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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지난 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 김기춘, 박정희 기념사업 행사 참석 박근혜 대통령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지난 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 출범식에 참석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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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따로 없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그 베드로 말이다. 아니, 베드로는 세 번을 부인하고 회개했지만, 이 1939년생의 백전노장은 도대체 인정을 할 줄 모른다. '없다' '아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입에 붙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말이다. 

"(최순실씨와 관련해) 보고받은 적 없고, 알지 못합니다. 만난 일도 없습니다. 통화한 일도 없습니다."

최근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최순실과의 관계를 해명하고 나선 김 전 실장의 말이다. 최순실은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단다. 김종 전 차관은 김 전 실장의 소개로 최순실을 알게됐다고 진술했음에도, 어림도 없다. 허위진술이란다.

같은 병원을 같은 시기에 들락날락했는데도, 하필 엇비슷하게 줄기세포 시술을 받았다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모르는 것이 무능하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몰랐다"라고도 말했다. 강심장이거나 세기의 '라이어'(거짓말쟁이, Liar)다.

하지만 평생 권력을 누리다 생애 말년에 맞이한 '운명'은 그의 편이 아닌 것 같다. 여기저기 그가 국정농단 사태에 개입한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 와중에, 새삼 김 전 실장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23일부터 IPTV로도 서비스를 시작한 영화 <자백>을 추천하는 바다. 무려, 김기춘 전 실장인 '주인공'인 영화다.

이 시국이라 더욱 봐야 하는 '김기춘 주연 영화'

어느 특정 한 장면이, 한 대사가 잊히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자백>도 그런 경우다. 전국 13만 관객을 돌파한 이 '국정원 간첩 사건' 소재 다큐멘터리는 특히나 2016년 11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우리에게 국가는, 정보기관은?"이라는 질문과 해답을 제시한다.

그래서 집중한 건 유우성씨 간첩조작 사건과 사망한 탈북인 한종수씨 사건이지만, <자백>이 지시하는 건 우리의 고통스러운, 이제는 작별을 고해야 할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역사다. 그렇게 무려 40년을 훌쩍 넘었다.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피해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트라우마 속에서 신음해야 했던 시간이.

중앙정보부와 안기부, 그리고 현재의 국정원까지 '간첩'을 '조작'해서 만들어냈던 이 '권력의 시녀'들은 버젓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역사의 산증인인, 그래서 더더욱 <자백>의 (말 그대로) 주인공은 단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일 수밖에 없다.

<자백>의 '잊히지 않는' 명장면도 물론 그의 몫이다.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한 검찰수사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인 지금, 이 장면은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최순실을 모른다던 김 전 실장의 얼굴을, 그 언행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싶다면 <자백>은 반드시 봐야 할 영화다.

"기억이 없습니다"

영화 <자백> 중 한 장면. 공항에서 김기춘 전 실장을 만난 최승호 PD.
 영화 <자백> 중 한 장면. 공항에서 김기춘 전 실장을 만난 최승호 PD.
ⓒ 아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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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모르는 일입니다."

영화 중반부, 공항에서 <자백>의 연출자인 최승호 PD를 만난 김기춘 비서실장. 그는 처음엔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더니, 이내 안면을 싹 바꾼다. 최PD가 "<뉴스타파>입니다"라고 소개할 때는 여유롭더니, 이내 과거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에 대해 묻자 모르쇠로 일관한다. 자리를 옮기는 김 전 실장을 최 PD는 끈질기게 쫓는다. 하지만, 김기춘 실장은 별 말이 없다. 

그에 앞서 <자백>은 김기춘 전 실장이 과거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시절, 간첩으로 몰아 고문을 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던 재일교포 이철씨의 사정을 조명한다. 1975년 11월, 김기춘 당시 대공수사국장이 직접 언론에 발표한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이철씨는 40년이 지난 2015년 2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40년 전, 20대 대학생이었던 그는 이제 초로의 노인이 돼 "당연히 무죄인데, 그래도 이 (무죄) 소리를 들을 때까지 40년 걸렸습니다"라고 한국의 법원 앞에서 감격스러워 했다. 반면, 그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당시 대공수사국장은 박근혜 정권의 '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군림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피해자는 그 40년을 하루도 잊지 않았는데, 수사를 발표한 이는 "기억이 없습니다"라고 일축한다. "기억이 없습니다"라니. 요즘 김 실장의 입에서 참 자주 나오는 말이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은 김 전 실장을 위해 최PD는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고, 간첩단 사건 관련해 김 실장이 직접 쓴 메모를 보여준다.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최PD에게 김 실장은 경직된 얼굴로 이런 말들을 간헐적으로 내뱉는다.    

"기억이 없습니다." "나는 간첩을 조작한 일이 없습니다." "사법부에서 한 일인데 저하고 관계없는 일입니다." "제가 수사한 적 없어요".

최승호 PD는 포기한 듯, 김 실장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전한다. 관객들이,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이 김기춘 전 실장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어두운 역사를 써내려간 공범으로서의 책임을 무겁게 져야 할 장본인이니까.

"그 당시 수사책임자였는데 모르실 이가 없겠죠. 그만큼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받으시는 겁니다. 질문에 답변할 의무도 있으신 거고요."

<자백>의 운명, 그리고 김기춘의 운명

11.22 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은 11.22사건을 직접 발표했다. 그는 뉴스타파의 당시 사건 취재와 관련해 "기억이 없다"고 변명했다.
 11.22 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김기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은 11.22사건을 직접 발표했다. 그는 뉴스타파의 당시 사건 취재와 관련해 "기억이 없다"고 변명했다.
ⓒ 뉴스타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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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에 허점이 드러나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정원은 뼈를 깎는 환골탈태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또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지난 2014년 4월 15일, 박 대통령은 <자백>이 다룬 국가정보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서 위와 같이 대국민사과를 했다.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하루 전이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JTBC <뉴스룸>이 보도한 대로, 남재준 국정원장 휘하의 국정원은 이후 '세월호 보고 문건'을 작성하고 국내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박 대통령도 이를 보고받고, 국정원이 건의한 내용을 국정 운영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자백>은 이러한 정황을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영화적으로' 파헤치며 현실을 환기시킨다. 지난 2014년 9월, 가장 최근 국정원이 간첩으로 조작하려다 실패한 탈북인 홍강철씨의 눈물과 이철씨의 억울함, 담당 현직 검사의 뻔뻔한 당당함과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 그리고 "기억이 없습니다"란 김기춘 전 실장의 부인을 생생하게 교차시키는 식이다.

"공항에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만난 것은 우연이다. 일본에서 40년 만에 간첩조작 피해자들이 모임을 갖는다고 취재를 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공항에서 마주친 거다.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자백>에는 우주의 기운이 서려있는 것 같다."

최근 한 관객과의 대화에서 최승호 PD는 김 전 실장과의 조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역시나 <자백>이 방점을 찍는 이 찍히는 것은 당연히 김 전 실장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운명'은 최승호 PD의 운명이라기보다 김기춘 실장의 운명에 가까워 보인다.

"박근혜만큼 사악한 인간, 단연코 김기춘"

지난 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위원장 정홍원 전 총리) 출범식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비선실세' 최순실 등 현안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있다.
▲ 기자들 피해나가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지난 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위원장 정홍원 전 총리) 출범식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비선실세' 최순실 등 현안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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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졌듯이, 김 전 실장은 이례적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박근혜 정권까지 근저에서 보필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그 40여 년 동안, 그는 수많은 간첩을 조작하고, 법무부장관 시절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을 진두지휘했으며, 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박근혜 정권의 실세로 국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를 알았든 몰랐든, 그는 국민 앞에서, 역사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다.

어느 때보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일치단결해 김 전 실장에 대한 책임론과 분노를 거세게 표출하고 있다. 김 전 실장의 운명이 박 대통령이 그리도 예찬했던 '우주의 기운'을 받아 어디로 향하는지 전 국민이 지켜보는 중이다. 우선적으로, 우리가 그의 선택적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백>에서 과거를 전면 부인하던 그의 뻔뻔함을, 우리는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또 그의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독해질 필요가 있다. 최근 서거 1주기를 맞은 고 김영상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SNS를 통해서 피력한 김 전 실장에 대한 소견은 그래서 경청할 만 하다.

"박근혜 못지않게 사악한 인간을 거론한다면 단연코 김기춘이다. 박정희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정권의 기초를 만들고 민주인사들을 악랄하게 탄압한 당시 중앙정보부의 핵심책임을 맡다가 현 정권의 최고실세로 군림하면서 저지른 악행의 실체를 이번에는 반드시 밝혀야 한다."


태그:#김기춘, #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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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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