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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신임 당대표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자유한국당 당대표로 선출된 홍준표 홍준표 자유한국당 신임 당대표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취재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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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득표율 24.0%의 호성적을 거둔 홍준표 전 후보가 무대로 복귀했다. 지난 3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특유의 '아무말 정치'를 자랑하는 그가 취임과 함께 외치기 시작한 것은 '보수 재건'이다. 무너진 보수도 일으켜 세우고 집나간 바른정당도 흡수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제1보수정당 후보가 24.0%를 득표했다면 완벽한 대참패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참패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런 대로 선전했다고들 말한다. 이런 말은 홍준표 대표한테는 칭찬이지만, 제1보수정당한테는 모욕이다. 보수세력이 참혹하게 무너졌기에, 참패가 아닌 선전으로 봐주는 것뿐이다. 이런 상황이니 보수 재건을 기치로 내걸 만도 하다.

그런데 홍준표 대표는 전두환·노태우 구속과 박근혜 구속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전·노는 무수한 인명도 살상하고 쿠데타도 두 번(12·12, 5·17)이나 일으키고 부정축재도 대담하게 저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구속은 시민혁명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반면에 박근혜는 죄악이 전·노를 능가하느냐에 상관없이 시민혁명의 결과로 구속됐다.

그로 인한 차이는 엄청나다. 전·노 구속은 보수 몰락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시민혁명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박근혜 구속은 보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시민혁명 수준의 정치변동 뒤에는 기존의 보수가 해체되고 새로운 진보·보수 구도가 생성된다. 새로운 보수의 자리는 기존의 진보나 중도파 중 일부에 의해서 채워지는 일이 허다하다. 1567년까지 개혁적 야당 혹은 재야였던 조선 사림파(유림파)는 수구세력인 훈구파를 몰아낸 뒤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갈라졌다. 이들 분파들 속에서 새로운 보수가 나오고 새로운 진보가 나왔다.

18세기 후반부터 '주'의 이익을 대변하던 미국 민주공화당에 맞서 연방의 이익을 대변하던 연방당은 1820년을 전후해서 몰락했다. 그러자 민주공화당에서 분리된 휘그당이 옛 연방당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어느 한쪽이 몰락할 정도의 정치변동이 생기면, 생존한 다른 쪽이 세포분열을 하는 패턴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나타났다. 기존의 여당 혹은 보수정당이 수행하던 역할을 생존자 그룹의 분파가 수행하는 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패턴이다.

홍준표 대표는 이런 패턴을 무시하고 기존 보수의 재건을 꿈꾸고 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의 자유당도 그런 안이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승만의 사람인 허정이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걸 천행으로 생각하며, 그들 역시 1960년대판 '보수 재건'을 꿈꾸었다.

4.19 이후 자유당은 어떻게 됐나

4월혁명 발생 장소 기념비.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북쪽의 동성고등학교(오른쪽) 정문 옆.
 4월혁명 발생 장소 기념비.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북쪽의 동성고등학교(오른쪽) 정문 옆.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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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대로라면 4·19 혁명 직후, 새로운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곧바로 출현했어야 한다. 자유당은 이 점을 두려워했다. 혁명 직후에 선거를 치르면 자유당이 참패할 게 뻔했다. 그래서 자유당은 보수 재건의 시간을 벌고자 '선 개헌, 후 선거' 논리를 유포했다. '선거는 뒤로 미루고 조속한 개헌으로 이승만 체제를 하루빨리 청산해야 한다'는 그럴 듯한 논리로 정국을 개헌 모드로 바꾸고자 했다.

1960년 5월 7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허정 권한대행도 월터 매카나기 미국대사를 찾아가 '선 개헌'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무너져가는 보수를 살리겠다는 자유당의 집념은 그렇게 대단했다.

자유당의 노력은 처음엔 성과를 거두었다. '선 개헌'이 관철된 것이다. 자유당은 1960년 6월 15일 개헌을 성사시키고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4월혁명으로 물러났어야 할 자유당이 제2공화국의 산파역까지 됐던 것이다. 40년 뒤에 남북 정상이 공동선언을 만들어낼 그날, 자유당은 제2공화국 창출을 통해 보수 재건을 시도했다.

그날의 개헌은 의원내각제 개헌이었다. 이 개헌은 이승만 독재를 견제할 목적으로 내각제를 외쳐온 민주당의 주장을 반영하는 동시에, 4월혁명으로 이승만을 잃고 직선제 후보를 배출할 여력이 없었던 자유당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선거에 승산이 없게 된 자유당이 의원내각제로 보수 재건을 꾀하려고 발버둥을 친 결과였다.   

1960년 6월 15일 헌법은 4월혁명의 결과물이었다. 이 혁명은 자유당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으로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 헌법에는 자유당 독재 및 부정선거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 근거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없었다. 없는 게 당연했다. 자유당 의원들이 함께 만든 헌법이기 때문이다. 처벌 근거가 마련된 것은 그 다음번 헌법 개정에서다.

그렇게 제2공화국 수립에까지 간여하며 보수 재건을 추진했건만, 얼마 안 가 자유당은 4월혁명에 이은 2차 타격을 받고 말았다.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에서 233석 중에 2석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보수 재건은커녕 대참패만 기록했던 것이다.

2년 전인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232석 중 과반수인 125석을 획득했다. 이랬던 보수정당이 참혹하게 몰락한 것이다. 그 뒤 자유당은 군소정당으로서 1970년까지 명맥을 유지했지만, 국회 의석을 얻은 것은 제5대 총선 2석이 마지막이었다. 

홍준표의 보수 재건, 실패 확률 높아 보여

4월혁명 당시의 국회의사당인 지금의 서울시의회. 서울시 광화문광장 남쪽이다.
 4월혁명 당시의 국회의사당인 지금의 서울시의회. 서울시 광화문광장 남쪽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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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처럼 시민혁명으로 무너진 정당이 살아남기 위해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다른 세력과의 상생을 통해 기존 정치질서를 조금이라도 지켜내는 것이다. 기존 질서가 형체라도 남아 있어야 자신들의 존립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당은 이 점에서 실패했다. 이것이 제5대 총선 후에 자유당의 몰락을 한층 더 재촉한 요인이다.

4월혁명으로 목소리를 높인 쪽은 학생과 재야 세력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학생들이니까 그렇다 치고, 재야 진보세력(당시 표현은 '혁신계')은 5대 국회에서 힘을 갖지 못했다. 시민혁명의 결과물은 거의 다 민주당 차지가 되었다. 민주당은 233석 중에 171석을 획득했다.

진보세력이 5대 국회를 장악하지 못한 것은 자유당이나 보수파를 안심시킬 만한 요인이었다. 시민혁명 덕분에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출신성분 면에서 자유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미·친일 성향의 자본가·친일관료 출신의 특권층이라는 점에서 오십보백보였다. 그래서 민주당이 주도하는 제2공화국은 자유당한테 그리 낯선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민혁명으로 진보세력이 강해진 상황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의 출신성분상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진보세력이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고 흔들어댔으니, 민주당 정권의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민주당 정권은 금세 허약해졌고 이것은 제2공화국의 존립기반을 약화시켰다. 이것은 제2공화국에 편승해 보수 재건을 꿈꿨던 자유당한테도 치명적이었다. 제2공화국 약화와 함께 자유당의 존립기반도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결국 5·16 쿠데타로 이어지고 말았다. 5·16 쿠데타는 자유당의 보수재건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어놓았다. 민주당 정권의 등장 때는 권력 핵심부의 컬러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권력 핵심부의 출신성분은 자유당 때나 민주당 때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5·16 쿠데타는 그것을 확 바꾸어놓았다. 5·16 쿠데타로 등장한 권력 엘리트 그룹은 친미·친일 성향이라는 점은 이전 특권층과 같았지만, 자본가·친일관료 출신이 아니라 군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전과 달랐다. 이렇게 엘리트층의 출신성분이 크게 바뀌면서 자유당의 보수재건은 더욱 더 희박해졌다. 정권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4월혁명 직후의 자유당이 진보세력과의 상생을 통해 이 세력의 국회 진출을 촉진했다면, 진보가 제도권 밖에서 민주당 정권을 흔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제2공화국이 쿠데타로 와해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유당도 훨씬 더 오랫동안 살아남았을 것이다.

진보세력과의 상생이 부담스럽다면, 다른 쪽으로도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여당과의 상생을 통해 민주당 정권이 더 강해지도록 촉진하고 이 정권이 진보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촉진했다면, 제2공화국이 좀더 강해지고 쿠데타에 대한 면역력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제2공화국과 함께 자유당도 좀더 오래 살아남았을 것이다.

자유당 자체에는 힘이 없었으므로, 이렇게 타자들과의 상생을 통해 자유당은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그런 전략을 갖지 못했다. 상황을 바꿀 힘도 없으면서 자신들 중심의 보수재건을 꿈꾸다 결국 소멸하고 말았다.

홍준표 대표도 자유한국당 중심의 보수재건을 꿈꾸고 있다. 바른정당 흡수도 운운하고 있다. 과거의 자유당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접근법이다. 이제까지의 패턴으로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 쪽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시도다.


태그:#홍준표, #자유한국당, #보수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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