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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들어오고 있다.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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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고만고만한 아이들 40여 명을 태우고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버스 안은 고요했다. 아이들 입은 자물쇠를 채운 듯 굳게 닫혀 있었고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버스에 조리돌림을 당하면서도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수원→송산→남양→비봉→사강을 거쳐 마산포에 도착해 아이들을 부둣가에 내려놓고는 떠났다. 서울 아동보호소에서부터 아이들을 인솔한 새까만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감시하듯 사방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는 선감학원 선생이었다.

그때 갑자기 15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 하나가 죽을힘을 다해 어디론가 뛰었다. 선글라스 사내는 몇 발 짝 쫓다가 포기한 듯 이내 멈췄다. 선감학원 피해자 김성환씨(62세)는 기억을 더듬듯 시선을 먼 곳에 고정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 사람은 (선감학원에) 가면 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던 거예요. 15살 정도 되니, 도망칠 만한 힘도 있었고요. 선생은 자리를 비우면 우리가 도망칠까 봐 그 사람을 쫓지 못한 것이고요. 저는 너무 어려서 도망칠 수가 없었어요. 뛰어봤자 벼룩이니까요. 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선감도에 들어왔는데, 진짜 지옥에 왔구나,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소년들은 배에서 내려 소 끌려가듯 2㎞ 정도를 걸어 선감학원에 도착했다.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신고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이유 없이 맞는 것은 참 억울한 일이에요. 쭉 줄지어 세운 다음 따귀 후려갈기고, 정강이 걷어차고, 엎드려뻗쳐 시킨 다음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려치고. 정말 보리타작 하듯이 2시간 정도를 두들겨 패는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매 맞은 게 억울해 죽으려고 똥통에 뛰어든 친구도 있어

소년 강제수용소 선감학원 피해자 김성환씨(62세)
 소년 강제수용소 선감학원 피해자 김성환씨(62세)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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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성환은 그 다음 날부터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농사일이다.

"이게 제일 싫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주말농장 같은 거 절대 안 해요. 일이라는 게 재미있게 배워야 하는데, 그곳은 그런 게 없어요. 강제로 시킨 다음 책임량을 채우지 못하면 두들겨 패는 거예요. 풀 몇 ㎏ 베어오라고 한 다음 그거 못 채우면 때리는 거지요.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칭찬은커녕 맞기만 하니 더 하기 싫은 것이고요."

소년들이 한 일은 뽕나무 잎 따오기, 소 꼴 베기, 밭에 난 잡초 제거하기 등 무척 많았다. 배로 실어온 연탄을 비롯한 갖가지 생활용품을 나르는 일도 소년들 몫이었다.

소년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강제 노동을 피하려 했다. 조회를 하자마자 산으로 도망쳐 온종일 숨어 지낸 소년도 있었고, 일부러 살모사에게 손을 물린 소년도 있었다.

산에 숨어 있다가 걸리면 지독한 매질이 뒤따랐지만, 소년들은 그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강제 노동을 피할 수 있었고, 뱀이나 쥐 메뚜기를 잡아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어서다. 살모사에게 손가락을 물리면 손가락 끝이 떨어져 나가고 팔이 며칠간 퉁퉁 부었지만, 소년들은 그 고통도 감수했다. 독기가 빠질 때까지 강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소년 김성환은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도 했다. 풀을 가득 실은 우마차 바퀴에 발을 집어넣은 것이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은 컸지만, 그래도 한 달 넘게 강제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일하기 싫어 조회가 끝나자마자 친구와 함께 도망친 적도 있다. 숙소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머리가 유별나게 커 '버스 대가리'라는 별명이 있는 반장한테 붙잡혀 죽도록 맞기도 했다.

"1시간 넘게 맞으면서 얼차려를 받았어요. 다 맞고 났는데 친구 녀석이 어딘가 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다 보니까. 그 녀석이 재래식 화장실 똥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예요. 맞은 게 너무 억울해서 분을 못 이겨 죽으려고 뛰어든 거죠."

선감학원 급훈 '생식을 하지 맙시다' 이유는?

선감학원 소년들은 이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 몇차례씩 약수터에서 물을 길었다.(선감역사 박물관)
 선감학원 소년들은 이 물지게를 지고 하루에 몇차례씩 약수터에서 물을 길었다.(선감역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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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도 강제노동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꽁보리밥에 반찬은 김치 한 조각과 새우젓이나 밴댕이젓뿐이었다. 그나마 배부르게 먹을 수도 없었다. 젓갈은 상해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환씨는 젓갈을 먹지 않는다.

늘 배가 고프다 보니 소년들은 산에 있는 풀까지 뜯어 먹었다. 그중에는 얼굴을 퉁퉁 붓게 하고 배앓이를 하게 하는 독풀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들의 허기진 배는 이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게 했다. 앓아눕는 소년이 많아지자 교사들은 '생식을 하지 맙시다'를 급훈으로 정하고 단속을 하려 했다. 그러나 소년들의 생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환씨는 수수 알을 털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맞은 일을 배고픔과 관련한 가장 서러운 일로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이 원장 관사 별실로 데려가더니 주머니를 털라고 하는 거예요. 수수 나오니까 그때부터 슬리퍼로 따귀를 때리기 시작하는데 줄잡아 50대 이상은 맞은 것 같아요. 배고파서 그런 건데, 정말 서러웠죠. 너무 억울해서 그날 저녁 식사 점검에 안 나가고 어딘가에 숨어 있었어요. 제가 도망친 줄 알고 찾으러 다니고 난리가 났었죠. 반장이나 사장(막사의 장)한테 맞을 걸 각오하고 숨어 있던 거죠. 나중에 잡혀서 끌려갔는데, 이미 선생한테 엄청나게 맞은 것을 알고는 더 때리지는 않았어요."

종교를 강요당하는 것도 자존심 강한 성환씨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교회를 가지 않으면 몽둥이가 날아왔다. 교회 앞에서 철저하게 인원 파악을 했기에 몰래 빠질 수도 없었다. 그러니 설교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언젠가는 교회에 가기 싫어 일요일 오전에 숙소에 남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사정없이 귀싸대기를 갈겼다. 성환씨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서 "성경에 교회 안 가면 때리라고 쓰여 있느냐!"고 발악하듯 대들었다. 돌아온 것은 주먹과 몽둥이뿐이었다.

"그게 트라우마가 됐는지, 다 커서 교회에 다니려고 서너 번 노력했는데도, 잘 되지를 안 했어요. 지금도 물론 종교가 없고요."

사고가 나면 선감학원 아이들을 의심

선감학원 소년들이 입던 옷(선감 역사박물관)
 선감학원 소년들이 입던 옷(선감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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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김성환은 공부를 잘했다. 선감학원에 가기 전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 만 게 배움의 전부지만, 그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한글을 스스로 깨쳤다. 선감학원에 가자마자 편입한 선감초등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해 6학년 때 우등상과 개근상을 타고 졸업했다. 덕분에 선감학원생 중에서는 무척 드물게 대부 중학교에 입학하는 특전을 누렸다.

그러나 학교생활이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늘 차별에 시달렸다.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마을에서 무엇인가 없어지면 무조건 우리를 의심했어요. 마을 애들은 교실로 들어가고 저희는 운동장에 엎드려뻗쳐서 매를 맞는 거예요. 분명 너희들이 그랬으니, 맞기 싫으면 이실직고하라는 거죠. 중학교도 마찬가지였어요. 체육 선생님이, 여학생들도 보고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엎드려뻗쳐 시켜 놓고는 매질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들었죠. 그랬더니 '너 교실에서 휘파람 붙었지?' 그러는 거예요. 어떤 녀석인가 여학생들에게 휘파람을 불었는데, 그게 누군지 모르니까 무조건 저를 의심한 거죠. 그래서 '난 휘파람 불 줄 모른다'고 그랬는데도 막무가내로 때리는 거예요. 전 진짜 휘파람을 불 줄 몰라요, 지금도."

이런 차별을 겪으며, 그 차별에 저항하다 보니 학교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다. 소년 김성환은 73년 8월 10일 교복을 입은 채 충동적으로 배에 올라 인천 연안부두로 도망을 친다. 선감학원에 갇힌 지 5년 10일 만의 탈출이었다. 그 이전인 초등학교 4학년 때도 한 차례 탈출을 감행한 적이 있다. 그때는 실패해서 죽도록 매만 맞았다.

그 뒤 소년 김성환은 걸인 생활과 단속에 걸려 부랑아 보호소인 인천 선인원을 오가는 생활을 2년간 한다. 탈출 당시 실제 나이는 18살이었지만, 키가 워낙 작아 채 15살도 안 돼 보이는 외모여서 단속반의 단속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열아홉 살쯤, 탈출한 지 1년 만에 단속반에 붙잡혀 다시 선감학원에 들어갔다. 나이가 많아 반장이 됐지만, 전혀 편하지 않았다. 선생은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기강을 잡으라고 닦달을 했지만, 그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선생한테 늘 시달림을 받았다.

그는 다시 탈출을 감행해 성공했지만, 1년 만인 75년에 또 다시 단속에 걸려 선감학원에 발을 들였다. 그때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선감학원에서 그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의 나이 스무 살 때 선감학원과의 악연을 끝내게 된다.

⇒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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