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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얼굴이었다. 일 년에 몇 번 입을 일 없을 낡은 양복을 꺼내 입고, 거울 앞에서 자신 있는 표정을 연습했다고 했다. 면접 볼 때 유의사항도 더듬더듬 인터넷으로 검색했다고 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쉰 살이 넘은 나이, 그는 해고를 건너온 시간 동안 팔순 노모를 모시고 살아냈다고 했다.

진땀이 나고, 어깨가 내내 굳었던 그는 20분의 면접 시간 동안 연습했던 만큼의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허리가 고갯마루처럼 굽어진 노모를 모시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인터넷 검색하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난주 진행된, 쌍용자동차 복직을 위한 면접 자리였다.

"공장 다닐 때 열심히 일했고... 회사가 잘 되기 위해... 여러 가지 제안도 했고... 다시 돌아가면 진짜 열심히 일 할 겁니다..."

낮은 한숨처럼 읊조리던 그의 말에선 다시 일하고 싶다는 생의 의지가 가득했다. 다만 쌍용자동차에서 16년을 일하며 가졌던 자부심이 처음 보는 면접관 앞에서 깨져버리는 것 같아 듣는 내내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150여 명의 해고자들의 얼굴에도, 1천여 명이 넘는 희망퇴직자들의 얼굴에도 면접을 기다리던 내내 희망과 초조함이 교차했다.

당장 복직시키는 것도 아닌 단지 면접만 보는 것뿐인데 그 얼굴들에 담긴 희망이 서글펐다. 설렘으로 시작했던 면접이 끝난 뒤 해고자들은 다시 불안과 공포에서 허우적댔다. 그도 그럴 것이, 2015년 12월 합의 후 이듬해 단 18명 해고자만 복직했다. 이게 합의 이행의 전부였다.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나라

지난 2015년 12월 쌍용자동차 노노사 합의 조인식 모습.
▲ 쌍용차 노노사 해고자 전원 복직 합의 지난 2015년 12월 쌍용자동차 노노사 합의 조인식 모습.
ⓒ 사진제공 쌍용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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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잔업 특근이 쏟아질 정도로 차가 많이 팔렸지만 해고자들은 추가 복직이 되지 못했다. 이번에 다시 복직 명단에 없다면 언제 또 내 차례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멀고 아득하기만 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쫓겨났던 그들은 애당초 잘못한 것이 없었다. 정리해고는 그의 잘못이 아닌 경영진들이 야기한 경영상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리해고법은 회사가 어려워지면 전체 구성원들에게 위기 극복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로지 일부 노동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비윤리를 합법적으로 뒤바꿔 놓았다. 

가라앉는 배에서 선장은 책임지지 않고 선장을 믿고 가만히 있던 선원들의 일부만 희생당하는 그 법 때문에 1년에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떠돌고 있다.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3000여 명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중 7년 동안 28명의 희생자가 나왔던 것처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죽음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나침반은 기업의, 기업에 의한, 기업을 위한 방향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나침반의 바늘은 스스로 지켜오던 자긍심이나 존엄이 깡그리 부수어진 노동자들의 삶을 향해 잠시 잠깐 흔들릴 뿐이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연대 단체 참가자들이 지난 2015년 1월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서울교를 건너며 정리해고 비정규직법제도 전면폐기를 위한 2차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엄동설한 바닥에 온 몸 던진 오체투지 행진단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연대 단체 참가자들이 지난 2015년 1월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서울교를 건너며 정리해고 비정규직법제도 전면폐기를 위한 2차 오체투지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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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삼성 이재용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에게는 기껏 500만 원을 건네고, 최순실-정유라 모녀에게 500억 원이 넘는 뒷돈 지원을 약속했던 삼성 이재용의 구속을 법원은 허가하지 않았다.

집회시위의 관한 법률 위반, 교통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무너진 법원의 균형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기각 판결이었다.

그 영장판사는 잠시 비난받는다고 해도 곧 있으면 잊힐 일이라고, 혹여 판사 옷을 벗는다 하더라도 삼성에서 고문변호사로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하지만 그 판결은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욕망 때문에 죽어간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름들을 짓밟는 판결이었고, 제발 법대로라도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삼성전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염원을 절망으로 바꿔버린 판결이었다.

이런 욕망의 법관들은 실상 비일비재했다. 미래에 올지 모를 경영상의 위기 때문에 정리해고가 적법하다고 판결했던 콜트콜텍 판결, 법원이 불법파견으로 판결한 뒤 법대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다고 파업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90억 손해배상 인정판결, 공기업인 철도공사에서 1년 뒤 정규직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KTX여승무원 노동자들의 근로자지위소송 패소 판결, 기업을 인수한 뒤 정리해고를 강행한 대주주 사진에 신발을 던졌다는 이유로 모욕죄 손배 소송을 걸고 유죄를 선고받은 하이디스 판결,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노동조합 자체를 없애려고 한 경영진에겐 3년이 지나도 법적 책임을 묻지 않고 그 폭력과 불법에 항의했던 노동자들만 유죄를 선고했던 유성기업 판결까지.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꿔버린 욕망의 판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욕망은 법원뿐만 아니라 정치, 언론을 포함한 사회전반적인 체제 속에 기생하고 있다.

이재용의 구속이 중요한 이유

14차 범국민행동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는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서 박근혜퇴진 이재용구속 집중집회 참석자들이 삼성본사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14차 범국민행동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는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서 박근혜퇴진 이재용구속 집중집회 참석자들이 삼성본사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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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재용의 구속이 중요하다. 삼성뿐만 아니라 현대차, 롯데, SK 등 고장 난 브레이크처럼 제어가 되지 않는 재벌들의 전횡과 그 전횡에 발맞춰 법을 바꾸고, 여론을 형성하고, 다수의 노동자 민중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욕망의 체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 시민들이 요구한 박근혜에 대한 탄핵은 이제 재벌로 이어져야 한다. 박근혜 탄핵이 끝이 아닌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박근혜 체제의 퇴장을 요구해야 한다.

그 요구의 시작 길을 재벌들의 욕망으로, 재벌들을 위한 체제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맨 선두에서 열겠다고 한다. 현대-기아차, LG-SK, 삼성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쌍용차, 콜트콜텍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유성기업, 갑을오토텍의 민주노조를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이 앞장을 서기로 했다.

내 삶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박근혜와 국정농단의 주범 재벌총수들의 구속을 요구하기 위해 1박 2일 동안 40리 길을 걷기로 하였다. 삼성 이재용뿐만 아니라 현대차 정몽구, 롯데 신동빈, SK 최태원 등 재벌총수들의 구속을 특검 앞에서 요구하고, 삼성 본관 앞에서 500개의 컵라면을 먹으며, 법으로 노동자만 잡는 법원 앞에서 잠을 청할 것이다. 잠자고 있는 국회를 청소하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청와대까지 길을 열어갈 것이다.

그 길은 쉰 살의 노동자가 생전 처음 보는 면접관 앞에서 스스로 얼마만큼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를 증명해야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일 것이다. 합의 후에도 합의 이행이 되지 못할까 걱정해야 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는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노조탄압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위한 간절한 염원의 길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갈 것이다.

대행진 포스터
 대행진 포스터
ⓒ 대행진 준비위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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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쌍용차, #정리해고, #노조탄압,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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