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지 여덟 달 뒤의 일이지만, 구찬회는 진작 그 말을 듣고 또 가슴에 새겼으리라.

"머리는 내놓아도 무릎은 꿇을 수 없다"

구찬회 생가와 표절사 사이를 흐르는 동화천은 대구에 남은 유일한 자연 하천이다. 아래로 동화천을 굽어보며, 구찬회 지사와 같은 선열들의 뜨겁고 올곧은 정신이 이 땅에, 우리들의 마음에 굳건히, 영원히 남아 있기를 소망해 본다.

구찬회의 고려말 조상 구홍과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을 섬기는 재실 송계당. 구찬회 생가 바로 뒤에 있다.
 구찬회의 고려말 조상 구홍과 임진왜란 의병장 구회신을 섬기는 재실 송계당. 구찬회 생가 바로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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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권대웅 <달성군의 독립운동가 열전> 참조



태그:#구찬회, #구회신, #이상룡,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배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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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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