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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집에서 내가 근무하는 도계초등학교까지의 거리는 33.91 킬로미터이다. 놀랍게도 40분이 걸리는 출근길에 마주하는 삼색 신호등은 6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 중 4개는 아파트 단지가 있는 초반부에 몰려있어 실제 운행 중 빨간불이 들어오나 안 오나 살펴야 하는 신호등은 2개뿐이다. 신호 스트레스 없이 달리는 길은 여유롭다. 양쪽에 산을 끼고 오십천이 흐르는 38번 국도를 따라간다.

계절 따라 바뀌는 산과 들의 풍경이 끝없이 계속된다.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한 코스가 제법 있으나 차막힘이 없으니 조금만 신경 쓰면 된다. 크게 음악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내달리는 이 길을 퍽 즐긴다. 꽤 달려 도착한 도계읍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한적하다. 아이들에게 너희는 공기 맑은 동네에 살고 있으니 참 좋겠다고 하였다. 대번에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공기 좀 나빠도 되니까 시내 같은 데 살고 싶어요."
"쌤 지금 놀리세요? 여기는 영화관도 없고, 옷 가게도 별로고."

출근길 자연에 심취해 들떠있던 나는 김이 샜다. 비꼬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지역에 불만이 많았다. 이어 도시 찬양이 시작되었다. 원주에 사는 친구 아파트 들어갈 때 보안 카드 찍은 얘기, 종로 3가에서 지하철 환승한 얘기, 부산 서면에서 씨앗호떡 사 먹은 얘기를 했다. 크고 번쩍거리고 북적거리는 동네에서 겪은 일이었다. 경찬이가 도계도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금세 목소리를 낮췄다.

영화 '꽃피는 봄이오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도계에서 촬영되었다.
 영화 '꽃피는 봄이오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도계에서 촬영되었다.
ⓒ 씨즈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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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관 뛰어난 작고 오래된 마을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읽어줄 책으로 <작은집 이야기>를 골랐다.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꿈꿨던 버지니아 리 버튼의 대표작인 <작은집 이야기>는 무려 1943년 칼데콧상 수상작이다. 73년 전 심사위원들을 감동시켰던 메시지가 지금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저 먼 시골 마을에 튼튼하게 작은집이 있었다. 아담하고 튼튼한 집을 사랑한 주인은 금과 은을 다 주어도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작은집은 언덕 위에 올라앉아 주변 경치를 바라보며 무척 행복해했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해를 보았고 저녁에는 지는 해를 보았다. 날마다 오늘은 어제와는 조금씩 달라졌다.

"어떻게 집이 행복해할 수 있어요?"

완석이가 예리하게 캐물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작은집이 하는 얘기에 귀 기울여 보자 하였다. 밤이 되면 작은집은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없는 밤에는 별을 세었는데 저 먼 곳에서 비춰 오는 도시의 불빛도 보았다. 수평선 너머로 점점이 박혀있는 빛 뭉치들이 도시의 불빛이었다. 내 무르팍 바로 앞에 앉아있던 주민이가 한참 그림을 보다가 말했다.

작은집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을 사랑한다.
 작은집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을 사랑한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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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불빛이 별처럼 반짝여요."
"아주 멀리 있으니까 빛이 퍼져서 아른거리네. 예쁘다. 그치?"

봄이 되어 해가 점점 길어지고, 날이 점점 따뜻해지면 작은집은 남쪽에서 돌아올 첫 울새를 기다렸다. 또 푸른빛으로 변하는 들판, 개울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 사과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사과라는 발음을 듣고 신맛이 입안에 퍼지는지 현우 입꼬리가 올라갔다. 뒷줄에 앉아있던 가은이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이 재잘거렸다.

"포도 꽃도 5월에 피는데."
"포도도 꽃이 피니?"
"네, 포도알 열리는 자리에 다 꽃 펴요."

포도 꽃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가은이는 할머니께서 포도밭을 하셔서 올망졸망 핀 초록색 포도 꽃을 만져보았다 하였다. 효연이도 뭔지 안다고 거들었다. 과일 키우는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은 도시에 사는 선생님이 모르는 걸 척척 설명했다. 포도 꽃이 생소한 나머지 친구들도 귀 기울여 들었다. 포도 꽃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함께 읽는 그림책은 역시 이런 맛이 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봄이 지나 여름이 되면 언덕엔 하얀 데이지꽃이 피었다. 채소는 푸른빛으로 변하고 사과는 빨갛게 익었다. 가을이 되면 주민들은 사과를 따고, 가을걷이를 했으며, 꼬마들은 학교에 갔다. 굽이굽이 언덕마다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었다. 이윽고 겨울. 흰 눈으로 뒤덮인 마을 큰길에서 꼬마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말은 썰매를 끈다.

계절별로 달라지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계절별로 달라지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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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에서 헤엄치던 꼬마들이 어른이 되어 도시로 떠날 즈음,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도시의 불빛이 더 밝게 더 가깝게 다가온다. 조붓한 흙길은 파헤쳐지고 검은 도로가 나더니 개울 옆 공터에 주유소가 개업했다. 수레는 자동차로, 돌담은 전신주로 바뀌었다. 새 도로를 따라 낯선 집들이 들어서자 온 세상이 훨씬 바쁘게 움직였다. 푸른 들판은 건물에 가려 면적이 좁아졌다.

"헐, 우리도 태백이랑 삼척 잇는 도로 새로 닦고 있는데..."
"야, 그거 지어지면 태백이랑 삼척이랑 엄청 빨리 왔다 갔다 할 수 있대. 좋은 거야."

준헌이가 걱정스레 한숨 쉬자 완석이가 심각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승희도 엄마한테 들었다며 새 길 생기면 훨씬 편할 거라고 했다. 연지는 공사 때문에 큰 트럭이 다녀서 무섭다고 했고, 유빈이는 먼지가 날린다고 고개를 저었다. 웅성거림 속에서 누가 그랬는지 도로 뚫리면 땅값 오른다고 외쳤다.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녀석들은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발전이 무조건 옳은 것인가를 논의하기엔 시간이 없었으므로 작은집이 겪고 있는 변화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마을엔 학교와 가게들이 건설되었고 아파트와 연립주택들이 작은집을 빽빽이 에워쌌다. 이제 아무도 작은집에 살려고 하지 않았고, 누구도 작은집을 돌봐주지 않았다. 작은집 위로 고가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으며 아래로는 지하철이 왔다 갔다 했다. 모두들 바빠 보였고, 모두들 허둥대 보였다.

세월이 흘러 아파트, 연립주택은 허물어지고 25층, 35층 빌딩이 세워졌다. 작은집은 한낮에만 해를 볼 수 있었고, 밤에는 도시의 불빛이 너무 밝아 해와 달도 볼 수 없었다. 작은집은 너무 슬프고 외로웠다. 어느 날 작은집을 지은 사람의 손녀의 손녀가 찾아왔다. 겉은 낡았지만 내부는 여전히 훌륭했다. 이 집이 여기에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 새 주인은 이삿짐센터에 의뢰해 기중기로 작은집을 들어 올려서 옮기기로 결심한다.

대도시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 작은집
 대도시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 작은집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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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 집이 레고처럼 뽑혔어."
"어금니처럼 빠진 자리에 구멍이 생겼어."

모두들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었다. 거대한 악당으로부터 도망치는 주인공을 응원하듯 유쾌하게 웃었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위압적인 도시의 풍광은 작은집과 어울리지 않았나 보다. 큰 수레에 실려 탈출에 성공한 작은집은 어떤 언덕 꼭대기에 새로 자리 잡는다. 젊은 주인은 유리창과 덧창을 고치고 분홍색으로 곱게 다시 페인트칠을 한다. 작은집은 비로소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참 다행이에요."

감수성 많은 서진이가 두 손을 모으며 감격스레 미소 지었다. 경춘이는 작은집 옆에 심긴 나무가 옛날의 사과나무냐고 물었다. 해도, 달도, 별도 볼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가 무척 아늑해 보인다고 했다. 환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얘들아 작은집이 사는 곳은 영화관도 없고, 마트도 없는 시골이잖아. 그런데 도시보다 좋을까?"
"네에~ 작은집이 시골을 그리워했잖아요."
"그럼 너희는 어떨 것 같아? 어른이 돼서 도시에 나가 살면 도계가 그리워질까?"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해요."

확실히 책을 읽기 전보다 망설이는 눈치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살기 좋은 마을이란 무엇일까? 어려운 물음들이 오간다. 누구는 아버지 가게를 물려받아 도계에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하고, 누구는 꼭 이곳을 떠나 서울에 가겠다고 했다. 사람이 붐비는 동네가 좋다, 고요한 골목이 좋다, 주택이 좋다, 아파트가 좋다 말들이 넘쳐난다. 작은집 이야기는 생각할 거리를 풍부하게 던지는 책이었다.

갑론을박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도시를 동경하던 아이들이 시골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육백산에서 포도 꽃을 보고, 시원한 계곡물이 발목을 적시는 경험을 도시 아이들은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에 꼬맹이들은 새삼 감탄했다.

나는 앞으로 지역의 자랑할 만한 면면을 자주 소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시골의 아름다움은 별빛 같아서 화려한 도시의 불빛에 쉽게 가려진다. 일부러라도 밤하늘 별빛이 더 귀하다고 알려주려 한다. 그렇지 않고 어른이 되어서야 옛적 살던 고향이 아름다웠던 줄 알고 후회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작은 집 이야기

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홍연미 옮김, 시공주니어(1993)


태그:#그림책, #교실, #학교, #시골,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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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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