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흥사로 들어가는 누각 신성루의 모습. 신성루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군 지휘소였다. 물론 정면 현판은 ‘含月山(함월산) 新興寺(신흥사)’이고, 임란 당시 병마절도사였던 이상국(李相國)이 쓴 ‘神成樓(신성루)’ 현판은 건물 뒤편에 걸려 있다.
 신흥사로 들어가는 누각 신성루의 모습. 신성루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군 지휘소였다. 물론 정면 현판은 ‘含月山(함월산) 新興寺(신흥사)’이고, 임란 당시 병마절도사였던 이상국(李相國)이 쓴 ‘神成樓(신성루)’ 현판은 건물 뒤편에 걸려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신흥사'라면 설악산이 대뜸 떠오른다. 나라 안 곳곳에 같은 이름의 신흥사가 많이 있지만, 다른 신흥사들은 결코 역사적 또는 정서적으로 설악산 신흥사만큼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설악산 신흥사는 652년(진덕여왕 6)에 창건된, 말 그대로, 고찰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기성 세대들이 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을 가서 한 번씩 둘러본 바 있는 추억의 절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고2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신흥사를 보았다. 그러나 신흥사를 둘러본 그날 이후 내 기억에 남은 신흥사는 없다. 물론 그것은 신흥사 탓이 아니라, 교육과정의 일부인 수학여행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회성 행사로 전락시켜버린 우리나라 교육의 비교육적 관행 때문이다. 나라 안 모든 학교들이 하나같이 그러했으니 어떤 단위학교만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교육 자체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임진왜란 울산의병의 자취가 서린 함월산 신흥사

신흥사의 새로 지은 대웅전
 신흥사의 새로 지은 대웅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나는 설악산 신흥사보다 함월산 신흥사가 훨씬 교육적 의미를 지닌 사찰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월산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 성싶다. 물론 함월산 신흥사에 깃들어 있는 선조들의 국사를 들은 적 있는 이는 더욱 없을 듯하다. 함월산, 울산에 있고,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의병들이 왜적에 항거하여 목숨과 피를 바친 민족정신사의 현장이다.

함월산 신흥사는 설악산 신흥사와 이름이 다르다. 설악산 신흥사는 1995년 이전까지 한자로 신흥사(神興寺)였다. '설악산 신흥사(神興寺)'가 '설악산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바꾼 것은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다.

사찰 이름이 향성사 또는 선정사일 때 이 절에는 자주 불이 났다. 그런데 하루는 절을 새로 일으키려는 고승들의 꿈에 백발의 신인(神人)이 나타나 '앞으로 영원히 화를 당하지 않고 줄곧 번창만 할 사찰 터를 알려 주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1644년(인조 22) 이래 신흥사(神興寺)가 되었다.

그러던 중 불교방송, 노인복지회관, 어린이집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새 신(新)'을 써서 신흥사(新興寺)로 개명하라는 요구가 많아졌다. 이것이 바로 '설악산 신흥사(神興寺)'가 '설악산 신흥사(新興寺)'로 바뀐 내력이다.

신흥사 전경
 신흥사 전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함월산 신흥사는 다르다. '함월산 신흥사(神興寺)'가 '함월산 신흥사(新興寺)'로 바뀐 것이 아니다. 본래 건흥사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신흥사가 되었다.

울산광역시 북구 대안4길 280(대안동), 이렇게 소재지를 소개하면 도시 안의 사찰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신흥사는 신인(神人) 운운의 신비성과 전혀 관계없는, 오롯한 호국(護國, 나라를 지킨) 산사일 뿐이다. 울산광역시가 함월산 기령 정상부의, 신흥사 들어가는 산길 입구에 '울산 어울길'의 일환으로 세워둔 안내판을 읽어보자. 

'신흥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명랑조사가 세웠던 건흥사였다고 하며, 신라가 관문성을 쌓는 동안 승병 100여 명이 이 절에 기거하였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신흥사의 승려들은 기박산성의 울산 의병과 함께 적과 싸웠는데, 당시 왜적의 방화로 법당과 승방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후 인조 24년(1646) 경상좌병마사 이급이 다시 절을 세워 비로소 신흥사라고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고종 8년(1871) 경상좌병마사 윤선응이 신흥사에 진을 설치하고 보루를 쌓아 신흥별장(新興別將)이라는 별장을 두었다는 기록과, 1872년에 제작된 신흥산성도(新興山城圖)에 신흥사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신흥사의 호국성(護國性)은 신라 이래 줄곧 이어져 오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흥사 구(舊) 대웅전은 웅진전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치도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서 구(舊) 삼성각 터로 옮겨진 특이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요약하면, 신라 때부터 호국 사찰이었던 신흥사는 임진왜란 때도 왜적과 싸웠고, 전쟁 과정에 불 타 새로(新) 지었으며(興), 그래서 신흥사로 불리게 되었다. 다시 건축한 대웅전 말고 본래 있던 대웅전은 문화재자료 9호로, 웅진전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신흥사 신성루의 현판.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병마사 이상국의 글씨이다. 신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승려 100명이 군량미 300석을 가지고 기박산성의 일반 의병에 합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흥사 신성루의 현판.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병마사 이상국의 글씨이다. 신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승려 100명이 군량미 300석을 가지고 기박산성의 일반 의병에 합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신흥사의 임진왜란 관련 역사는 '울산의 충의정신 편찬위원회'가 2005년에 펴낸 <울산의 충의정신>이 잘 설명해준다. 이 책 54쪽은 '신흥사에는 대웅전 밑에 신성루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 터는 옛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을 지휘 감독했던 군사령부의 건물이 있던 장소이다. 현재 이 건물에는 신성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병마절도사를 지냈던 이상국이 직접 쓴 것'이라면서 '신흥사는 임란 때 울산 지역 일대에 있었던 승병을 지휘했던 군사령부의 역할을 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또 '승병 훈련은 절터 앞쪽 정상에 있는 기박산성에서 이루어졌다. 임란이 일어난 지 약 한 달 뒤인 1592년(선조 25) 5월 15일에 신흥사 스님 지운이 승군 100여 명을 동원해 사찰 양식 300섬을 기박산성으로 실어 갔다. 이 양은 이곳에 있는 군인들의 한 달분 식량이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라고 전해준다.   

신흥사 승병들, 군량미와 병력을 울산의병에 보탰다

신흥사의 구(舊) 대웅전 / 지금은 웅진전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붙어 있다.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문화재이다.
 신흥사의 구(舊) 대웅전 / 지금은 웅진전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붙어 있다.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문화재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승병들이 군량미만 전달하고 그냥 돌아섰을 리가 없다. 이 책 225쪽의 '울산 의병 주요 활동 일지'에는 '신흥사의 승려 지운(知雲)이 승병 100여 명과 군량 300여 석을 가지고 기박산성 의병진에 합류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흥사 가는 길은 울산광역시 북구 동해안로 1769 울산교육수련원 부근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접근하면, 경주 감은사 석탑과 문무대왕암을 둘러본 뒤 동해안을 타고 내려왔다가 울산교육수련원 인근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는 길이니 일반적인 여행자의 답사 여정과도 무난하게 어울린다.

그뿐이 아니다. 이 길에는 좁은 산길을 오를 때에만 맛볼 수 있는 호젓한 적막감이 아련하게 깃들어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 매곡동과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관성해수욕장을 잇는 기령(旗嶺)고개 정상부까지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올랐다가 거기서 다시 신흥사를 찾아 내리막을 가는 길에서는 도저히 만끽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정취가 가득 넘쳐난다.

신흥사에 닿아 사찰로 올라가는 까마득한 계단, 그 계단을 덮고 있는 여러 빛깔의 연등들, 높이 21m에 둘레 5.22m를 뽐내는 400년 된 회화나무를 지나, 임진왜란 당시 승병군 지휘소였던 신성루를 바라본다. 물론 정면 현판은 '含月山(함월산) 新興寺(신흥사)'이고, 임란 당시 병마절도사였던 이상국이 쓴 '神成樓(신성루)' 현판은 건물 뒤편에 걸려 있다. 힘찬 장군의 글씨를 감상한 뒤 대웅전 왼쪽으로 접어든다.

'대안동 신흥사 구(舊) 대웅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9호

이 건물은 본래 건흥사의 대웅전으로 선덕여왕 4년(635) 명랑법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임진, 정유재란 때의 건흥사는 울산 지역에서 승군을 동원한 유일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울산 지역 의병 활동의 거점이 되어 병화(兵火,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인조 24년(1646)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급이 그 자리에 다시 세워 신흥사라 하였다.

1988년 신흥사의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원래의 대웅전은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으며, 그때부터 '구 대웅전'이라 하였다. 신흥사 구 대웅전은 팔작지붕(옆에서 볼 때 八자처럼 보이는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기둥 위에 올린 2익공(翼工, 기둥머리에 붙어 보를 받치고 있는 장식으로, 새 날개 모양을 하고 있다)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 등 건물 전반에 걸쳐 조선 후기 사찰 건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내부 천정의 화려한 단청은 높은 예술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웅진전(雄眞殿)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웅진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지만 이 절집은 본래 신흥사의 대웅전이었다. 그래서 건물 왼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의 글에는 '대안동 구(舊) 대웅전'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안내판은, 웅진전이 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데에는 기둥과 지붕 사이의 익공에 새겨져 있는 연꽃 조각과, 내부 천정의 화려한 단청이 크게 기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연히, 익공과 단청을 눈여겨 살펴볼 일이다.

기령 정상부는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주차를 한 뒤 ‘기령’ 빗돌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커다란 바위에 ‘建竪(건수, 세움)’라는 제목을 한 네모꼴 명문(銘文, 돌에 새긴 글)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사람 이름이지만, 일부는 신흥사 등 단체명이다. 이곳에 공원을 꾸미고, ‘기령’ 빗돌을 세우는 데에 마음과 힘을 보탠 이들을 돌에 기려 새겨둔 것이다.
 기령 정상부는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주차를 한 뒤 ‘기령’ 빗돌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커다란 바위에 ‘建竪(건수, 세움)’라는 제목을 한 네모꼴 명문(銘文, 돌에 새긴 글)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사람 이름이지만, 일부는 신흥사 등 단체명이다. 이곳에 공원을 꾸미고, ‘기령’ 빗돌을 세우는 데에 마음과 힘을 보탠 이들을 돌에 기려 새겨둔 것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신흥사 관람을 마치고 다시 산 위로 발길을 재촉한다. 낮인데도 숲이 짙은 탓에 길이 어둡다. 게다가 산불 진압 등을 목적으로 개설된 숲 사이 임도(林道)인 까닭에 길은 구불구불하고 좁은데다, 문득문득 '이제 길이 끊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불안한 길이다.

그 길을 1.7km 올라간다. 길 끝에 기령, 우리말로 기백이재가 나타난다. 포장도로는 울산 북구 매곡동과 경주 양남면을 잇는다. 기백이재라는 이름은 고개 정상에서 북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는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유래되었다. '旗嶺(기령)' 두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커다란 빗돌이 사람을 잡아당긴다.

매년 4월 23일, 의병추모제 열리는 기령

기령 정상부의 '旗嶺' 빗돌. 임진왜란 유적지임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매년 4월 23일 이곳에서는 의병추모제가 열린다.
 기령 정상부의 '旗嶺' 빗돌. 임진왜란 유적지임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매년 4월 23일 이곳에서는 의병추모제가 열린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빗돌 옆에 안내판이 있다. 울산광역시 북구청이 '기박산성 의병제'라는 제목으로 세워둔 안내판을 읽어본다. 안내문의 앞부분은 '기박산성은 관문성과는 별도의 성으로 동쪽으로는 산세의 경사가 완만하여 왜구의 방어에 적절한 곳이며, 남쪽은 울산 동해 일원 및 서쪽으로는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 지역 일대를 동시에 관망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다. 신라 33대 성덕왕 21년(722) 10월에 쌓은 성으로, 삼태봉의 산마루를 둘러싼 포곡식(包谷式)이며 길이는 약 1.8km나 된다. 이 성의 특이한 점은 홍수를 대비하여 배수구 3곳 및 성돌 하단부에 명문석(銘文石)이 10여 개 발견되어 학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라는 내용의 기박산성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 기박산성이 '임란 때 울산 선비 18인이 나라의 위란(危亂)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하늘에 맹세하며 처음 결진편대(結陣編隊, 군대를 조직)하였던 곳'이라는 임진왜란 관련 유적지로서의 소개, '이와 같은 공신의사(功臣義士)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하여 울산광역시 북구문화원 병살 북구향토문화연구회에서 주최하여 매년 4월 23일에 이곳에서 의병추모제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라는 추모제에 대한 언급이 뒷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안내문의 '이곳'은 기박산성이 아니라 '기령' 빗돌이 세워져 있는 정말 이곳을 가리킨다. 이곳 기령 정상부는 예로부터 동해에서 출발한 왜적들이 울산과 경주로 쳐들어올 때 지나가던 침입로이므로, 의병들을 추모하는 큰 행사를 펼치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2000년에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기령' 빗돌도 세웠다. 

울산과 경주 사이의 고개 기령(기백이재) 정상에는 '旗嶺' 두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빗돌이 서 있다. 2000년 이곳에 공원이 꾸며지면서 건립된 빗돌이다. 매년 4월 23일이면 이곳에서는 의병추모제가 열린다. 인근의 신흥사와 기박산성이 임진왜란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울산과 경주 사이의 고개 기령(기백이재) 정상에는 '旗嶺' 두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진 빗돌이 서 있다. 2000년 이곳에 공원이 꾸며지면서 건립된 빗돌이다. 매년 4월 23일이면 이곳에서는 의병추모제가 열린다. 인근의 신흥사와 기박산성이 임진왜란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주차를 한 뒤 '기령' 빗돌을 바라볼 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커다란 바위에 '建竪(건수, 세움)'라는 제목의 네모꼴 명문(銘文, 돌에 새긴 글)이 붙어 있다. 주로 사람 이름이지만, 일부는 신흥사 등 단체명이다. 이곳에 공원을 꾸미고, '기령' 빗돌을 세우는 데에 마음과 힘을 보탠 이들을 돌에 기려둔 명문이다. 그런데 몽땅 한자로 되어 있어 아이들이 읽지 못할까 걱정된다.

그래서 '建竪 姜聲君 姜錫求 張龍三 梁正培 王三郞 鄭二大 李鐘赫 李季洛 李錫泳 李壽煥 李敬洛 李鍾極 李東烈 李朔不 李敬豪 許宰赫 徐弘俊 兪東一 兪炳泰 崔鍾壽 崔同翰 崔鎭千 崔鎭一 崔鍾仁 辛柱演 辛台演 尹在相 高珍鎔 高正鎔 高成鎔 高泰峰 高斗鎔 金元讚 金周烈 金炫東 金潤浩 金千烈 金壽憲 金準鉉 林海生 林福植 林炳煥 朴高東 朴日東 朴俊釿 朴基守 朴洙福 朴辰東 朴千東 郭進洪 郭憙正 新興寺 念佛菴 藥西菴 靑龍菴 농소1동청년회 농소육우회 북구해병전우회 북구향토문화연구회 협신건설(崔載根) 歲在紀元二千年正旦 朴輝東 謹識'로 되어 있는 원문 중에서 사람 이름만 추려 다시 가나다 순으로 배치하여 이 글 안에 싣는다.

바위에 새겨져 있는 명문을 사진으로 찍어 와 판독한 후 '강석구 강성군 고두용 고성용 고정용 고진용 고태봉 곽진홍 곽희정 김수헌 김원찬 김윤호 김주열 김준현 김천열 김현동 박고동 박기수 박수복 박일동 박준근 박진동 박천동 박휘동 서홍준 신주연 신태연 양정배 왕삼랑 유동일 유병태 윤재상 이경락 이경호 이계락 이동열 이삭부 이석영 이수환 이종극 이종혁 임병환 임복식 임해생 장용삼 정이대 최동한 최종수 최종인 최재근 최진일 최진천 허재혁' 식으로 가나다 순 재배치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4월 23일의 의병추모제에 맞춰 기령을 찾을 만큼의 정성은 없으므로, 이 정도 노동을 바치는 것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신흥사와 기백이재 일원에서 순국한 의병들께 절을 대신하려는 것이다.

선열을 추모하는 현대인들도 칭찬받을 만하다

어느덧 고개 가득 어둠이 밀려오고 있다. 신흥사까지는 1.4km이지만 밤에도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울산시 북구 매곡동 쪽은 아파트와 상가들이 뿜어낸 불빛으로 언뜻 환하다. 그래도 여기서 산 아래 이화초등학교까지는 4km나 된다. 과연 신흥사와 기박이재는 창의를 도모할 만한 깊은 산속이다.

기령 정상부에서 내려다 본 울산광역시 북구 매곡동 방면의 초저녁 풍경
 기령 정상부에서 내려다 본 울산광역시 북구 매곡동 방면의 초저녁 풍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신흥사, #기령, #기박산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