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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어디를 가나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사리탑을 만날 수 있다. 고도(古都) 아부하야기리(Abhayagiri)를 찾은 것은 지난 2일(목)이었다. 그제 부처님이 첫발을 내디딘 마히양거나(Mahiyangana)를 출발하여 이곳 아부하야기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했다. 계속해서 지방도시를 다니다 보니 호텔 시설이 썩 좋지 않은데 견주어 규모가 큰 절들은 호텔보다 나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방도시의 호텔이란 우리나라 1980년대 모텔 수준 정도이다.

초기 사원이 집중되어 있는 고도라서인지 곳곳에 사리탑이 즐비하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사리탑의 규모는 보통 현대건축물의 20층 정도로 탑 아래서 올려다보면 탑 상륜부가 보일 듯 말 듯할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하고 만다. 강력한 왕권의 보호 아래 있었던 불교는 누가 더 높은 탑을 쌓는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탑과 절의 규모를 확장해갔다. 기원전 3세기 일이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기 약 700년 전 일이다.

스리랑카에 사리탑이 많은 까닭은 부처님 열반 뒤에 인도에서 힌두교가 성행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부처님 열반 뒤에 인도 각지에 세웠던 사리탑들은 힌두교도들의 파괴대상 1호였다. 이를 불안하게 여기던 스리랑카 불교종단에서는 강력한 왕권 하에 인도의 사리탑을 스리랑카로 하나둘 옮겨오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크고 높은 사리탑을 짓게 되어 현재 아부하야기리(Abhayagiri) 지역만 해도 발자국을 옮기는 곳곳에 사리탑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부처님진신 사리탑으로 거대한 피라미드 같다. 아부하야기리 사리탑으로 원래는 흰색이지만 파손되어 2015년에 복원한 것은 황색벽돌 모습이다, 탑 앞에 한 여인의 모습을 보면 이 탑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다
▲ 부처님진신사리탑 부처님진신 사리탑으로 거대한 피라미드 같다. 아부하야기리 사리탑으로 원래는 흰색이지만 파손되어 2015년에 복원한 것은 황색벽돌 모습이다, 탑 앞에 한 여인의 모습을 보면 이 탑의 크기를 짐작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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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하야기리 사리탑 안내판으로 이 탑은 오랫동안 폐허 상태였음을(사진 왼쪽) 알 수 있다
▲ 아브하야기리 사리탑 안내판 아브하야기리 사리탑 안내판으로 이 탑은 오랫동안 폐허 상태였음을(사진 왼쪽)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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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하야기리 사리탑 앞 법당의 부처님 열반 와불
▲ 열반 와불 아부하야기리 사리탑 앞 법당의 부처님 열반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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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것은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法難) 시대에 이들 사리탑들도 상당수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법난시대란 인도 타밀족의 침입에 이은 500여 년에 이르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식민시대의 불교파괴를 이르는 것으로 아부하야기리(Abhayagiri) 사리탑만 해도 2015년에서야 탑의 원형복원을 마쳤으니 나머지 탑들의 현재 모습은 따로 설명치 않아도 좋을 것이다.

"원래 5년 전 이 탑에 왔을 때는 아직 복원 중이었습니다. 그때 기회가 있어 복원 중인 상태로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보았는데 한국의 63빌딩에 오른 느낌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높이였습니다."

이번 스리랑카 여행의 안내와 통역을 맡은 와치싸라 스님은 몇 해 전 이 탑 복원 당시의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주었다. 이 탑은 천여 년 넘게 파괴된 채로 흙으로 덮여 있었고 흙 위에는 풀과 나무들이 자라는 바람에 하나의 동산으로 전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도 곳곳에서는 탑의 복원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사리탑 순례에 이어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 있었던 2300여 년 된 '보리수 원목' 이 있는 보리수절(마하비하라) 방문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절 경내에는 보리수가 곳곳에 심어져 있었고 열성 신도들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며 기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 보리수 원목은 인도에서 건너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죽지 않고 2300년을 이어온 것으로 이 원목의 고향인 인도에 있던 보리수가 죽어 이 나무의 후손을 옮겨 심었다고 한다. 여기서 원목이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인도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말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의 보리수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담은 모형상
▲ 모형상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의 보리수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담은 모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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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최초의 절 "이스루무니 바하라"로 바위굴을 이용해 지었다. 기원 3세기
▲ 스리랑카 최초의 절 "이스루무니 바하라" 스리랑카 최초의 절 "이스루무니 바하라"로 바위굴을 이용해 지었다. 기원 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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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을 옮기는 곳마다 사원이요 사리탑이 즐비한 스리랑카의 불교지만 더욱 눈여겨 볼 점은 신도들의 불심(佛心)을 꼽을 수 있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2월 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리탑 아래서 기도삼매에 빠져있는가 하면, 언제나 부처님께 공양할 꽃이 손에 들려 있는 나라가 이곳 스리랑카다.

또한 스님들에 대한 존경심도 여전히 스리랑카 불교를 굳건하게 지켜주는 힘인 것 같다. 실제로 엊저녁 이곳 북쪽 자푸나로 이동하는 중에 국도에서 경찰에게 속도위반으로 잡히고 말았다. 경찰관이 우리 일행이 탄 승합차를 세웠는데 와치싸라 스님이 운전석 옆에 타고 있는 것을 보더니 그냥 통과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말로만 듣던 스님들의 위상이 느껴진다.

위상이란 남이 세워주는 것이긴 해도 당사자인 스스로가 먼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결코 세우기 어려운 것일 텐데 스리랑카 사람들의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스님들의 오후불식(午後不食)도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유일한 통역인 와치싸라 스님이 저녁에 식당 출입을 안 하는 바람에 엊저녁에도 짧은 영어로 손짓발짓하며 식사를 주문한다는 것이 이상한(?) 음식만 시켜 고생을 했지만 이곳 스님들의 수행자다운 엄격한 모습에 고개가 수그러든다.

곳곳에 남아 있는 불교 유적지는 과거의 박제된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 정신을 잇고자하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현세에 생명력을 갖춘 '불교'로 다시 만들어 가고 있는 모습에 놀라움을 느끼며 스리랑카 불교유적지 순례를 이어가고 있다. 오늘은 부처님이 두 번째 스리랑카를 방문한 자푸나로 갈 예정이다.

보리수절 사리대탑 주변에는 땡볕인데도 경전을 외우며 기도하는 신도들이 많다
▲ 기도하는 신도 보리수절 사리대탑 주변에는 땡볕인데도 경전을 외우며 기도하는 신도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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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절에는 수많은 보리수가 있으며 신도들의 기도가 끊이질 않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도 보리수 밑에 앉아 있지만 원목은 아니다 . 원목은 기도하는 사람들 앞 계단 위에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 보리수 밑의 신도들 보리수절에는 수많은 보리수가 있으며 신도들의 기도가 끊이질 않고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도 보리수 밑에 앉아 있지만 원목은 아니다 . 원목은 기도하는 사람들 앞 계단 위에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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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대탑에 꽃을 바치러 가는 여인과 기자
▲ 꽃을 바치러 가는 여인 보리수 대탑에 꽃을 바치러 가는 여인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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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신한국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태그:#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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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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