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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반석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반석평은 노비였으나 전직 재상의 주인 마음에 쏙 들었다.
  • 주인은 그에게 학문을 허용했는데, 이후 그를 광주 반씨 반서린의 양자로 들이게 했다.
  • 반석평은 승승장구했다. 중종 때에 이르러 병마절도사, 관찰사에 이어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 반석평은 경우에 따라 2017년 12월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할 수도 있다. 그의 15대손이 바로 반기문 UN사무총장이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15일 새벽,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 강동구 상일 IC를 통해 서울외곽순환도로에 진입했다. 이 도로를 거쳐 중부고속도로와 평택제천고속도로를 지나 충북 음성군에 답사를 가기 위해서였다. 반석평(?~1540)이라는 조선 전기 인물의 묘소를 촬영하는 게 이 답사의 목적이었다.

반석평은 우리 시대 사람들한테는 다소 낯설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한테는 어느 정도 유명했다.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입지전적 출세 때문에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인물이 2017년 12월 하순 이후로 꽤 유명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참고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알아둘 만한 인물이다.  

그런데 집에서 출발할 때는 마음이 가벼웠지만, 고속도로에서는 내내 긴장해야 했다. 새벽이라 아직은 어두운 데다가, 안개가 너무 심해서 가시거리가 100미터가 될까 말까한 구간들이 있었다. 그렇게 긴장하며 달린 끝에, 아침 일찍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산 4-1에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이 정확히 산 옆에 와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라고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곳은 무덤 올라가는 입구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무덤 가는 길을 찾느라 산을 두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다가 겨우 길을 찾아냈다. 하긴, 내비가 목적지까지만 데려다 주면 됐지, 무덤 입구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줄 능력은 없다. 이런 인간사까지는 그의 소관이 아닐 것이다.

하노리 산 4-1의 무덤군.
 하노리 산 4-1의 무덤군.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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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리 산 4-1에는 반석평 무덤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이곳은 광주 반씨 장절공파 묘역이다. 묘역에는 총 8기의 무덤이 있다. 산의 경사면에 수직으로 길게, 반씨들의 무덤군(群)이 조성돼 있는 것이다.

무덤군이 바라보는 방향은 서북쪽인 듯했다. 음성군의 중심지인 음성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덤군이 바라보는 그 방향에 반석평의 후손 중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의 생가가 있다. 그 유명인의 이름과 생가의 사진은 기사 맨 뒤에 나온다.

위아래로 형성된 무덤군에서 반석평의 아버지인 반서린의 무덤이 가장 위에 있고, 바로 아래 반석평의 묘소가 있다. 그 밑에는 후손들의 무덤이 있다. 무덤군 안에서 반석평이 서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반석평은 무덤 내에서 부인 박씨와 함께 잠들어 있다. 부부 합장묘인 것이다. 이 합장묘의 양 옆으로 무덤이 두 개 더 있다. 또 다른 부인들인 이씨와 조씨가 양쪽에 각각 모셔져 있다.

반석평의 무덤은 본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이곳에 반씨 집안의 무덤들이 있기는 했지만, 반석평의 무덤은 없었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묻혀 있었다. 아버지 반서린은 전북 옥구군 회현면에 모셔져 있었다. 1999년 후손들이 반서린과 반석평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함으로써 반석평 부자의 혼령이 여기서 함께 자리를 하게 된 것이다. 

반석평은 누구인가

반석평 무덤.
 반석평 무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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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평은 상당히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불법이 약간 섞여 있기는 했지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부러워할 만한 대상이었다. 반석평 역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얼마 안 있어 입에 금수저를 바꿔 물고 출세가도를 달렸기 때문이다. 무덤 묘비에 형조판서란 직함이 적힌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장관급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조선 전기인 성종 임금 때 태어나 연산군 시대를 거쳐 중종시대까지 살았던 그는 원래 반씨가 아니었다. 반씨는 입양된 이후의 성씨다.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광해군 측근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그는 전직 재상을 주인으로 모시는 노비 집안의 아이였다.  

주인인 전직 재상은 반석평을 노비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다. 좋은 주인이었던 것이다. 주인은 반석평의 영특함에 특히 주목했다. 그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노비 주인으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전직 재상은 반석평이 자기 아이 및 조카들과 똑같은 자리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주인이 반석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자기 아이들이 있는데도 노비의 학업을 열심히 후원한 것은, 어쩌면 자기 아이들이 공부를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 자녀들한테서 얻지 못한 만족감을 반석평한테서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겠지만, 그런 내적 계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추론이 아니라는 것은 잠시 뒤 증명된다.

반석평에 대한 주인의 후원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주인은 반석평한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했다. 일종의 신분세탁이었다. 주인은 반석평을 아들 없는 부자인 반서린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반씨가 된 것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에 올라와 있는 '중종실록에 이름남긴 노비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웹툰(글 ·그림 유환석)
 문화재청 누리집에 올라와 있는 '중종실록에 이름남긴 노비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웹툰(글 ·그림 유환석)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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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평 묘비.
 반석평 묘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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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의 부자는 일반적으로 지주였다. 농업경제시대였던 당시, 지주 계층은 지금의 기업체 사장과 비슷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자기 밑의 관리인들을 동원해서 예하의 소작농들을 통솔하는 농업 기업의 장이었다.

전직 재상은 반석평을 그런 집의 양자로 보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보내서 반서린의 가업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반서린의 지위가 지금의 기업체 사장과 비슷했으니, 반서린의 후계자가 되면 그 기업의 '대권'을 승계하게 되는 셈이었다. 전직 재상은 반석평이 대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영입'을 알선해준 셈이 된다. 아무런 기반도 없어 독자적으로는 도저히 대권을 차지할 수 없는 반석평에게 엄청난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이 입양은 정식 절차를 거친 게 아니었다. 조선시대 입양은 문중의 일원 중에서 항렬이 낮은 아이를 아들로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석평은 반서린의 문중 일원이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집안의 노비였다. 그래서 이 입양은 사회관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전직 재상과 반서린이 반석평의 원래 신분을 숨긴 것 같다. 훗날 반석평의 신분이 정부 차원에서 문제된 것을 보면, 입양 절차가 합법적이고 매끄럽지 못했던 것 같다.

승승장구한 반석평... 몰락한 후원 재상

공부하는 아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공부하는 아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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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차상의 하자가 있기는 했지만, 반석평은 전직 재상의 기대와 후원에 충분히 부응했다. 그는 연산군 정권 후반기인 1504년에 과거시험 소과에 급제해 생원 자격을 얻고 중종 때인 1507년에는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하는 영예를 안았다.

반석평의 출생 연도가 1472년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대과에 급제할 때 나이가 26세였다는 말이 된다. 과거시험 대과의 평균 급제 연령이 37세 정도였으니, 상당히 빠른 급제였다. 노비가 신분상의 약점을 숨기고 시험공부를 하게 되면 가슴 한구석이 항상 긴장됐을 텐데, 그런 핸디캡을 안고도 남들보다 11년이나 빨리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은 상당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관직에 진출한 반석평은 중종시대에 병마절도사(도 사령관)와 관찰사에 이어 장관급인 공조판서를 지내고 묘비에 적힌 대로 형조판서도 지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도 있다. 최종 관직은 역시 장관급인 지중추부사였다. 노비로 태어나 신분을 숨긴 채 남의 집 양자로 살면서 이 정도 관직에까지 올랐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반석평은 승승장구했지만, 그를 후원하고 부잣집 양자로 '영입'시켜준 전직 재상 쪽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 집에서는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 재상집 아이들은 공부를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녀들한테서 얻기 힘든 만족감을 느끼고자 재상이 반석평을 더욱 더 열심히 후원했는지도 모른다.

반석평을 열심히 후원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해서 그랬는지, 그 후로 그 집은 전반적으로 기울어갔다. 그렇게 가세가 기울다가, 재상이 죽은 뒤에는 경제적으로 쪼들리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하층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반석평의 15대손, 우리가 아는 그 사람

거기다가 재상집 식구들은 이따금씩 가슴 찌릿한 감정도 느껴야 했다. 가끔씩 길에서 반석평과 부딪혔던 것이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한번은 길을 가다가 반석평이 차관급 이상이나 탄다는 초헌(외바퀴 수레)을 타고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모습을 봤다.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과 대조됐으니, 그 심정이 매우 참담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반석평은 의리를 잊지 않고 예를 다했다. 한번은, 길이 진흙탕이었는데도 반석평이 초헌에서 얼른 내려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고맙기도 했겠지만, 자신들이 하층민이 돼 있었으니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장인 전직 재상이 좀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반석평 후원해줄 시간에 자신들을 후원해줬더라면 자기들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투덜거렸을 수도 있다. 

이렇게 반석평 입양은 전직 재상집한테는 별로 득이 되지 않았다. 그 뒤로 그 집안의 앞날에는 안개만 자욱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 집안은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가시거리 100미터가 될까 말까한 곤란을 겪기까지 했다. 나중에 반석평의 주선으로 주인집 아들이 무시험 특채로 관직을 얻기는 했지만, 반석평이 거둔 성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그 입양을 계기로 반석평과 그 후손들은 주인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됐다. 후손들이 사대부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다가 대한민국 시대 들어서는 유엔 사무총장까지 배출했기 때문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반석평의 15대손이다. 앞에서, 반석평의 무덤이 향한 곳에 있다고 한 생가가 바로 반기문 총장의 생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생가.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생가.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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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석평, #반기문, #광주반씨, #연산군, #UN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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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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