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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알고 지내온 60대 부자 부부가 있다. 자산은 주식, 채권, 부동산을 모두 합쳐 100억 남짓, 자식들도 모두 독립해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이들 부부에게 문제가 있다면 건강인데 아내가 갑상선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고 관절염으로 수년 동안 고생하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그런 부부가 몇 년 전부터 일본으로 여행을 가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줄기세포 주사를 맞기 위해서다.

언젠가 이들 부부가 내게 줄기세포 주사가 어떤 효용이 있는지, 주사를 맞고 얼마나 건강이 좋아졌는지 확신에 차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자기 몸에서 추출해 배양한 줄기세포 주사를 꾸준히 맞고서는 오래 앓아온 관절염이 나아지고 기본적인 건강상태도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오사카로 가 주사를 맞고 오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부부는 지금도 한 해에 몇 차례씩 일본행 비행기를 탄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돈 많고 걱정 없이 지내는 부부가 새로 나온 건강시술을 받겠다는데 그게 그리 특이한 일이란 말인가. 일각에선 위험성이 없지 않고 효과도 불투명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줄기세포 주사는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부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유행하는 건강 서비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책 표지
▲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책 표지
ⓒ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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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충격을 받은 건 최근에 이르러서였다. 서울신문 특별기획팀이 2015년 1월부터 3월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보도한 내용을 엮은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를 보고 나서였다.

책은 한국사회 상위 1%와 절대빈곤층의 삶을 자녀교육, 출산·육아, 주거, 자산관리, 입는 것, 먹는 것, 건강관리, 여가 생활, 결혼, 미용 관리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조명하고 이를 통해 양극화의 현실을 낱낱이 보여주는 구성으로 꾸려져 있다. 이 가운데 건강관리 편의 도입이 바로 줄기세포 주사다.

충격적인 건 바로 가격이었다. 30회에 5억 원 가량 하는 이 시술은 임상을 거쳐 확실한 효과가 검증되지 않았음은 물론 일본까지 오가는 비행기값과 숙소비용 등을 포함해 부가적인 비용까지 적지 않게 들어감에도 여전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기자들이 만난 부자들은 "돈이 있으면 시간까지 살 수 있게 됐다", "만병통치약까지는 아니지만 효과는 분명하다"며 줄기세포 주사를 찬양한다. 이들에게 줄기세포 주사의 비싼 가격은 특별한 문제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줄기세포 주사 외에도 부자들은 삼성서울병원이나 세브란스병원 등 대형병원에서 VVIP 건강검진 서비스를 받는 게 유행이란다. 이들은 20평 크기 VIP 병실 안에서 대부분의 검진을 받고는 하는데 일반 건강검진보다 항목이 세부적일 뿐 아니라 전담 주치의가 할당되고 직통전화로 365일 언제든 건강문제를 상담하는 등 특별한 서비스를 받게 된다. 책이 예시로 든 서비스 비용은 1년 1900만 원 남짓으로 일반 건강검진 비용의 수십 배에 이른다.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빈부격차

'경기 화성에 사는 싱글맘 P(40세)씨는 2년 전부터 하혈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증상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매일 세 시간씩 녹즙 배달을 해 먹고사는 일용직 근로자여서 시간을 내 병원에 갈 여유가 없기도 했다. 건강보험료를 오래 체납해 보험 혜택도 받기 어려웠다. 그런데 몸 상태는 갈수록 나빠졌고 교회 지인의 권유로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자궁내막증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P씨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이런 몸으로 1년을 버텼느냐"고 혀를 찼다.' -123p

'얼마 되지 않는 환급금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참는 사람들도 있다. 건강보험공단이 1년간 의료비를 쓰지 않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7만2000원의 건강생활유지비를 '환급'해주는 규정을 노린 것이다.' -127p

반면 빈곤층이 놓인 현실은 충격 그 자체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탈출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은 '절대빈곤'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암투병하는 몸을 부여잡고 자식을 위해 일을 나가는 어머니의 사연이나 환급금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앞에 적은 부자들과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사는 시민의 모습인가 싶을 만큼 충격적이다.

이 같은 차이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차이가 다시 차이를 만들어 두 계층 사이에 결코 넘어서기 어려운 골을 파놓기에 이른다. 300만 원짜리 명품 간장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과 돈이 없어 평생 제대로 된 화장품 한 번 바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삶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누군가는 결혼하는 순간 '결혼 2년여 만에 시아버지로부터 열쇠를 총 세 개 받'고 풍요 속에서 첫 발을 떼는데 다른 누군가는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사치로 느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빈부 격차에 따른 수준차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과목은 무엇일까. 흔히 영어만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국어 실력의 격차가 아주 크다. 경기도의 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A양은 3학년 때까지 '까막눈'이었다. 한글로 이름조차 쓸 줄 몰랐다.

A양의 어머니(33세)는 학교에 가면 배우겠거니 믿었다. 하지만 1학년 교실은 엄마의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갔다. 반 아이 10명 중 8~9명꼴로 입학 전에 한글을 미리 배워 오는 현실에서, 담임교사는 A양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준비물을 받아 적지 못해 반에서 혼자 준비물을 못 챙겨 가기도 했다. 국어를 못하면 다른 모든 과목을 제대로 배울 수 없어 결국 공부 전체가 '엉망'이 된다.' -29p

'방의 크기와 시설 등에 따라 2주 기준 최저 600만 원에서 최고 1200만 원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뉘어 있고, 산전 마사지 2회와 산후 마사지 8회가 기본 패키지다. 호텔 룸서비스처럼 하루 한 번씩 청소해줄뿐 아니라 모든 방에 화장실과 함께 1인 좌욕기가 갖춰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철 음식 위주의 식사가 산모의 방으로 직접 서빙된다. 오후 3시와 8시에는 소화가 잘된다는 효소 빵 등이 간식으로 나오고 모유 수유에 좋다는 프랑스산 생수도 매일 세 병씩 제공된다.' -53p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쯤 되면 얻어 입히는 것마저 쉽지 않다. 맞는 옷을 찾기 힘들뿐더러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남이 입었던 옷을 입는 것에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 간호조무사 A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5, 6학년이었던 두 아들은 한 벌당 9만 원이었던 태권도 학원 유니폼과 점퍼를 일상복처럼 학교 갈 때에도 입고 다녔다"면서 "지금까지는 부끄러운 줄 몰랐던 모양인데 중학교에 들어가면 걱정"이라고 했다.' -95p

'대중화된 음식점이 아닌 특정인만 갈 수 있는 '폐쇄형 음식점'도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삶을 즐기려는 상위 1%의 생활 방식이 반영된 결과다. 강남의 한 백화점에는 16석의 '프라이빗 룸'이 있는데 초청받은 VVIP(극소수 상류층 고객)만 이곳에서 식사할 수 있다. 백화점 측은 비싸게는 600~1200만 원에 달하는 최고급 와인과 함께 최고급 요리를 선보인다.' -119p

서로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두 계급

책이 적고 있는 양극화의 현실은 상상 이상이다. 한국사회의 양극화가 어느 정도로 진전됐는지 보여주는 여러 지표에 익숙한 사람이더라도 실제 현실을 목도하고 나면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울 정도다.

봉건적 질서가 남아 있던 과거엔 한 마을에 부자와 빈자가 함께 살아갔다면 현재는 상류층과 빈곤층이 서로 멀어지다 마침내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더욱이 한국사회와 같이 빈부격차가 큰 사회에선 중간에 낀 계층의 시선에서도 양 극단이 사라져 빈부격차의 실상이 감춰지고 만다.

이 책은 언론사 특별기획팀이 아니었다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프로젝트다. 꽤나 긴 기간 동안 사회 전 방위에서 양극화실태를 취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오늘 한국이 처해 있는 문제를 진단했다. 책이 적고 있듯 한국사회의 절대 빈곤층과 상위 1%는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은 물론 서로에 대한 관심조차 없는 상태다.

자산 상위 10%가 차지하는 부의 집중도가 70%에 육박하는 현실 속에서 빈곤층은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동기를 잃어가고 이는 사회의 활력을 갈수록 떨어뜨려 한국사회 전체의 효율을 떨어뜨린다. 당연히 모든 국민의 존엄과 평등을 주요 가치로 삼는 한국사회에 어울리는 현상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 이하 새 행정부는 당초 공약대로 일자리 확보와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조치에 착수했다. 저소득층의 소득을 키워 양극화를 완화하고자 하는 조치다. 기초연금 인상,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와 같이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복지제도 확충도 함께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자유경쟁 체제에서 밀려난 자를 완전히 낙오되지 않도록 해 다시 대열에 끼워넣는 조치는 민주주의의 복원성으로 비유될 수 있다. 두 계층이 서로의 시야에 닿지 않게 된 현실 가운데 대한민국호가 더는 옆으로 기울지 않도록 할 책임이 온전히 현 정부의 양 어깨에 달려 있다. 응원하고 경계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 한울 / 김상연, 이두걸, 유대근, 송수연 지음 / 2015. 12. / 15500원>



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 절대 빈곤층과 상위 1%, 두 국민의 이야기

서울신문 특별기획팀 기획, 김상연 외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2015)


태그:#대한민국 빈부 리포트, #한울, #김상연, #이두걸,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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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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