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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수록된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품집
▲ 브레히트 작품집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 수록된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품집
ⓒ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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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새해 첫 날을 하와이에서 맞이했습니다. 미세먼지라고는 없는 맑고 파란 하늘,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걸으며 자연의 주는 선물을 듬뿍 받고 왔습니다. 이 맑고 푸른 기운으로 올 한해도 여러분과 함께 문학의 숲을 거닐고 싶습니다. 새해 잘 맞이하셨는지요?

새해 첫 책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를 읽었습니다. '억척어멈'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지요? 원제를 보면 '용감한 어머니와 그 자식들' 정도가 되겠네요.

전쟁에서 자식들을 모두 잃은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새해를 여는 책으로는 무겁게 느껴지나요? 게다가 희곡을 읽다 보면, 대사도 딱딱하기 이를 데 없고, 하다 못해 비운의 어머니를 통한 카타르시스의 눈물 바다도 없답니다.

1월 9일은 2015년 12월 이후 2년 1개월여 만에 재개되는 남북 당국회담날이었습니다. 그동안 북의 핵 도발과 미국의 강경 발언으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주변국들까지 얼마나 가슴 조마조마하며 지냈는지요.

작년에 미국인 친구로부터 '두 미친 지도자들의 협박 때문에 한국 상황이 어떠냐'는 우려 섞인 메시지도 받았습니다("How things are going in Seoul with the fights and threats of two crazy leaders?"). 남북 고위급 회담을 하루 앞둔 8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세계를 향해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 대화를 위한 지지와 노력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직 살아있지만, 젊은 세대의 경우 전쟁의 참상에 대해 현실적으로 느끼거나 아는 경우가 적은 것 같습니다. 40대의 나이인 저 역시 잘 모르긴 하지만, 저는 국제구호단체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 전세계 분쟁과 전쟁 소식을 많이 접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전쟁은 우리 삶을 철저히 파괴한다는 것을. 누구의 예외도 없이 말입니다.

하와이에서 맞는 새해 첫날 일출
▲ 하와이에서의 새해 첫 일출 하와이에서 맞는 새해 첫날 일출
ⓒ 조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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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억척어멈'이라고 불리는 안나 피어링이라는 주보의 여주인은 1624년부터 36년까지 12년간 유럽 각지의 전쟁터를 유랑하면서 장사를 합니다. 그 기간에 배 다른 세 자식을 전부 잃게 되지요. 용감한 맏아들 아릴립, 정직한 둘째아들 슈바이처카스, 동정심 많은 외동딸 카트린이 모두 죽습니다.

억척어멈의 전쟁터 장사도 점점 기울어갑니다. 그녀는 때로 신교 측인 스웨덴 군을 따르기도 하고, 전세가 뒤바뀌면 구교도측인 황제군을 따르기도 하면서 철저히 전쟁을 이용하여 벌어먹고 삽니다.

하지만 자식을 모두 잃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끝내 전쟁의 모순을 깨닫지 못하지요. 마지막에 혼자 허름한 마차와 남겨진 억척어멈은 호기롭게 외치죠. "잘 될 거야"라고. 연극 공연에서 마지막에 억척어멈이 씩씩하게 마차를 끌고 가는 장면이 요새 말로 '웃픈'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로도 잘 알려진 시인이자 극작가 브레히트(1898-1956).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했지만 문학과 연극에 관심이 컸습니다. 그가 창시한 서사극은 기존의 드라마적 연극이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를 통하여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재생산하는 것에 반발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서사극은 철저히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다양한 입장에서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게 합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은 우리나라에서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2012년에 이자람이 판소리로 <억척가>를 각색하여 공연했는데, 전쟁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제를 가지고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2017년 말에는 이윤택 연출로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2017년 공연되었던 이윤택 연출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 이윤택 연출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2017년 공연되었던 이윤택 연출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 연희패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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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원작은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입장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했다면, 이윤택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각색하여 무대를 올려, 비극적 상황에 처한 어머니의 모습을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큰 차이는 브레히트가 표방하는 감정이입을 배제하는 서사극이 이윤택의 연출에서는 감정이입을 통하여 울고 웃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의 죽음을 유발한 것은 빨치산으로 알게 모르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꼴이 됩니다.

반전 사상은 브레히트 작품의 주요 테마입니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배경이 된 30년 전쟁에서는 어마어마한 인명이 학살당했더군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인구가 1600만명에서 600만명으로 감소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브레히트는 극작가뿐 아니라 시인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연작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들어보신 분들이 있겠지요. 그 중에서 <'나', 살아남은 자>를 들려드리며 편지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시에 나온 것처럼, 이것저것 진실에 눈을 감고 비루하게 살아남는 '강한 자'는 되지 말자는 다짐도 해봅니다. 새해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이어가시길 응원합니다.

나는 물론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
그 많은 친구들을 잃고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난 밤 꿈에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 '나', 살아남은 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30년 전쟁의 한 연대기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연희 옮김, 종합출판범우(2010)


태그:#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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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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