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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켜온 흥농기계사 전경.
 8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켜온 흥농기계사 전경.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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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에 이 일을 시작했다. 시나브로 48년이 지났다. 이 자리에서 그에게 기술을 가르친 고 이선근 사장이 처음 간판을 건 지는 약 80년이 지났단다.

그 때 그 간판 그대로 흥농기계사(충남 예산군 예산읍 오리동)는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호가 전하는 의미도 깊다. 기계사 앞에 '흥농' 즉 농업이 흥하는 뜻글을 달았으니 1차 산업과 2차 산업의 만남이다.

대장간에서 한층 더 진화된 단계라고 할까. 예산이 전형적인 농업군인 만큼 처음 공업사 문을 열 때 농업과 관련된 공작물 기계제작 및 수리 일감이 많았음을 짐작케 한다.

큰기업에서 농업용 기계들을 쏟아내기 전에는 외국기계를 본따고 어깨너머로 배워 만든 많은 농업용 기계와 철구조물들이 이곳 흥농기계사를 거쳐갔을 것이다.

40여년 전 흥농기계사에서 기술을 배우려고 일한 젊은이만 여남은 명이나 됐다. 대부분 인근 시골에서 멀리 대처로 떠나지는 못하고 누구누구 소개를 받아 온 젊은이들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배운 기술

박승도 사장이 기계제작에 열중해 있는 모습.
 박승도 사장이 기계제작에 열중해 있는 모습.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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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판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다.
 철판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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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먹고살기 위해 오로지 기술 하나 배우겠다고 변변한 월급도 없이 고된 철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젊은이 중에 지금의 흥농기계사 사장인 박승도(68)씨도 끼어 있었다.

"홍성 금마가 고향인디 스무살에 농사일 집어치고 여기로 왔슈. 농사말고는 딴 거 할 게 없으니께 기술 하나 배우겠다고 온 거쥬."

지난 25일 공업사 마당에서 기계제작에 열중해 있는 박사장에게 이것저것 묻자 한참을 뜸들이고 나서야 겨우 얻어들은 첫마디다. 종이도 아닌 쇳덩이를 깎고, 오리고, 붙이고, 그렇게 이 일 한 분야만 오롯이 48년을 했다니 실력이 철공 장인 수준에 도달했을 것 같다.

처음 철 일을 배우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연도 깊고 고생도 많았을 텐데 박사장은 참 말수가 적다.

"뭐 별거 있간유" 하고 슬쩍 웃으면 그게 끝이다.

"기술이 좋으니 인정도 많이 받고 일도 많았겠다"고 물으면 "예산에서는 그냥 한다고 해유" 이런 식이다.

설계도면은 머리 속에

박 사장이 화물운반용 엘리베이터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박 사장이 화물운반용 엘리베이터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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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농기계사 안에 선반이 있는 풍경.
 흥농기계사 안에 선반이 있는 풍경.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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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를 제작하고 수리하는 일이 대부분 혼자서 하는 일이니 자연스럽게 말수가 적어진 것이 아닐까.

그는 지금 화물운반용 엘리베이터를 주문받아 제작 중이다. 쇠를 자르고 용접을 해 붙이고 구멍을 뚫어 나사로 조이고 도르래를 달고 하나씩 하나씩 머리 속에 설계한 대로 작업이 척척 진행된다. 간간이 일손을 멈추고 뭔가를 골똘이 생각하고 그러다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부속을 꺼내오고…. 그렇게 쉴 틈이 없다.

공업사 안은 한마디로 정신이 없다. 40여년 전에 중고로 장만했다는, 쇠를 깎는 선반이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 사려면 한 2000만 원 한다고 하니 공업사에서 가장 비싼 기계다.

나머지 공간은 드릴을 비롯한 각종 기계와 부속들로 발들이밀 틈이 없다. 그래도 박사장은 필요한 연장과 부속들을 바로바로 찾아낸다. 우리 눈에는 정신없어 보여도 가게 안의 물건들이 그만을 위한 질서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도면 한 장 없이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제작하냐"고 물으니 "그냥 생각해서 하면 돼유. 오래 했으니께"라고 혼잣말 하듯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흥농기계사에서는 쇠로 만드는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못만드는 게 없다. 공작용 철구조물에서 장작을 때는 작은 난로까지 뭐든지 주문만 하고 기다리면 된다.

예산에서 한 때 돈을 잘 벌었던 제일함석공장과 한일함석공장의 함석을 접는 기계도 박사장이 제작했다. 한참 경지정리 할 때는 배수문 제작도 전문으로 맡았다.

흥농기계사를 창업한, 솜씨가 좋았다는 1대 사장에게 기술을 배우고 공업사를 인수받아 터를 지킨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남매를 낳아 대학까지 가르쳤고 아들은 공무원이 됐다. 또 지금의 건물도 번듯하게 지어 올렸다. 살아오면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였는지 말을 아꼈지만 아마도 그 때였을 게다.

"지금은 기계가 다 만들어져 나오는 세상이니께 제작할 일이 거의 없지유. 그냥 쫄뜨락쫄뜨락 소일거리나 하는 거지"

그렇게 어렵게 배웠고 40여년 동안 노하우를 쌓은 박 사장의 기술을 지금은 이어 받을 사람이 없다. 시대가 변했고 수도 없이 많았던 공업사들은 일찌감치 문을 내렸다.

예산읍 오리장벌 한복판에서 시대변화에 맞서며 유물처럼 남겨진 흥농기계사도 언제가는 쇠 자르는 소리가 멎을 것이다. 박사장은 "그냥 힘 쓸 수 있을 때까지만 하고 그만 둘라구"라며 보일 듯 말 듯 웃어보였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흥농기계사, #공업사, #기계제작, #역사,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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