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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산을 노래한 정기연의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가 옥수사 입구에 있다.
 성암산을 노래한 정기연의 시가 새겨져 있는 시비가 옥수사 입구에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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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 사람들은 예로부터 성암산을 진산(鎭山, 지역민을 지켜주는 산)으로 여겨왔다. 대구시와 경계선을 이루는 성암산은 도시의 서쪽을 아늑하게 에워싸고 있어 찬바람과 뭉게구름을 막아준다. 그렇지만 해발 469m로 심하게 높지는 않아 수정사 대웅전 왼쪽에서 출발하는 산길로 오르면 약 40분만에 정상에 닿는다. 당연히 시민들의 정겨운 발길이 사시사철 이어진다.  

성암산은 조선 시대에도 지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이는 옥수사 입구의 '성암산 사시(四時)'와 '덕등절구(德嶝絶句)' 시비가 잘 증언해준다. 2004년에 건립된 이 시비는 '초계 정공 휘 동민지묘', 즉 초계정씨인 정동민(鄭東珉) 공의 묘소 앞에 있다.

시의 작가는 정동민 공의 차남인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 1877∼1952)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경산시 옥곡동 성암산 자락 우경재(寓敬齋)에 은거했던 정기연은 <탁와집> 등 11권의 저서를 남긴 유학자인데, 앞의 두 편 외에 '성암칠절(七絶)'도 지어 성암산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옥수사 입구에서 읽는 '성암산 예찬' 시 두 편

'성암칠절' 시비는 우경재 상재문(桑梓門) 앞에 있지만, '성암산 사시'와 '덕등절구'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두 편을 천천히 읽으며 성암산의 아름다움을 느껴본다.

봄 꿩은 다퉈 오르고 햇빛은 언덕을 태우네(春雉競升日煮岡)
여름 소는 풀밭에서 돌아갈 일을 잊었구나(夏牛忘返草平場)
가을 바위 달빛 아래 서리 내려 더욱 희고(秋巖月色霜加皓)
겨울 골짝 솔잎은 눈을 이고 다시 푸르네(冬壑松髥雪更蒼)

성암산을 모르는 사람도 '성암산 사시'를 읽으면 저절로 성암산 둘레를 한번 걸어보고,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다녀보고 싶은 마음에 젖는다. 산 자체를 직접 거론하지 않지만 시인은 사계절에 걸쳐 성암이 머금은 정취를 아늑한 목소리로 전해준다.

정기연 가문의 재실 우경재
 정기연 가문의 재실 우경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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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꿩들이 '다투어' 날아오른다. 시인은 춘치경승(春雉競升) 네 글자만으로도 따사로운 봄의 정경을 훌륭하게 형상화하여 독자의 가슴을 오롯이 울려준다. 꿩들이 '다투어' 오른다는데 사람이 더 이상 무엇을 상상할 것인가. 물론 '햇빛이 언덕을 태운다' 역시 평범한 표현이 아니다. 아지랑이가 햇살 아래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정경을 묘사한 이 구절 또한 말 그대로 절창이다.

시인은 여름철에도 감정이입(感情移入, 사물을 통해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는 표현법) 기법으로 성암산의 정경을 절묘하게 그려낸다. 소가 집으로 돌아갈 일을 잊었다고 말한다. 어디 소뿐이랴. 성암산에 들어 녹음을 즐기던 숱한 사람들 또한 저녁 어스름이 밀려와도 귀가를 잊은 채 숲속에서 제각각 한 그루 나무가 된다.

그렇게 집을 잊었으니 시의 3행은 밤을 노래하게 된다. 달빛이 교교하다. 산 곳곳에 있는 바위들 위로 달빛이 쏟아진다. 게다가 서리까지 내렸다. 바위는 더욱 하얀 빛깔을 뿜어낸다.

가을을 노래한 3행의 하얀 빛은 4행의 눈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시인은 범상한 보통 사람들처럼 재차 백색을 말하지 않는다. 겨울에 내린 눈은 흰색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하늘에서 왔다고 말한다. 본디 푸른빛이었지만 흰 눈을 안은 솔잎은 '다시' 푸르게 살아난다. 물론 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주체는 사람이다.

정기연 가문의 고가 우경재에서 바라본 옥곡동의 풍경. 도시화가 크게 진행된 지금도 넓은 들판이 많이 남아 있어 옥곡동의 지난 날 영화를 엿볼 수 있다.
 정기연 가문의 고가 우경재에서 바라본 옥곡동의 풍경. 도시화가 크게 진행된 지금도 넓은 들판이 많이 남아 있어 옥곡동의 지난 날 영화를 엿볼 수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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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암산은 '덕이 있다(有德)'고 할 만하다. 시인은 시비  뒷면에 새겨져 있는 다른 작품 '덕등절구'의 1∼2행을 통해 '성암산에는 덕이 있다 하여 / 덕등(德嶝, 덕이 있는 산)이라 부르니 헛된 이름이 아니로다' 하고 말한다. '덕등절구' 전문을 읽어본다.

성암산에는 덕이 있다 하여(聖巖山有德)
덕등이라 부르니 헛된 이름이 아니로다(德嶝非虛名)
숲은 깊어도 사나운 짐승이 없으니(林深無猛獸)
나무하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서 다니네(樵竪任孤行)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 다닐 수 있는 세상이면 무에 더 바랄 것이 있을까. 그 자체로 지상낙원이다. 사람으로서는 꿈에서나 상상해볼 수 있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온 모습이다. 그곳이 바로 성암산이라고 시는 노래하고 있다.

'숲이 깊지만 맹수는 없다'는 성암산에 웬 호랑이굴?

그런데 시비에서 왼쪽으로 난 숲길을 약 400미터가량 걸어가면 나타나는 수정사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대웅전과 산령각 앞에 있는 '공덕비'에는 이 절을 창건한 이동실(의리심) 보살이 '1914년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출생하여 6.25동란 이후 생사의 목숨을 걸고 월남'하였으며 '그 후 성암산 기슭 범굴에서 수행 정진'한 끝에 '1952년 수정사를 창건, 중생 구제 기도에 전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산향교의 공자 위패와 공자상은 임진왜란 때에도 피란을 잘 가서 무사했음.
 경산향교의 공자 위패와 공자상은 임진왜란 때에도 피란을 잘 가서 무사했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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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굴이라면 호랑이가 살던 굴이다. 정기연은 성암산을 두고 '숲은 깊어도 맹수는 없다'면서, 그래서 아이들조차 혼자서 마음 놓고 산 속을 돌아다닌다고 노래했는데, 호랑이라니? 호랑이는 산짐승 중 대표적인 맹수 아닌가?

유학자 정기연이 '범굴'을 몰랐을 리 없다. 이는 경산향교 외삼문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이 증언해준다.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때 향교에 모셔진 성인들의 위패가 훼손 위기에 처하자, 교복(校僕, 향교의 종) 강개명(姜開明)이 위패들을 성암산 석굴로 피란시켜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안내판은 이어 '이로 인해 성암산(聖巖山)이라는 산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라고 해설한다. 본래 옥산이었던 경산의 진산이 성암산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유래를 말해주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 때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성현들의 위패를 지게에 지고 옥산 정상부 바로 아래 가파른 절벽까지 올라 범굴에 무사히 보존시킨 향교 노비 강개명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일화이다. 전쟁이 끝난 뒤 강개명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면천(免賤, 천민에서 풀려남)된다.

즉, 범굴은 경산향교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역사의 현장이다. 다시 말해 선비 정기연이 범굴의 존재, 바꿔 말해 성암산에 범이 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성암산에 범이 없다고 말한다. 산은 깊지만 맹수가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조차 제 마음대로 산 속을 돌아다니며 땔감을 구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성암산의 호랑이는 범이 아니란 말인가?

호랑이 설화 품은 범굴은 임진왜란 유적

수정사 대웅전과 산령각 왼쪽으로 접어들어 등산로를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정사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현충탑 오른쪽으로 난 탐방로로 다니지만, 그 길을 가면 범굴에 닿지 않는다.

수정사를 뒤로 한 채 20분가량 고즈넉한 숲속을 걸으니 정면에 3층 건물만한 거대 암석이 앞을 가로막는다. 길 오른쪽에 작고 노란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범굴 안내인가? 입간판에는 '등반 사고 발생으로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이곳의 번호(성암산 13번 지점)를 119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속히 출동하여 도와드리겠습니다. 경산시장, 경산소방서장'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친절하고 자상한 행정력으로 느껴져 고맙지만, 범굴을 소개하는 입간판은 아니다.

비로소, 앞을 가로막고 선 거대한 바위를 쳐다본다. 이끼가 잔뜩 끼어 빛깔이 푸르게 변해버린 암석이다. 정기연은 성암산의 가을바위는 달빛을 받으면 더욱 하얗게 빛난다고 했는데, 이 바위만은 오히려 푸른 광채를 뽐낼 듯하다. 문득 바위 맨 위쪽, 아스라이 높은 곳에 있는 '성암사'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보기 드문 사찰 표지석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사찰 표지석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흔히들 웅장한 일주문을 세우고, 지붕 아래에 '**산 **사'라는 거대 현판을 매달아놓는 것이 보통인데, '성암산 성암사'는 어마어마한 바위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자연의 일부로 소개하고 있다.

아주 보기 드문 모습의 성암사 일주문

성암사 앞에서 보는 보기 드문 일주문과 현판. 자연의 두 그루 소나무에 소나무로 만든 현판이 걸려 있는 풍경.
 성암사 앞에서 보는 보기 드문 일주문과 현판. 자연의 두 그루 소나무에 소나무로 만든 현판이 걸려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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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바위를 타고 오를 수는 없는 노릇, 길은 왼쪽으로 이어진다. 5분 정도 오르면 성암사 대웅전에 닿는다. 그 중간쯤에서 성암사의 또 다른, 너무나 특이한 일주문을 본다.

오르막 계단은 두 그루 소나무 사이로 나 있는데, 그 두 그루 소나무들에 가로로 걸쳐져 있는 '기도 청정도량 성암산 성암사' 송판 현판이 눈길을 끈다. 머리 위에 높이 달려 있어 실제로 맡아지지는 않지만, 마음으로는 짙은 솔향이 온몸을 휘감는 듯하여 황홀한 느낌에 빠진다.

대웅전 건물이 아주 소박하다. 여느 사찰들의 산신각만큼이나 작다. 그러나 이곳에도 산신각에 해당하는 법당은 별도로 있다. 삼성각(三聖閣)이다. 물론 삼성각은 대웅전보다 뒤쪽에 있고, 대웅전보다 더 작다.

삼성각 왼쪽으로 걸으면 어마어마한 바위 절벽 앞으로 다가선다. 절벽 아래에 무엇이 놓여 있다. 저곳이 범굴인가? 그런 기대감에 젖은 채 다가서 보니, 절벽 아래에 놓인 것은 용왕당이다. 등산로는 왼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10분가량 걸으면 이윽고 범굴에 닿는다.

수정사에서 35~40분가량 오르면 나타나는 범굴

범굴 아래 비교적 평평한 땅은 이곳이 대지였음을 말해준다. 우물도 그대로 남아 있고, 제 모습을 거의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석축들도 이곳저곳에 보인다. 이 높은 곳에 사람들이 살았단 말인가? 잠시 그런 놀라움을 느끼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임진왜란 때에도 강개명이 이곳으로 달려왔다고 하지 않나. 강개명이 무턱대고 이리로 온 것은 아닐 터, 그 이전에 이미 이곳에 깊은 동굴이 있으며, 숨어 살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다. 

범굴은, 용왕당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거대 바위절벽보다도 더 큰 정상부 바로 아래의 암벽 하단부에 뚫려 있다. 안내판이 두 개 있는데, 왼쪽 안내판에는 '경고! 이곳 범굴은 우리 지역의 문화 유적지이므로 함부로 훼손을 하거나 오염을 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위반 시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라고 적혀 있다.

왼쪽 안내판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범굴이 경산 지역의 문화유적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훼손 등의 행위를 하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제 오른쪽 안내판을 읽을 차례이다. 제목은 물론 '범굴'이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범굴 안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
 범굴 안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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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한 노승이 성암산 정상부에 암자를 세우고 수도 생활을 했다. 스님에게는 동자승도 한 명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밤이 늦도록 스님이 돌아오지 않아 동자승은 혼자서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

그때 스님은 돌아오는 눈길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다. 잠깐 놀랐지만 스님은 호랑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호랑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호랑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 아녀자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지금 목에 비녀가 걸려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스님은 호랑이를 크게 꾸짖은 후 비녀를 제거해 주었다. 그 길로 호랑이는 개과천선하여 다시는 사람을 해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스님은 호랑이를 데려와 동자승과 함께 생활하도록 했다. 호랑이는 범굴에 살면서 동자승과 나란히 스님의 교육을 받았다. 뒷날 동자승은 성암대사가 되었고, 호랑이는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는 성암산 산신이 되었다.'

성암산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노승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부지한 호랑이가 교육까지 받은 후 산신령이 되어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기연이 성암산을 찬미하는 시 '덕등 절구'에서 '(성암산은) 숲은 깊어도 사나운 짐승이 없으니 / 나무하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혼자서 다니네'라고 노래한 까닭이 이제야 온전히 이해가 된다. 성암산 호랑이는 이 설화가 탄생한 조선 시대 이래 산신령이 되어 경산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으니 결코 맹수일 리가 없는 것이다. 

경산향교 대성전
 경산향교 대성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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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뭔가 마음속 한 구석이 허전하다. 무엇 때문일까. 한참 생각해보니, 이유가 헤아려진다.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당시 경산향교에 모셔져 있던 공자 등 성현들의 위패가 이곳 범굴로 피란을 와서 안전하게 지켜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다!

왼쪽 안내판의 '이곳 범굴은 우리 지역의 문화 유적지입니다'라는 설명 속의 '문화 유적지'는 이곳 범굴이 스님과 호랑이 설화의 공간적 배경이라는 의미일 뿐, 임진왜란 당시의 경산향교 위패 피란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게 쓰였다. 역사와 시대정신이 허무하게 단절되어 버렸다. 그래서 마음이 허전해졌던 것이다.

경산향교 위패 피란 사실에 대해 언급이 없는 범굴 앞 안내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현충탑 주변 길가, 그리고 범굴 바로 앞에 경산향교 위패 보존 과정을 밝힌 안내판을 세워두면 좋을 듯하다. 21세기의 범굴과 성암산의 안내판들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한 경산향교의 종 강개명과 종전 이후 강개명을 일반 양민으로 올려주는 상을 내린 조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면 몹시 실망하리라.

범굴에서 가파른 고개를 5분가량 오르면 경산 일대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가 나타난다. 인공의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석인데,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전혀 없는 까닭에 올라서면 팔공산까지의 경치를 완벽하게 즐길 수 있다. 연거푸 사진을 찍다가 '옥곡동이 어디일까?' 하며 잠시 두리번거린다.

범굴 바로 뒤 성암산 정상 턱밑의 전망대(자연 암석)에서 바라본 경산 일원의 풍경. 내려다보는 아래로 산자락이 끝나는 사진 중앙 일대가 옥곡동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산향교는 옥곡동에 있었다.
 범굴 바로 뒤 성암산 정상 턱밑의 전망대(자연 암석)에서 바라본 경산 일원의 풍경. 내려다보는 아래로 산자락이 끝나는 사진 중앙 일대가 옥곡동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산향교는 옥곡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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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 바위에 서서 성암산 정상을 등진 채 직선으로 시선을 아래로 던지면, 그곳이 바로 옥곡동이다. 옥곡동을 찾는 까닭은, 옥실마을이 바로 임진왜란 당시 경산향교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옥곡동에는 정동민과 정기연 가문의 재실인 우경재와 그들의 선조인 정변함, 정변호, 정변문 3인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삼의정(三義亭)이 있어 마을의 전통을 웅변해준다.

경산향교가 옥곡동에 창건된 까닭

경산향교가 창건될 때 왜 옥곡동에 자리를 잡았을까? 마을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외곽지나 산속에 건립하여 교육 공간으로서의 정숙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서원과 달리 향교는 공자를 제향하고 지역 유림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등 공적 기능이 강했기 때문에 선비들이 접근하기 쉬운 곳에 많이 세워졌다. 즉, 향교가 옥곡동에 창건되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지리적으로 경산 일원의 요지였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옥곡동이 창동기 시대에도 큰 세력가와 다수 사람들의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적, 고인돌
 옥곡동이 창동기 시대에도 큰 세력가와 다수 사람들의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적, 고인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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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곡이 전통적으로 경산 일원의 중요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또 하나의 근거는 청동기 시대 유적이다. 옥곡은 뒤로 성암산이 웅장하고 앞으로 남천이 흐른다. 그래서 풍부한 식량을 제공해주는 넓은 들판과 적의 침입을 막는 천연 해자(垓字, 물길로 이루어진 방어선)가 있고, 때로는 산으로 피란을 떠날 수도 있다. 경산향교의 종 강개명이 왜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 부랴부랴 성암산의 범굴로 위패를 옮긴 것 역시 옥곡의 지리적 장점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하겠다.

청동기 시대 이래 사람들은 살기 좋은 옥곡을 집단 거주지로 삼았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옥곡에 상당한 세력가가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집 안에 불을 피운 화덕 자리가 둘이나 남아 있는 커다란 당시 집터 또한 세력가의 존재를 짐작하게 해준다. 세력가는 많은 사람을 거느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고인돌과 청동기 시대의 거대 집터는 옥곡이 대규모 거주지였음을 증언한다. 그래서 고려 공양왕 2년(1390) 경산향교가 옥곡에 건립되었다. 경산향교가 현 위치인 경산시 중방동 760번지로 옮기게 된 것은 1911년이다.

경산향교와 성암산 범굴, 훌륭한 임진왜란 역사유적 답사지

경산향교 한효근(韓孝根) 전교는 "경산향교 대성전은 본래 건물의 목재들을 그대로 옮겨와 지은 고색창연한 문화유산이지요. 대성전 안 5성 성현들의 위패도 임진왜란 이전부터 모셔온 역사와 전통이 깃들어 있는 우리 향교의 자랑거리이지요. 임진왜란 때 다섯 분 위패들을 성암산 범굴로 대피하여 안전하게 지켜낸 모범적인 선행담도 남아 있고요" 하고 소개한다. 경산향교와 성암산 범굴, 꼭 한번 찾아볼 만한 임진왜란 관련 역사문화유산으로 오늘 추천한다.


태그:#경산향교, #범굴, #임진왜란, #삼의정, #정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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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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