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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카페에서 책을 잘 읽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책 <문학의 기쁨>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렇게 상상해보기로 한다. 나는 그날, 우연히 들른 어느 동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 카페는 테이블 간격이 가까워 옆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렸다. 나는 원래 카페에서 책을 잘 읽지 못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하는 말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통에 더 읽지 못하고 있었다.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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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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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눈은 책에 두고 있었지만 이미 내 눈은 거의 감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귀가 활성화됐다. 옆 자리에는 내 나이쯤 되는 두 남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소리가 옆 테이블까지 건너가는 건 못 참을 만큼 젠틀하고 예의 바라 보였다.

그래서 의자를 앞으로 한껏 당기고 얼굴을 가까이 댄 채 소곤소곤, 또는 조근조근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나중에야 그게 딱히 젠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문학은 수줍은 거니까!).

말하는 걸로 보니 둘 다 지적이고 제법 '소설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옆 자리에 앉아 눈만 책에 두고 있는 나 같은 열렬한 소설 독자는 관심이 더 쏠릴밖에. 나는 남의 이야기를 몰래 엿 듣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이제 책 읽기는 아예 포기하고 두 남자의 이야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점이 하나 포착됐다. 그들의 목소리는 왠지 기운이 없었고, (흘긋 본) 얼굴 표정은 그야말로 우울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대놓고 그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보통 사람의 경우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얼굴이 벌게진 채 침을 튀기며 흥분하기 마련인데 이 둘은 그렇지 않았다. 단호한 표정 속에 아직 어디로 가야 할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사람 특유의 불안함이 보였다.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두 남자는 서평가 금정연과 소설가 정지돈이다. 두 남자가 저자로 나선 <문학의 기쁨>을 읽으며 나는 위와 같이 상상의 나래를 펴봤다. 책의 첫 페이지 세 번째 문단의 몇 문장이 이 책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문학동네>에서 진행한 리뷰 좌담에 참여한 건) 정말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전에도 많은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리뷰 좌담 때는 정말 두 손을 다 들고 말았어요. 포기, 패배, 불가능 같은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문학에 대해 말한다는 것 말입니다." - 본문 중에서

그러니까 지금 둘은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였다. 문학에 대해 말하기. 하지만 둘은 끔찍함을 이겨내고 서로를 정연씨, 지돈씨라고 부르며 다시 한번 끔찍한 일을 해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문학에 대해 말하기. 두 사람은 한국 작가의 신간을 들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보기로 마음을 모은다. 이 책은 실제 있었던 대화의 내용을 다양한 형식의 글로 옮긴 것이다.

둘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멀리서 메일로 소통하는데, 모든 이야기의 주제는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에 맞춰져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두 저자는 소설가와 서평가라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답게 본인들이 들고 나온 이 질문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마저 문학적으로 접근하고 만다. 본인들이 던진 질문임에도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까다로우면서 근본적인 태도로 이 질문을 대한다.

"그러니까 단어가 가진 의미로서의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 가 아니라 뭔가가 가능하기라도 할까, 우리가 지속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 불가능을 가장한 아카데미즘과도 결별하고 독자들을 현혹하려는 상업주의와도 결별하고 나이브한 자기만족이나 자기애와도 결별하고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이상과도 결별하고도 가능한 무언가가 있을까 하는 생각." - 본문 중에서 

이어 둘은 문학 비평, 등단 문화, 문단 권력, 직업으로서의 독서, 한국 문학의 위기, "아무도 읽지 않는 한국문학을 논하는 시대착오적인 행위를 하는" 스스로에 대한 측은함, "문학을 삶을 위한 도구로 봐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 데이비드 보위(영국 가수라고 한다), 오한기(평단에서 주목하지 않는 소설가라고 한다) 등에 대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덕후에게 힘을!

고백하자면, 나는 3분의 2 지점부터는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특별히 생각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다. 보통의 책과는 달리 이 책은 그래도 괜찮을 듯했다. 두 저자도 특별히 자기들의 이야기에 독자들이 집중력 있게 따라오길 원하진 않을 것 같아서였다(그랬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겠지!).

다시 상상으로 돌아오면, 나는 옆 자리에 앉은 남자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느 순간부터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건 특별히 내 잘못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둘도 서로에게 "정연씨가 (또는 지돈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하며 난감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는데, 그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 두 명은 국어교육을, 국문학을 전공했다. 두 친구가 임용고시 준비를 할 때, 만나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당연히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마냥 좋았다. 가끔은 오늘 내가 한 말이라곤 '아.' 밖에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마도 이런 나이기에 <문학의 기쁨>도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점차 두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 맥락을 놓치면서 든 생각은 이런 거였다. 어찌 됐건 이 사람들은 참으로 오래도록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문학에 대해 꽤 고민하고, 꽤 애정을 갖고 있구나. 이토록 재미없는(문학에 대한 이야기니까) 주제를 그나마 이만큼 가독성을 높이려고 일부러 실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자꾸 한 거구나.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마지막 대화를 듣고는 나도 모르게 "힘내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건, 내가 그들보다 더 나은 입장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 큰 애정을 가졌는데, 그 어떤 것이 과연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덕후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서였다. 책은 아래의 문장들로 끝이 난다.

"우리는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날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정연은 메일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to the future라고 답했고 금정연은 다시 we are the future라고 답했다. 그렇다.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 - 본문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문학의 기쁨>(금정연, 정지돈/루페/2017년 03월 24일/1만4천8백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 합니다



문학의 기쁨

금정연.정지돈 지음, 루페(2017)


태그:#금정연, #정지돈, #문학, #한국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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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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