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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작가를 읽는 모임'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는 이소가이 지로 선생.
 "'재일조선인작가를 읽는 모임'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는 이소가이 지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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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조선인? 하하. 그렇게 불린다면 그것만큼 내게 영광스러운 건 없지. 오히려 완전한 조선 사람이 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지(재일조선인·조선인은 재일동포를 뜻한다 - 편집자 주)."

이소가이 지로(磯貝治良). 80세. 작가이자 자이니치문학평론가. 삶의 절반을 자이니치(재일조선인)문학 연구에 바쳐 왔다.

그가 이끄는 '자이니치 작가를 읽는 모임(이하 모임)'이 지난 11월 26일 나고야 YWCA에서 4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1977년 12월 15일 첫 모임을 시작으로 매월 한 차례의 정례모임을 가져 453회라는 역사를 쓰게 됐다.

초반에는 소설, 시가 중심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이니치를 주제로 삼거나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글이라면 무엇이든 텍스트로 삼아왔다. 자이니치문학의 거봉인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의 작품을 비롯해 40년간 331권을 함께 읽었다. 참석자만도 연인 원 5000명에 이른다.

이날 행사는 이소가이 지로 선생의 지난 40년을 돌아보는 이야기 마당으로 펼쳐졌다. 나고야를 중심으로 자이니치와 일본인이 함께 활동하는 사물놀이 그룹 '놀이판'의 축하공연과 참석자와의 대화도 진행됐다. 그동안 모임에 참석했거나, 오랫동안 이소가이 선생과 인연을 맺어 온 지인들이 일본과 한국 각지에서 와서 그의 노고를 기리고 축하했다.

"문학을 통해서 자이니치의 삶과 사상을 접하고 일본과 조선, 한국의 관계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스스로 차별의식이나 제도로서의 차별을 극복한다는 관점을 갖고 민중연대의 기저를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 모임 제안문 중

제안문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모임은 당연히 문학작품을 매개로 하지만 무엇보다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자이니치. 그들이 일본이라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차별받으면서 생긴 자의식과 집단의식, 그리고 그 가운데서 태어난 자이니치문학. 그것은 책과의 만남일 뿐만이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하고 혹은 모른 척 해왔던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모임은 처음에 일본인 7명으로 출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이니치들도 하나둘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인과 자이니치들의 만남 장소가 되기도 했다. 모임은 이름 그대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자이니치의 삶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며느릿감을 찾기 위해 온 아버지

'재일조선인작가를 읽는 모임'의 문학지 '가교'
 '재일조선인작가를 읽는 모임'의 문학지 '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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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가이 지로 선생의 작품 중 일부
 이소가이 지로 선생의 작품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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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본인은 자이니치를 이해하기 위해, 자이니치는 자신들이 살아온 삶을 들어줄 사람들을 찾아서 모임에 모여들었다. 어느 참석자는 올 때마다 자신의 신세타령을 시작해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진행자가 중단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가 이야기를 하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머릿속에 남아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초로의 자이니치 1세 남자분이 모임에 왔는데, 한 마디도 않고 있다가 모임이 끝나자마자 여성 참석자들에게 "자네는 조선 사람인가 일본 사람인가?"라고 묻기 시작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신문에 실린 모임 광고에 '조선인'이라는 말이 들어간 걸 보고 30대 아들의 며느릿감을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하나하나가 그들의 처한 현실을 말해 주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다시 새로운 문학을 잉태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소가이 선생은 말한다.

"굳이 책 읽지 않아도 됩니다. 일단 누구라도 시간이 되면 오세요. 거기서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모임이 있기에 작품활동을 할 수 있다"

이소가이 선생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이소가이 선생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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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만 한반도에 자신의 뿌리를 둔 사람들의 문학인 '자이니치문학'. 그 작품들을 읽는 것은 과거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이며,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아 온 자이니치 사회를 이해하고 끌어안기 위한 노력의 과정일 것이다. 그 작품들 안에 자이니치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시련과 고난의 삶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소가이 지로에게 자이니치문학을 읽고 연구한다는 것은 단지 폐쇄된 연구실에서의 지적놀음이 아니라 언제나 자이니치 당사자들과 살을 부대끼고 그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함께 싸워나가는 것이다. 그는 문학가로서의 자리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이니치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운동, 일본사회의 군국주의 회귀를 반대하는 운동 등 나고야 지역의 시민운동에서 언제나 맨 앞 자리를 꿋꿋이 지켜오고 있다.

자이니치문학평론가 이소가이 지로 선생
 자이니치문학평론가 이소가이 지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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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이라는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임에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해왔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참석자가 많이 줄었다. 자이니치문학 부문에서도 새로운 작가들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현실이다. 하지만 독자가 있으면 작가는 글을 쓰게 마련. 어느 자이니치 작가가 "아무리 독자가 없어도 모임만은 분명히 읽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혹여 이소가이 자신이 이 자리를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더라도 모임이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이유다. 작가, 문학평론가이자 시민운동가인 이소가이 지로. 그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 일본 사회에서 이들이 일반적으로 불리는 명칭을 감안해 '자이니치'로 표기했다.


태그:#자이니치문학, #이소가이 지로, #나고야 , #가교 , #놀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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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고야의 장애인 인형극단 '종이풍선(紙風船)'에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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