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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미친 듯이 한국말로 폭풍 수다를 떨고 싶을 때가 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만난 한국 엄마들을 불러낸다. '네 맘이 내 맘이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끝없는 이야기들을 풀어내다,

"머리 안 굴려도 말이 술술 나오니 살 거 같네! 우리한텐 우리말이 최고야."

속상하다. 호주 멜버른에서 지낸 시간만큼 영어 실력이 비례하지 않아서. 야속하다. 그나마 편하게 구사할 수 있는 한국어마저 갈수록 어설퍼지는 듯해서.

이민 1세대 부모들은 그야말로 영어의 유창성이 관건이다. 똑같은 능력과 경력을 갖고 있다 해도, 결국은 영어 능력에 따라 직업의 유무부터 직업의 질과 대우 또한 현저하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고, 멜버른 살다 보니, 인도인들의 알아듣기 힘든 유창한 영어마저 부러워져."

한 지인의 솔직한 심정이다. 이민 여성들 중에는 결국 영어 장벽 때문에 본인들의 훌륭하거나 화려했던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구직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발음보다 소통능력이 중요한 나라

학교나 커뮤니티 센터에서는 각종 다양한 하모니 데이 축제가 열린다.
▲ 커뮤니티 센터의 하모니 데이 학교나 커뮤니티 센터에서는 각종 다양한 하모니 데이 축제가 열린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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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중국,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캄보디아, 일본, 브라질, 프랑스, 동티모르, 독일, 영국,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파키스탄... 아이가 다니는 멜버른 초등학교 구성원들의 출신 국가들이다. 이들의 영어에는 각각의 억양이 있다.

처음 멜버른 생활을 시작한 나는 한동안 당황했다. '발음'을 중시하는 국가에서 미국식 발음만을 듣고 공부한 나는 "Do you need a receipt?"(영수증 드릴까요?)를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식 영어에 비해 발음은 덜 굴리지만, 끝을 흐지부지 놓아버리는 오지식(호주인) 발음과 더불어 다양한 국가의 억양들에 갈피를 못 잡고 헤맸었다.

국가 구성원의 50%가량이 이민자로 구성된 호주는 그야말로 전 세계 인종과 더불어 전 세계의 언어, 다양한 억양이 섞인 영어의 용광로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발음이 문제가 아니라, 잘 알아듣고 본인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어른들과 달리 이민자 아이들의 언어교육은 한층 더 복잡하다. '자꾸만 달아나는 아이들의 한국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고민 하나가 더 얹어진다.

멜버른에서도 한국인 영어·수학 과외 교사를 찾는 경우가 있다. 중등 시절에 이민을 온 아이들은 이미 한국식 사교육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가, 현실적으로 영어 때문에 수업을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단단히 영어 대비를 해온다 해도 결국 문화장벽을 뛰어넘는 일이 또 남아 있다.

호주의 교육은 교육방법과 교육과정에서 한국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처럼 교사 중심의 획일적 수업과는 거리가 멀다. 초등학교에서는 교과서를 사용하는 학교가 드물고, 시험도 거의 치르지 않는다. 아이의 학교 선택을 위해 school tour(입학 전 부모들의 학교 선택을 위해 교사가 학교 안내를 해주는 프로그램) 중 교실 안의 수업 장면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한 무리는 카펫 위에 엎드려 활동을, 한 무리는 칠판에 판서를, 한 무리는 아이패드와 노트북으로 검색을, 한 무리는 노트에 필기를 하고 있었다. 덩치 큰 고학년 반에서는 교사를 찾는 것이 일이었다.

프렙(초등학교 입학 전 1년 준비 단계로 초등학교에 편입되어 있음, 이때부터 의무교육이 시작됨) 시작과 더불어 말하기(발표)와 쓰기 교육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호주 사회는 대부분의 업무가 문서로 작성되고 이메일이나 우편 메일로 처리된다는 점에서 쓰기 교육(특히 영어교육에서)이 소홀히 여겨지는 한국에서 온 아이들·어른들은 상당히 불리하다. 예로 렌트한 집에 문제가 있다면 주인이나 부동산에 편지를 써야 하고, 교사에게 전달할 내용이 있을 경우에도 전화 대신 이메일을 사용해야 한다.

반면, 호주에서 태어나거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민 온 아이들은 영어에 대한 불안감이 현저히 적다. 현지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시작하니 영어에 대한 걱정보다는 한국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고 할까? 한국에서 영어 교육이 어렵다면, 반대로 이곳에선 한국어 교육과 유지가 어렵다.

알파벳도 모른 채로 현지 유치원에 들어가 기본 인사 표현 정도만 터득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이제는 한국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 프렙에 입학했을 때는 교사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해 한국 친구들과만 어울리던 아이는, 한 학기가 지나자 본인처럼 영어가 서툰 중국아이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다. 두 학기가 지나고부터는 영어 구사력이 자유로워지면서 오지(호주 현지인) 친구들과도 놀기 시작했다.

한글학교가 '지루하다'는 아이

아이는 한국어를 배우면 다시 영어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아이는 한국어를 배우면 다시 영어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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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쯤 되자 위기감이 닥쳤다.

'아이가 한국말을 잊어버리겠네!'

주변 이민 선배들이 왜 한국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지 이해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엄마가 영어를 잘 못 하니 네가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자 아이는 반박했다.

"우리가 호주에 살면 영어 배워야 한다고 말했잖아. 엄마도 나랑 같이 학교 가서 미즈 울랜드(담임교사)에게 영어 배우면 돼."

아이가 '팩트폭행'을 거침없이 난사하는 걸 보면서 '역시 호주 교육이 본인의 의사 표현은 제대로 가르치는구먼!' 하며 위안으로 삼는다.

친구와 함께 주말 한글학교에도 보내 봤다.

"Mummy, This is the most boring class I've ever been to(엄마, 이건 제가 들어 본 수업 중에 가장 지루한 수업이에요)."

수영장을 제외하곤 다른 수업을 전혀 받아본 적이 없는 아들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지만, 나름 이유는 있었다.

우리 부부는 영어 알파벳도, 'Hi' 같은 인사 표현도 가르치지 않고 아이를 현지 유치원에 보냈다. 한 달쯤 지나자 눈을 깜빡이는 증세가 나타났고, 하원 시간에 가보면 아이는 나와 등원할 때 헤어졌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이는 영어로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 같다. 항상 타인이 말한 영어 표현을 두 번씩 되뇌곤 했다.

소가 되새김질하듯 약 1년간 영어 표현을 쉬지 않고 반복한, 그런 절박함을 겪은 아이에게 차마 다시 한국어를 하라고 다그칠 만큼 독한 엄마가 되진 못했다. 아이는 한국어를 배우면 다시 영어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있다.

처음 이민 왔을 때를 생각하면 낯이 화끈거린다.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엄마들이 꽤나 나태해 보였었다. 이제 내가 그 나태한 엄마가 되어 보니, 가르치지 않아야 할 이유들만 머릿속에 쏙쏙 올라온다.

'여름 방학(12월 중순 경부터 1월)에 한국에 가서 친구들과 놀게 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배우지 않을까?'

오늘도 한국말이 그리운 엄마는 혼자서 온갖 궁리를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호주 , #멜번, #멜버른, #호주이민, #호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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