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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018분의 이어말하기’ 행사에 성차별과 성폭력을 끝내자며 미투를 지지하는 글들이 벽면에 붙어있다.
▲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글들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2018분의 이어말하기’ 행사에 성차별과 성폭력을 끝내자며 미투를 지지하는 글들이 벽면에 붙어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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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2일~23일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진행된 '2018분 동안의 이어말하기' 대회에서 한 발언 내용을 일부 다듬어 옮긴 것입니다. -기자말

미투 운동에 대한 제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처음에 저는 놀라웠습니다. 세상을 향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담대하게 꺼냈던 피해자분들의 용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분들이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세상 어떤 범죄와 다르게 성폭력은 피해자의 오점처럼 혹은 이유가 있어서 겪은 일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환경에서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하기 위해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결단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이 단어가 전혀 과하지 않으며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저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성가족부의 '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를 인용하겠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신고율은 1.9%에 불과합니다. 100건이 발생했다면 접수된 것은 두 건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8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신고 된 사건에서조차 피해자가 경찰 조사 과정과 재판 과정에서의 또 다른 가해를 견디지 못해 정당한 법적 판결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무고죄 때문에 하루아침에 범죄자처럼 취급받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일상적으로 매우 만연하지만 심각할 정도로 은폐된 폭력이었습니다. 미투 운동은 이 암담한 상황을 뚫고 여성들이 직면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성들이 인식하는 현실이 세상의 티끌만 한 부분뿐이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운동 앞에서 부끄러움과 자성의 목소리를 보인 남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수의 다른 남성들은 어땠습니까? 일상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마주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다고. 이제 어떻게 여자들을 만나서 같이 있기나 하겠냐고. 함께 밥도 먹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고, 일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많은 남성들이 '펜스 룰'을 이야기합니다. 풀어 말하자면 설명하기에 긴 개념이니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아내가 아닌 여성과는 저녁을 먹지 않는다'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만들어낸 규칙입니다. 사실 '저녁도 먹지 않는다'가 더 의도에 가까운 표현인 것 같기는 합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는 주변의 남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여성을 만나건 당신이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여성이 주변이 있는 게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문제는 당신입니다.

울타리가 필요하십니까? 이 사회에 필요한 유일한 울타리는 여성들을 당신 주변에서 치우는 울타리가 아니라 당신이 다른 여성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울타리뿐입니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이 이야기도 덧붙이겠습니다. 남편인 당신은 아내 옆이 '안전하다'고 느낄지 몰라도, 인류 역사상 모든 아내들이 모든 남편 옆에서 안전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구글에서 '가정 폭력'이 단어만 하나만 검색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좀 말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성들이 다른 의미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남성들은 무서워해야 합니다. 눈치를 봐야 합니다. 이제껏 자신이 했던 말이 여성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지금 하는 나의 행동이 여성을 향한 폭력이 되지는 않을지,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계속 신경 쓰고 점검해야 합니다.

남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혹은 나이가 많거나 혹은 성별이 같은 사람을 대할 때 당신들은 이런 조심성과 주의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습니까? 소위 남자들의 '형님 문화'에는 다른 남성들에 대한 이런 눈치 보기가 관례처럼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여성을 대할 때에만 이 모든 태도를 버립니까? 심지어 그 결과 다른 이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기면서까지요. 당신보다 낮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평등하지 않은 성별이기에 그렇습니까? 왜 눈치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당연히 무서워해야 합니다.

저는 미투 운동 앞에서 불평하는 남자들이 지겹습니다. 당신들은 수치고 오점입니다. 남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지 자기 연민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도 아무런 문제 제기를 받지 않던 시절이 이제는 끝날까 억울하십니까? 당신이 예전에 했던 일이 가해 행위로 드러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무섭습니까?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궁금합니다, 남성들의 두려움과 불편한 감정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유일하게 중요하며 존중받아야 할 두려움과 무서움은 피해자들의 것입니다. 오랜 시간 성폭력 피해가 은폐되고 증언이 존중받지 못했으며 갖은 낙인과 편견에 시달렸기에 느낀 두려움들.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자신의 경험을 공론화하거나 가해자를 고발하지 못하고 지지는커녕 공격을 받을까 움츠러들어서 느낀 그 무서움들 말입니다. 저는 남성들의 위선적인 자기 연민이 이제는 신물이 납니다. 피해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세요. 이 운동 앞에서 당신들이 해야 하는 일은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평범한 남성들의 평범한 '범죄'

영화 <귀향>(2006)
 영화 <귀향>(2006)
ⓒ ㈜스폰지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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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페넬로페 크루즈 주연의 2006년도 영화 <귀향>은 3대에 걸친 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해 아이를 가지게 되고, 그렇게 태어난 딸은 또 다시 의붓아버지의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 그를 살해하고 맙니다. 10대 시절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주인공의 운명이 기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것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성폭력 문제의 현실을 알고 난 후였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성범죄가 낯선 사람이 저지르는 개인의 일탈적인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한 번 앞선 통계를 인용하겠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가해자의 70%는 피해자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피해자의 학교 혹은 직장의 동기와 선배였습니다. 또한 친척이나 가족이기도 했습니다. 가상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는 제 생각은 착각이었습니다. 저는 현실을 보고 있었습니다. 사례를 찾자면 끝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벌어졌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여성주의를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아무런 변화를 겪지 못한 채 지금의 미투 운동을 맞았다면 저 역시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저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저런 멀쩡한 사람이 가해자라고? 뭔가 다른 내막이 있는 게 아니야?', '피해자가 뭔가 의도를 가지고 '공작' 같은 걸 하려고 폭로한 거 아닌가?'

왜냐하면 저는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성들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현실에 처했는지, 성폭력이 얼마나 '평범한 남성'들에 의해서 빈번하게 저질러져 왔는지 몰라도 괜찮은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하는 행동이 성적 폭력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무감각한 남성이 무사할 수 있는 나라에서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성교육을 한답시고 편견과 혐오만 조장할 뿐 정작 알아야 할 사실과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알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부끄럽게도 많은 남성들이 그런 사회에 딱 걸맞은 수준의 인간으로 성장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와 같은 남성들이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절대 의미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운동이 늘 제가 이야기한 문제점을 지적해왔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을 향해 당신들이 비록 이런 사회에서 자라왔지만 이제는 페미니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더 배우라고, 모르려고 하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변화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관심이 없거나 페미니즘을 비하하거나 낙인을 씌우고 무시했습니다. 그 결과 더 나은 인간이 되길 포기해왔습니다. 남성들은 체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모자입니다. 모를 때, 변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래서 이 사회가 그대로일 때 오직 남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배당되는 기득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의 많은 영역이 여성들에게 견디기 힘든 곳이 될 때 그만큼 남자들이 앉을 자리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투 운동은 또다시 남성들이 회피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성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현실을 부인하고 공론화를 가십처럼 소비하며 피해자들을 비난하시겠습니까?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조용했고 그래서 당신들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성폭력과 성차별, 여성 혐오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적폐의 잔재로 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피해의 경험에 공감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자리에 서겠습니까. 가해자로 밝혀진 이들과 같은 괴물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시겠습니까. 결국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더 나은 인간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미투 운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안 제자리에 남아 결국은 퇴보하시겠습니까?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딸들은 클리셰처럼 이 대사를 반복합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에 엄마들이 딸들이 닮고 싶어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요. 그래서 이 말은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는 아들들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는 아빠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나는 남자 선배, 남자 동료, 한때 존경했던 남자 선생님들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요.

그들이 만들어내고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그래서 여성을 향한 폭력으로 귀결된 성폭력 문화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이들이 부당한 기득권을 손에 쥐는 걸 가능하게 만든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요. 지금 남성들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부인하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성찰하고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미투 운동이 증언하는 폭력을 종식시켜야 합니다. 그런 폭력이 가능했던 환경을 끝장내야 합니다. 우리 시대,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합니다.

퇴보를 끝내고, 뒤늦은 성장을 할 때입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337개 단체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해 성차별, 성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카드섹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Me Too 이 싸움의 끝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과 닮아 있을 것’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337개 단체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해 성차별, 성폭력 근절을 촉구하는 카드섹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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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만 19세가 넘은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틀렸습니다. 성숙한 인간, 사회 생활에 적합한 인간인지 여부는 연령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로 결정됩니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내가 한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폭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주의하고 조심하는 게 바로 그런 태도 중 하나입니다.

또한 자신과 나이, 사는 지역 그리고 특히 성별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그리고 일상의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이 가치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정확히 대다수의 한국 남성들이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자기 입으로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아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샤롯데 베렌트 코린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해방되어야 할 여자란 없다. 바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남자들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남성 여러분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멈추세요. 그리고 들으세요. 지금 미투 운동의 하는 말들을, 그 이전부터 여성들이 소리 높여 알리고자 한 현실을.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나아가 스스로를 변화시키세요. 다른 남성들에게 달라지라고 요구하세요. 이것이 지금 남자들이 시급하게 해야 할 일들입니다. 당신들의 다음은 그 이후에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한 마디로 발언을 마치겠습니다.

한국 남성 여러분 이제 뒤늦은 성장을 할 시간입니다.


태그:#METOO, #WITHYOU,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2018분동안의_이어말하기,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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