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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톤치드가 가득 찼을 것 같은 숲길.
 피톤치드가 가득 찼을 것 같은 숲길.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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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8일, 서울둘레길 5코스, 관악산 코스를 걸었다. 전체 길이 12.7km, 소요예상시간 5시간 50분, 난이도 중급. 사당역에서 출발해 석수역에서 끝난다. 이 구간에는 관악산과 삼성산이 있다. 코스 길이에 비해 소요예상시간이 긴 것은 걷기 만만치 않다는 의미렸다.

이른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한낮의 기온은 31도가 넘을 것으로 예상됐다. 습도가 높아 오후 늦게 소나기라도 한 줄금 뿌리는 게 아닌가, 예상했지만 끝내 비는 쏟아지지 않았다. 걸으면서 비를 맞을 작정으로 비옷과 우산을 준비했건만 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서울둘레길을 걷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었다. 벚꽃이 한창이던 4월에 서울둘레길 6코스를 시작으로 서울둘레길 완주에 도전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니, 첫 코스 선택이 아주 절묘했다. 6코스 안양천 코스는 벚꽃이 절정일 때 걸어야 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만일 지금 6코스를 걷는다면 잎만 무성한 벚나무 아래를 찜통더위에 시달리면서 걸어야 했으리라. 별다른 고민 없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라서 석수역에서 출발하는 안양천 코스를 서울둘레길 완주 출발지로 잡았는데, '신의 한 수'였다.

나무가 울창한 숲길.
 나무가 울창한 숲길.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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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에서 꽁꽁 얼린 생수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여름에 걸을 때 꼭 필요한 게 얼음생수다. 더운 날씨 탓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갈증에 시달릴 때 마시는 얼음물은 사막의 오아시스보다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사당역 4번 출구에서 출발했다. 사당역은 언제 와도 번잡하기 짝이 없다. 전철역은 전철역대로 사람들이 붐비고, 차로는 차로대로 각양각색의 버스들과 자동차들로 번잡하기 이를 데 없고 인도는 인도대로 사람들로 북적인다. 출퇴근시간이면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복잡한 곳이 싫다고 하면서도 그런 곳으로 모여드는 습성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복잡하고 번잡한 사당역 주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걸음을 재게 놀렸다. 역 주변을 벗어나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곳에서 관음사 입구까지는 채 1km가 되지 않는데 엄청나게 길게 느껴진다. 후텁지근한 도시의 불쾌한 기운이 온몸에 달라붙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당골 지나니 매혹적인 소나무 숲이 나왔다

관음사 가는 길
 관음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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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입구에서 관음사로 가는 길에 돌장승 둘이 서서 걷는 이들을 반긴다. 드디어 숲길로 접어들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를 걷고 있었는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서 도시의 여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길은 관음사 앞을 지나 낙성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서울대 앞을 지나 관악산 자락을 따라 이어진다. 관악산은 내게 아주 익숙한 산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더위를 피하려고 가족과 함께 관악산 계곡을 자주 찾았기 때문이다. 그게 언제였지, 하면서 세월을 꼽아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싶어서.

예전에 관악산 계곡에는 물이 많았다. 그래서 한 여름이면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물이 말라버렸다. 하긴 그런 현상이 관악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산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 안국사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 안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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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와 안국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길 위에는 보이지 않아도 나보다 혹은 우리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의 삶이 아로새겨져 있다. 낙성대와 안국사에서는 고려시대의 명장 강감찬 장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낙성대라는 이름이 강감찬 장군에게서 유래되었으니 당연하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낙성대'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안국사는 강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관악산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소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걸으면서 솔향기를 만끽할 수 있다. 솔향이 물 흐르듯이 나무 사이를 타고 흐른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솔향기를 들이마신다. 마치 관악산의 품에 처음 안긴 것처럼.

무당골 바위. 내부가 검게 탔다.
 무당골 바위. 내부가 검게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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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움푹 파인 시커멓게 그을린 바위가 있었다. 탄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 부근이 무당골이었다고 하니, 무당들이 치성을 드리면서 뭔가를 잔뜩 태운 흔적이 아닐까 짐작했다. 무당이라.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리 흔하지 않지만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집이 더러 있었다. 굿을 하는 집은 단번에 알 수 있다. 굿을 조용하게 할 수 없으니까. 굿하는 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달려가서 구경해야지.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광경이 되었다.

무당골을 지나고 한참을 걸으니 삼성산 성지가 나온다. 이곳에 왔으니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를 잠시나마 들여다봐야지. 1839년, 조선 헌종 때 천주교 탄압은 기해박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삼성산 성지에는 이 때 새남터에서 효수 당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안장되었던 곳이다. 특히 모방 신부는 김대건 신부, 김양업 신부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최초의 조선인 신부로 만들었다고 한다. 

삼성산 천주교 성지
 삼성산 천주교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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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에 조선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벌이던 이들 성인들은 천주교 신자들의 희생을 막고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고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들의 유해는 새남터에 20여 일 동안 버려졌다가 1843년에 삼성산에 묻혔다고 한다. 지금은 명동성당 지하묘지에 모셔져 있고.

호압사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했다. 호압사에서 5코스 도착지점인 석수역까지 거리는 3.5km. 하지만 이 길은 걷기 만만하지 않다. 예상 소요시간이 1시간 42분이기 때문이다. 이 구간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 쉼터가 잘 조성돼 있어 한가롭게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기도 하다.

느긋하게 누워서 오수를 즐길 수 있는 평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소나무 숲이라니, 매혹적이다.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쉬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에 오면 한 여름의 열기를 피해 사람들이 숲으로 몰려가는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드디어 완주, 걸었던 모든 날이 좋았다

호압사 부처님
 호압사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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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압사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이듬해인 1393년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호랑이 모형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나는 호랑이보다 절 옆에 세워진 온화하게 웃는 아기 부처님이 더 인상적이었다. 두툼한 볼살이 복이 있어 보인다. 웃는 눈매가 부드럽기 짝이 없다. 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지게 하는 부처님이다.

석수역을 1km 남짓 남겨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숲을 벗어나 도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걸음을 늦춘다고 해도 멈춘 것이 아니니 남은 거리는 짧아질 수밖에 없다. 아, 저기가 석수역이다. 드디어 완주했다.

삼림욕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
 삼림욕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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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공식 길이는 157km지만 나는 그보다 4.3km를 더 걸었다. 1코스인 불암산 코스의 보조구간 4.3km를 더 걸었기 때문이다. 각 코스마다 길이가 다르고, 난이도가 다르고, 보이는 풍경이 달랐다.

길은 저마다 특색이 있었고, 다른 역사와 사연,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걸으면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걷고 나면 늘 뿌듯하고 행복했다. 걸었던 모든 날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때문이리라.

서울둘레길
 서울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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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서울둘레길, #관악산코스, #강감찬, #삼성산 성지, #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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