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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처럼 푸근하고 정겨운 삽교천.
 그 이름처럼 푸근하고 정겨운 삽교천.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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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어도 왠지 푸근한 기분이 드는 하천 가운데 하나가 삽교천이 아닐까싶다. 예당평야가 있는 충청도 지역의 쌀 익는 너른 들판을 적시며 지나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물길이다.

삽교천(揷橋川)은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오서산 자락 홍동 저수지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르면서 마을과 평야에 물을 주며 흐르다 삽교호 방조제를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충청도에서 가장 넓은 예당평야를 품은 하천에 걸맞게 길이 61㎞, 유역면적 1619㎢에 금마천·효교천·남원천·무한천·곡교천 등 18개의 지류하천을 지나는 큰 물줄기다.

삽교천이 더욱 특별한 건 아래에서 위로 북류하는 물길이어서다. 우리나라의 숱한 강 가운데 북으로 흐르는 강은 삽교천이 유일하다고 한다. 한반도의 지형상 강이 남쪽에서 북으로 흐르기가 어렵단다. 강가에 산책로나 자전거도로는 없지만 천변길, 강둑길, 마을길, 논두렁길 등 다양한 길을 지나며 삽교천을 여행했다. 삽교천이 바다로 흘러가는 맨 끝 하구에 당진해양캠핑장이 있어서 자전거 캠핑여행을 겸했다.

대원군 아버지 묘 도굴사건의 현장, 구만포 

가을 햇볕을 많이 받으라고 사과 잎을 따는 아주머니들.
 가을 햇볕을 많이 받으라고 사과 잎을 따는 아주머니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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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펀한 갯내음이 풍기는 장항선 기차를 타고 삽교역(충남 예산군 삽교읍)에 내렸다. 삽교천, 삽교역, 삽교읍 등에 나오는 '삽교'라는 다리가 있나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보았다. 삽교천에 정말 '삽다리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었다. 아담한 소읍도시 삽교읍과 사과나무가 많은 시골마을 삽교리를 잇는 다리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정겹고 소박한 이름과 달리 차량들이 바삐 지나는 흔히 볼 수 있는 현대식 교량이었다.  

삽교천 지명에 나오는 삽교는 옛날 이 하천에 섶(땔나무)으로 다리를 놓았던 것에서 유래했단다. 큰 강처럼 삽교천도 사읍교천, 신교천, 범근내, 금마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삽'은 백제어에서 붉은 색이란 뜻으로 삽교천이 홍수가 자주 일어나 붉은 탁류가 흐르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아쉬웠던 마음은 삽교읍 용동3리 마을회관 앞 삽교천변에 있는 작은 다리를 지나면서 풀렸다. 인터넷 지도를 크게 확대해서 봐야 보이는, 주민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는 이름 없는 작은 다리지만, 발밑으로 지나가는 풋풋한 삽교천이 가깝게 보여 좋았다.

삽교읍 천변엔 사과나무를 심어놓은 과수원이 많았다. 아직 사과를 딸 때가 아닐 텐데 아주머니들이 과수원에서 수다를 떨며 일을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사과가 가을 햇볕을 더 쬐라고 가지에 달린 잎을 딴단다. 논에서 자라는 벼처럼 사과도 가을볕이 있어야 잘 익나보다.

피부에 좋지 않다며 햇볕을 가리고 피해 다니다 비타민D 부족으로 면역력이 떨어져 건강을 잃는 내가 사는 도시의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주머니가 상품성 없는 파과라며 건네준 사과 몇 개를 가방에 넣고 삽교천 둑방길을 달렸다. 물 마실 곳이 없는 강둑길, 아주머니가 준 제각각 모양의 사과들이 삽교천 둑길을 달리는 데 큰 도움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밀물을 타고 바다에서 배들이 오갔던 삽교천 구만포구.
 밀물을 타고 바다에서 배들이 오갔던 삽교천 구만포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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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을 달리다 옛날엔 유명한 포구였다는 삽교천 중류의 구만포(충남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서 쉬어갔다. 포구터를 작은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구만포는 배가 오가는 조선시대 내포의 교통 중심지로서 쌀과 잡곡을 서울로 운송하고, 바다에서 새우젓과 소금, 기타 해산물을 실어 오는 배가 선착되는 곳이었다. 땅이 기름지고 교통이 편해 예부터 산천의 조화로운 기운을 받은 복 받은 땅이라고 안내판에 소개돼있다. 삽교천은 만조(밀물) 때 바다에서 무려 27km나 떨어진 이곳 구만포까지 물이 들어왔는데 이런 물줄기를 감조하천(感潮河川)이라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구만포는 구한말 역사적 사건에 출현하기도 했다. 150여 년 전 대원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조선 최고의 명당에 자리 잡으려 한다. 전국의 이름난 풍수가들을 공모해 명당을 수소문한 끝에 결정한 자리가 바로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기슭이다. 원래 그 자리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를 없애고 아버지의 묘를 옮겼다. 이후 대원군의 아들 고종을 비롯한 자손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천하의 명당이니 풍수니 하는 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구나 싶다.

고종 5년(1868)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 터졌다. 도굴범인 독일인 오페르트가 140명의 일행을 태운 증기선을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오르다 내린 곳이 구만포다. 하지만 단단히 매장한 남연군의 묘를 쉽게 도굴하지 못하다가 날이 밝아왔고, 썰물이 나면 배가 꼼짝도 못하게 되니 할 수 없이 미수에 그친 채 배를 타고 달아났다.

평화롭고 드넓은 시월의 들녘, 예당평야

하천정비공사로 사라져가는 풋풋한 강둑길.
 하천정비공사로 사라져가는 풋풋한 강둑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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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 정약용 선생을 위해 쓴 현판 글씨.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 정약용 선생을 위해 쓴 현판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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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천 둑길은 중류에서 하류로 가면서 바뀌는 하천과 마을의 모습처럼 다양했다. 푹신한 흙길, 작은 자갈이 깔린 둑길, 미끈한 농로길이 이어져 자전거 여행하는 맛이 낫다. 중상류 지역엔 자전거도로를 만들려는지 강둑길을 파헤쳐 길을 넓히고 포장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4대강 개발 사업에서 보듯, 풋풋한 강과 하천변에 대도심 하천에나 어울리는 고속도로 같은 포장도로는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의 강과 하천을 모두 붕어빵처럼 똑같은 풍경으로 바꾼 주범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구만포를 지나 예산군 신암면 예림리에서 '추사 고택' 이정표를 보고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강둑에서 2km 정도 남짓한 거리에 천하명필 추사 김정희(1786년, 정조 10년~1856년, 철종 7년)의 고향이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추사체는 55세 때인 1840년(헌종 6)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서 약 9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사람에게 불안이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집안 곳곳에서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전남 강진에 유배 갔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초가집 현판으로 쓴 '다산초당(茶山草堂)'과 '보정산방(寶丁山房,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글씨가 제일 맘에 들었다. 김정희는 정약용보다 24살 연하로 평소 정약용을 몹시 존경했단다. 단정하면서도 자유롭고, 분방한 듯하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글씨들은 현대미술의 파격적인 조형미를 떠올리게 했다.

삽교천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정겨운 평야와 마을들.
 삽교천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정겨운 평야와 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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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강둑길을 덜 심심하게 해주었던 곤충들.
 한적한 강둑길을 덜 심심하게 해주었던 곤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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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삽교천으로 돌아오면 천변에 펼쳐진 드넓은 예당평야의 물결이 논두렁길을 따라 펼쳐진다. 벼 베기 후 볏단을 보관해 놓은 바둑돌 모양의 볏집 때문에 들판이 커다란 바둑판처럼 보였다. 노랗게 익어가는 논 위에 줄지어 서 있는 전기 철탑도 덜 삭막하게 보였다.

구암교를 건너 하평리 들판을 지나면서 물길은 큰 강물처럼 유장하고 펑퍼짐하게 흘러갔다. 그 위에 사는 새들은 풍성한 먹거리가 있어 한껏 여유로워 보였다. 평소 한강이나 동네 하천에선 듣기 힘들었던 왜가리, 백로들의 '꾸르륵 꾸르륵' 하는 원시시대 익룡 목소리 같은 거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예당평야는 삽교천과 그 지류인 곡교천, 무한천 유역에 자리하고 있는 넓고도 넓은 들판이다.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산과 당진의 이름을 따서 예당평야라 부른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했던 경상도 섬진강변의 하동 평사리 '무딤이 들', 전라도 만경강변의 '징게 멩경 외에밋들'(김제 만경 너른들) 못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은 서들(西野)평야라고 부르는 이 일대의 농경지는 1979년 삽교천 하류에 바닷물의 유입을 막는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확장됐다. 질펀하고 후덕하게 흐르는 삽교천 옆으로 사통팔달 드넓게 펼쳐진 평야를 바라보며 달리니 도시에서 아웅다웅 사느라 좁아지기만 했던 가슴이 후련해지고, 모니터와 스마트폰만 보던 근시안이 개안된 것 같았다.  

추수가 끝난 논에서 풀어 키우는 편안한 모습의 닭들.
 추수가 끝난 논에서 풀어 키우는 편안한 모습의 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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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맞이한 쌀 익는 너른 평야는 적요하기만 했다. 평야에 나온 농부들이 몇 안 된다. 요즘 농촌엔 이양기, 콤바인과 트랙터 등이 있어서 벼를 심거나 추수할 때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 심심한 강둑길, 고개를 숙이고 노랗게 익어가는 벼와 논에 놀러온 여치·메뚜기·사마귀·잠자리들이 길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툭툭 치며 여행자에게 재롱을 피우는 통에 덜 심심했다. 전국 곳곳 많은 논에서 쌀이 나오고 쌀을 잘 먹지 않아 남아도는데도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23%로 34개 OECD(경제개발회원국) 가운데 최하위에 머물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느 마을에선 벼 베기가 끝난 논에 그물을 쳐놓고 닭들을 풀어 놓고 키우고 있어 재밌었다. 너른 논에서 맘껏 뛰놀며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이 편안해 보였다. 사진을 찍으려 가까이 다가가니 닭은 도망치지 않는데 똘똘하게 생긴 작은 개들이 짖으며 달려왔다. 인간에게 달걀과 가슴살을 받쳐야 하는 가축 팔자지만, 살아갈 때만큼은 좁고 어두운 축사가 아닌 이런 곳에서 살다 갔으면 좋겠다.      

매년 고래 제사를 지내는 마을, 신기루 같은 무명섬 

매년 고래탑에서 제사를 지내는 내경리 마을 사람들.
 매년 고래탑에서 제사를 지내는 내경리 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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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강면 삽교천 위에 신기루처럼 떠있는 무명섬,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우강면 삽교천 위에 신기루처럼 떠있는 무명섬,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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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리에서 얻은 몇 개의 사과로 겨우 갈증을 해결하다, 빈 물통을 채우려 천변에서 가까운 마을 내경리(충남 당진시 우강면)로 들어섰다. 내경리 마을회관에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웬 작은 고래 조각상이 있는 탑이 보였다. 마을회관 옆 '고래원 식당'에서 늦은 점심밥을 먹으며 아주머니에게 고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의 삽교천 방조제가 없었을 땐 서해 바닷물을 타고 고래들이 이 마을까지 오갔단다. 오랜 세월 고래와 친하게 지낸 마을이다 보니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이면 고래탑 아래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 내경리(內鯨里)의 경자가 고래 경이다. 고래 얘기를 들려주시던 아주머니의 손에 있던 대추들이 어느 새 내 손에 들어가 있었다.

우강면 들녘 앞을 흐르는 삽교천 위에 웬 길쭉한 섬이 신기루처럼 떠있어 눈길을 끌었다. 1973년 삽교천지구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 과정에서 퇴적으로 생성된 무인도로 별 다른 이름이 없이 그냥 무명(無名)섬이라 부른다고. 17만 7924㎡(약 5만 3000평) 규모의 작지 않은 섬이다.

강둑길에서 보이는 무명섬은 새들과 수풀로 가득한 원시의 섬처럼 보였다. 섬 위로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데, 바다 속에 무리지어 사는 정어리 마냥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겨울철이면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쉬어가는 철새 도래지라고 한다. 최근 이 섬 위에 전기 철탑 건립이 논의되자 이에 반발하는 우강면 주민들이 이 섬에 이름을 짓고 생태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나서고 있단다.

더불어 우강면 주민들은 삽교천(川)을 '00강(江)'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삽교천(61㎞)보다 길이가 짧은 울산 태화강(46㎞), 전북 동진강(44㎞)도 강으로 불리는 데다, 삽교천은 단순히 '삽교읍'이라는 지역에 있는 개천을 연상하게 한다고. 삽교천을 지나와보니 그럴 만하겠구나 싶었다.

놀이공원, 서커스장, 수산물 시장, 캠핑장이 있는 삽교호 관광지

삽교천을 호수로 만들어 너른 농경지를 만든 삽교천 방조제.
 삽교천을 호수로 만들어 너른 농경지를 만든 삽교천 방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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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천 하류, 바다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한 당진해양캠핑공원.
 삽교천 하류, 바다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한 당진해양캠핑공원.
ⓒ 당진해양캠핑공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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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가까워지는 하류로 갈수록 강둑길도 강도 넓어질대로 넓어지더니 삽교천이 아닌 삽교호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삽교천을 삽교호로 만든 건 삽교천 방조제다. 1979년에 만든 이 방조제는 바닷물의 역류를 막고 강물을 담아 농업 및 공업용수로 쓰려고 만든 다목적용 방조제다. 1000ha가 넘는 농경지가 생겨났다고 하며, 당시에는 국내에서 최장 방조제였다.

삽교호와 방조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방조제 준공식 참관차 생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다. 바로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난공사 중의 난공사였다는 삽교호 방조제를 다 짓고 열린 거대한 개막식을 치르고 그날 밤 박 대통령은 시해(10.26 사건)되고 말았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박정희가 참석한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되었다.

특이하게 아래에서 위를 향해 북류하다 비로소 바다로 들어서는 삽교천 하구에 삽교호 관광단지가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물레방아처럼 생긴 대관람차, 바이킹 등이 있는 놀이동산엔 사람들로 가득하고, 이 나라에선 멸종된 줄 알았던 서커스단이 다 있다.

당진시에서 만든 자전거 대여소 '자전거 터미널'도 있다. 하루 천 원에 빌려주는 자전거를 타고 가까운 호수와 바닷가, 천변 가을 들녘까지 볼 수 있어 많은 시민들이 애용하고 있었다. 해마다 10월엔 조개구이 축제가 벌어진다는 수산물 시장도 무척 크다. 바지락에서 가리비, 백합, 어른 손바닥만한 키조개까지... 인근 바다에서 캐온 갖가지 모양의 조개들이 많아 시장구경만 해도 재밌었다.

삽교천이 바다로 흘러가는 마지막 포구, 맷돌포구.
 삽교천이 바다로 흘러가는 마지막 포구, 맷돌포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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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교호 관광단지엔 하룻밤을 바닷가에서 이채롭게 묵을 수 있는 당진해양캠핑장공원

(camping.dpto.or.kr)도 있다. 텐트에서 보이는 바다는 충청도 사람을 닮아선지 물결이 한결 부드럽고 여유가 있었다. 서해바다가 잔잔하게 들려주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아침나절 스마트폰의 알람 대신 갈매기들이 깨워 일어났다. 아침 산책삼아 해안도로에 난 산책로를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삽교천의 마지막 포구이자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맷돌포구'가 나온다.

이름의 유래가 절로 궁금해지는 맷돌포구에서 충남 아산에서 왔다는 자전거 여행자들과 마주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중 한 분이 나처럼 자전거 캠핑여행 하는 게 꿈이란다. 내가 좋아서 즐겁게 하는 일이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낚시꾼들이 망둥어를 잡아 올리고, 작은 배들이 둥실 떠있는 정답고 아담한 포구에 서서 삽교천과 작별을 했다. 삽교호 관광단지 안에 삽교천 버스터미널이 있어 돌아올 때 이용하면 된다.     

* 주요 자전거 여행길 : 장항선 삽교역 - 삽교천 둑길 - 구만포 - 추사 김정희 고택 - 예당평야 - 내경리 마을회관 - 삽교천 둑길 - 삽교호 관광단지, 당진해양캠핑장 - 삽교호 버스터미널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3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자전거여행, #삽교천, #예당평야, #삽교천 방조제, #삽교호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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