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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신라의 수도로서 기능을 했던 경주는 도시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에 따라 도시 곳곳에 남겨진 옛 신라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한때 수학여행지의 필수 코스였던 불국사와 석굴암, 첨성대 등은 지금도 반갑게 사람들을 맞아주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의 흔적을 잘 살펴볼 수 있는 현장이 신라왕릉이다. 처음 감포 앞바다에 자리한 문무대왕릉을 방문했을 때 그때 느낀 감동은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이와 함께 경주 시내를 갔을 때 규모에서 압도적인 대릉원을 비롯해 덩치가 큰 고분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이러한 고분들은 옛 신라의 흔적을 이야기해주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데,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이 된 신라는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기까지 무려 992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천년 세월은 세계사를 통틀어도 많지 않은 예로, 56명의 왕들에 의해 번영과 위기를 겪어왔을 터였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왕릉이 가지는 의미와 역사의 이야기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주 나정
▲ 경주 나정 박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진 경주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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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과 난생설화, 원주민과 이주민이 결합된 신라의 건국

신라의 건국과 관련한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을 '난생설화'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볼 만하다. 설화가 다수 기록된 삼국유사는 그렇다 치고, 정사의 성격인 삼국사기에도 이러한 난생설화가 정식으로 기록된 점은 이색적이다. 위의 두 기록에서 박혁거세는 '나정(蘿井)' 숲에서 탄생한 것으로 그려지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는 다음과 같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다.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알이 있었는데, 이를 쪼개니 안에서 어린아이가 나와 거두어 길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중

위의 탄생설화를 통해 당시 토착세력으로 상징되는 육부촌장과 난생설화를 통해 이주민의 성격을 지닌 박혁거세가 결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 난생설화의 경우 건국 시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설명할 수 있다.

가령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경우 설화를 통해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고, 아버지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로 설명하고 있어, 하늘의 선택과 권위를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상징하듯 우리 역사에서 건국 시조의 난생설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도 참고할 만하다.
 
선도산에 세워진 성모사, 박혁거세의 어머니 성모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진다.
▲ 성모사 선도산에 세워진 성모사, 박혁거세의 어머니 성모와 관련한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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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이주민이라는 추정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성모설화'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기록에는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선도산의 지선인 성모(신모 혹은 사소부인)인데, 삼국유사는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송의 사신으로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김부식은 우신관(佑神館)에 있던 여인의 상을 보게 된다. 이때 함께 있던 송나라의 관빈학사 왕보가 여인의 상을 바라보며, 중국 황제의 딸이자 진한으로 건너가 해동의 시조를 낳았다고 했다. 또한 이 여인이 땅의 지선이 되어 선도산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기록의 요지다. 여기에 등장하는 해동의 시조는 박혁거세를 말하며, 선도산의 지선은 성모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다분히 설화적 요소일 뿐 실제일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박혁거세의 설화와 성모설화를 통해 이주민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건국은 토착세력인 육부촌장의 세력과 이주민 세력으로 대표되는 박혁거세 집단의 결합을 통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능으로 전해진 경주 오릉에 남겨진 이야기

이 같은 탄생을 기이하게 여긴 육부촌장은 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웠다. 박혁거세 당시의 궁성에 대해 삼국유사는 남산의 서쪽 기슭에 있다고 했는데, '창림사(昌林寺)'라고 말하고 있다.

경주 나정에서 멀지 않은 창림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궁성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또 하나 관심 있게 지켜볼 내용은 박혁거세의 재위 기간에 있었다는 마한왕과의 갈등이다. 당시 호공을 마한왕에게 보내 예방하게 했지만,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핍박을 당했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록을 보면 한은 세 종족이 있어 마한과 진한, 변진이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 마한이 가장 크고 그 종족이 함께 진왕을 세워 목지국에 도읍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기록에 등장하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마한왕은 후한서 동이열전의 진왕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박혁거세의 사로국과 마한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박혁거세의 능으로 전해지는 경주 오릉
▲ 경주 오릉 박혁거세의 능으로 전해지는 경주 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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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는 4년(재위 6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의 상황에 대해 삼국유사는 왕의 유체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흩어졌다고 했다. 이에 국인들이 유체를 수습해 장사를 지내려고 했지만, 큰 뱀이 쫓아다니며 방해를 해서 결국 따로 장사를 지냈다고 했다. 그 결과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 했다.

조선 초기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경주에 '혁거세의 능'과 '각간묘(김유신묘)'가 있다고 했다. 기록에 혁거세의 능이 운암사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운암사'가 '담암사'라고 했다. 삼국사기는 담암사 북쪽에 혁거세의 능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경주 오릉은 혁거세의 능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사당인 숭덕전, 지금도 제향이 이루어지고 있다.
▲ 숭덕전 박혁거세의 사당인 숭덕전, 지금도 제향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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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주 오릉의 안내문에는 박혁거세의 능 이외에 왕비인 '알영부인'과 '남해왕', '유리왕'과 '파사왕'의 능이 함께 조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박혁거세의 능으로 알려진 '사릉'을 각 왕들의 장지 기록인 '사릉원(蛇陵園)'과 동일한 곳으로 봤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의 설명대로라면 박혁거세의 유체가 분리되어 현 경주 오릉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자면 현 경주 오릉은 초기 왕가의 능역이 되는 셈이니 완전히 배치되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경주 오릉을 '적석목곽분'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러한 주장이 맞을 경우 당시의 묘제 양식인 '목관묘'와는 연대 차이가 있어서 시대가 맞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논란은 향후 경주 오릉의 발굴조사를 통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해볼 만하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 내용을 일부 참고하였습니다.



태그:#이야기가있는역사여행, #신라왕릉, #김희태, #박혁거세, #경주 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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