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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예산군분원 전 분원장 이제상씨가 연령군 묘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예산군분원 전 분원장 이제상씨가 연령군 묘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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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덕산 가야산은 옥계리 초입 헌종태실로 시작해 연령군, 흥녕군, 남연군의 묘와 나라에서 제를 올리던 신당터 등 조선왕실역사의 보고다.

또한 풍수사상과 왕가에 얽힌 가족사는 사극을 방불케 하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음에도 그동안 불교문화에 가려져 상당부분이 묻혀 있었다.

예산군이 가야산 일원 조선의 문화유적을 정비해 왕실테마 관광상품으로 묶어 개발하고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조언이 나오는 이유다.

실례로 가야산 자락에 있는 명빈박씨(䄙嬪朴氏)와 연령군(延齡君)의 묘(墓)와 비(碑)는 소설같은 애잔한 사연을 전하고 있는데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연령군은 숙종대왕의 셋째(성인으로 생존한 아들 기준) 아들로 왕의 총애를 받았고, 훗날 경종·영조가 된 이복형들과 우애도 깊었다고 실록에 전한다. 21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왕자는 왜 덕산 옥계리까지 와서, 그것도 어머니와 나란히 잠들었을까. 그들의 애달픈 사연은 숙종과 영조대왕의 어필과 어제로 비석에 새겨졌고, 지금 묘 앞에 서 있다. 

왕의 사랑과 효 그리고 우애에 얽힌 이야기는 그 자체만 스토리텔링해도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왕실유적이 언제 개발의 삽날에 훼손될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명빈박씨와 연령군 묘는 잡목 속에 묻혀 있다가 2년 전부터 군청에서 벌초를 하고 있다지만, 분묘에는 팔뚝만한 나무 뿌리가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을 정도로 방치돼 왔다. 또한 문화유적임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설치돼 있지 않을 정도로 관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예산군분원 전 분원장 이제상(83)씨는 명빈박씨와 연령군 묘와 비에 대해 "명빈박씨묘 앞 비석에는 숙종대왕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연령군의 비에는 숙종과 영조대왕 두 명의 왕이 지은 어제를 새겼으니,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문화재 지정가치가 있다. 그런데 수년 전 군에 문화재 지정신청을 했는데 부결됐다는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며 안타까워 했다.

이어 "연령군 묘 아래에 있는 흥녕군(남연군의 장남)묘도 문화재 지정관리가 안돼 묘역 바로 앞에 공동주택을 짓고 있다. 명빈박씨와 연령군 묘도 대충 벌초만 할 뿐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언제 어떻게 훼손될지 알 수 없다. 내가 죽기 전에 문화재로 등록되면 걱정이 없겠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예산군청 문화재 담당공무원 이강열 학예사는 "명빈박씨와 연령군 묘에 대해 2008년, 2010년 두 번이나 지정문화재 신청을 했는데도 부결됐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가야산 일원은 왕실유적의 보고다. 꼭 문화재 지정이 안되더라도 관심을 갖고 발굴하고 관리해야 한다. 그동안 불교유적에만 치중한 면이 있다. 좁은 지역에 왕실묘가 이렇게 모여 있는 곳이 전국에 가야산 밖에 없다. 왕실유적에 대해 안내판도 설치하고 적극 홍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연령군(延齡君)은 누구인가
연령군 묘소 앞에 서 있는 비석.
 연령군 묘소 앞에 서 있는 비석.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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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의 이름은 이훤이고,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1699년 6월 13일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명빈박씨다.

조선 19대 왕인 숙종은 14세(1674년)에 왕위에 올라 인경·인현·인원왕후까지 3명의 왕비를 맞이했으나 대를 잇지 못했다. 1688년 희빈장씨(장희빈)가 아들(후에 20대 왕 경종)을 낳아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폐비됐다. 그 유명한 남·서인 간의 정쟁에 휘말리던 시대였다.

숙원최씨가 1694년 연잉군을 낳으니 훗날 영조대왕이 된다. 연잉군이 태어나고 5년 뒤 숙종의 총애를 받던 명빈박씨가 왕자를 낳으니 그가 연령군이다. 숙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라고 하지만, 어려서 죽지 않고 성인이 된 아들로 치면 세 번째다.

연령군이 5세 되던 해 생모인 명빈박씨가 죽자 숙종은 크게 애도했다. 사랑한 여인을 위해 직접 비문까지 썼다. 명빈을 잃은 숙종의 슬픔은 그의 아들 연령군에 대한 사랑으로 깊어졌다. 6세 이후에 봉군하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5세때 연령군 봉작을 내렸다. 당시 이를 반대했던 대신들을 처벌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연령군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갈 수록 더했다. 연령군에게 집을 하사했는데 200칸에 이르는 저택이었다고 한다. 또한 숙종이 병이 들자 아비의 변을 직접 맛 볼 만큼 연령군의 효성도 지극했다고 실록이 전한다.

1719년 10월 2일 연령군은 21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숙종이 크게 슬퍼하며 제문과 묘지문을 직접 지었다. 이복형제(훗날 경종·영조)들도 스스로 나서 제문을 지을만큼 형제간 우애도 깊었다고 한다.

연령군은 5세때 죽은 어머니(명빈박씨)를 평생 사모했고, 그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서울 금천현 번당리(현 동작구 대방동) 명빈박씨 묘소 근처에 묻혔다. 이후 1942년 경성부 구획정리때 모자의 묘소를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전 382-38, 39)로 이장해 나란히 묘를 썼다.

명빈박씨 묘앞에 서있는 비석 앞면에 새긴 '명빈밀성박씨지묘'는 숙종대왕 친필로 비석 상단에 '어필'이라고 새겨져 있다. 연령군의 묘앞 묘비 뒷면에는 숙종대왕이 지은 어제가, 측면에는 영조대왕이 연령군의 부인을 위해 지은 어제가 새겨져 있다.

묘소를 이장할 때 서울에 남겨진 연령군 신도비는 훗날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런데 연령군은 예산과 참으로 기이한 연이 닿아 있다. 그가 태어난 뒤 끊어진 탯줄을 묻은 곳이 예산땅이기 때문이다. 대술면 궐곡리 태봉산에서 나온 태실비(충남대박물관 보관)의 주인공인 왕자아기씨가 바로 연령군이다. 태실비에는 강희 38년(1699년 숙종 25년) 6월 13일 인시생 왕자아기씨 태실이라고 적혀 있다.

연령군과 그의 모친 명빈박씨가 마침내 잠든 땅이 어머니와 아들을 연결하는 태를 묻은 곳이었음은 우연일까.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다. 신양 황계리 태봉산에는 그의 조부인 현종(조선 제18대 왕) 태실이 위치해 있으니(현재 훼손상태), 예산군은 정말로 조선왕조의 역사적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연령군, #왕실유적, #예산군, #명빈박씨, #조선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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