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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강동원이 친일 문제로 곤혹을 치렀다. 일제강점기 때 광산 사업을 하면서 친일 행적을 남긴 이종만(1886~1977년)이 외증조부라는 사실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강동원은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가족사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했고, 또 관련된 자료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외증조부의 친일 행적을 정확히 몰랐던 모양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광산왕으로 유명했던 이종만은 1937년 이후 기부금을 헌납하거나 친일단체에 가담하거나 혹은 친일 좌담회에 참석하거나 강제징병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힘을 보탰다. 누가 봐도 명백한 친일파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안중근과 이승만, 그리고 이종만

강동원과 그의 외증조부 이종만
 강동원과 그의 외증조부 이종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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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종만에 대한 평가가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친일파였다는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점만으로도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다. 하지만, 친일파였다는 점과 더불어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까지 검토해야만 그에 대한 평가가 완성된다.  

한 인간을 평가할 때는 인생을 전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민족에 대해 죄를 범했는지 공을 세웠는지를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각 단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명이 응칠이었던 안중근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따르면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진압군에 가담해 동학군과 대립했다. 당시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지만, 지역유지의 아들이라는 점과 총을 잘 쏜다는 점에 힘입어 황해도 의용군의 수뇌급이 되어 진압에 참여했다.

반외세·반봉건 투쟁인 동학농민혁명을 반대하고 진압한 것은 인생의 오점이 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중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전 행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 그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중근은 일본 침략정책의 선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쓰러뜨렸다. 그래서 우리는 앞의 오점이 아닌 뒤의 업적을 근거로 그를 평가하고 존경한다. 우리는 안중근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그 같은 판단을 내린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고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많기는 했지만, 그 역시 독립운동에 기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 경력을 근거로 이승만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전 행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죄악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945년 해방 뒤에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분단을 획책했다. 또 장기독재를 위해 불법 개헌을 하고 헌정을 농단했다. 또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했다. 막판에는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4·19 혁명을 자초했다. 그 뒤 국민의 심판도 받지 않고 이른 아침에 하와이로 도주했다.

우리는 그 같은 인생 후반부 행적에 좀더 강조점을 두고 이승만을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1945년 이전의 행적을 약간씩은 참고한다. 이처럼 우리는 이승만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그를 판단하고 있다.

이종만도 그런 종합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의 경우에도, 인생 앞부분과 뒷부분이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1945년 60세 나이로 해방을 맞이하면서부터 그는 친일파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한국 현대사의 핵심 쟁점인 분단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이전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해방 이후에 분단을 획책하거나 조장한 일은 해방 이전에 친일을 한 것 못지않게 중대한 죄악이다. 마찬가지로,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지지한 것은 해방 이전에 독립운동을 한 것만큼 훌륭한 일이다.

이종만이 바로 그랬다. 친일파로 살았던 그가 해방 뒤에는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을 추구하는 쪽에 힘을 보탰다. 해방 뒤에 그는 <독립신보>를 간행하고 남북협상을 적극 지지했다. 분단을 획책하는 이승만에 맞서 김구·김규식이 벌인 남북협상과 통일운동의 편에 섰던 것이다. 

김규식과 김구.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김규식과 김구.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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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 철저한 북한에서 '애국열사릉' 묻힌 이종만

하지만 미국 영향 하의 남한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종만의 활동은 위기에 처했다. 더 이상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1949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여한 뒤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그곳에 정착했다. 그 뒤 북한에서 자원개발에 참여했다. 이런 일련의 행적이 고려되어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받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런 사실이 <친일인명사전>에 다음과 같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김일성의 요청으로 북한의 광업부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지역을 탐사하여 자원개발에 기여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을 지냈으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조국통일상을 수상하였으며, 1977년 1월 19일 사망했다.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로 알려졌다."

이종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친일파지만, 해방 정국에서는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를 평가할 때는, 친일파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분단 반대파였다는 사실도 반드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종만은 처음에는 일본을 지지하고 죄를 범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반성하고 민족의 편에 섰다. 그러므로 오로지 친일 행적 하나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친일 행적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친일 문제에 비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는 분단과 통일의 문제에서 용감하게 정의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는, 해방 전에는 친일 죄악을 범하고 해방 후에는 분단까지 획책·조장하고도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이종만은 아무래도 좀 더 나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승만보다도 확실히 나은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분단을 획책함으로써 이전의 독립운동 경력을 스스로 훼손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종만이 친일 청산이 비교적 철저했던 북한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친일파 장교 출신이 무려 18년간이나 정권을 잡고 민족을 억압한 것도 모자라, 그의 딸까지 정권을 잡고 아버지 역사를 미화하고자 국정교과서 편찬까지 강행한 남한과 달리,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친일파는 사형이나 교화형에 처하고 토지도 빼앗고 참정권도 빼앗았다.

그렇게 비교적 철저하게 친일을 청산했기에, 북한 사회에는 이 문제에 대한 응어리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친일 문제에 대해 남한보다 훨씬 더 관대한 편이다. 친일할 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사유가 있었거나 친일 문제로 죗값을 치렀다고 인정되는 사람한테는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과감하게 내미는 것이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회개한 친일파들에게 기존의 소유 토지에 대한 권리도 인정했다. 

친일 청산을 비교적 과감히 했기에 이 문제를 좀 더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북한에서, 이종만을 친일파가 아닌 애국열사로 규정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를 친일파로만 인식하는 우리의 시선에 수정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양면을 고려한 '종합적인 평가' 필요해

신탁통치 반대운동
 신탁통치 반대운동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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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해방 후에 아무리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을 추구했다 하더라도 일단은 북으로 넘어간 사람이 아닌가? 그런 사람을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런 비판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해방 직후에 남한에서 이종만과 유사한 길을 걸은 사람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북협상을 앞장서서 추구한 김구는 이종만이 북으로 넘어간 그 달에 남한에서 암살을 당했다.

1948년 김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김 회담을 했으며 훗날 1989년 노태우 정부에 의해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은 김규식은 한국전쟁 중에 인민군 지배영역에서 인생을 마쳤다. 이 외에도, 통일운동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이 남한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남한에서 견디지 못하고 북으로 넘어간 이종만한테 무턱대고 비판을 가할 수도 없다. "왜 남한에서 좀 더 투쟁하지 못했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남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를 보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종만을 평가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요소는, 해방 전에 친일파였다는 점과 해방 뒤에 통일운동가였다는 점이다. 이런 두 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이종만을 재조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종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태그:#이종만, #강동원,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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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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