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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공 건축과 시절의 이상(왼쪽)과 총독부 건축 기수 시절의 이상, 출처: 이상문학전집, 소명출판, 2005.
 경성고공 건축과 시절의 이상(왼쪽)과 총독부 건축 기수 시절의 이상, 출처: 이상문학전집, 소명출판, 2005.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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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 그만 졸고 똑바로 들어. 이게 시험에 나올지 어떻게 알아?"
"어? 이게 시야? 띄어쓰기가 왜 이래?"  
"이 시인, 천재 티 너무 내는 거 아냐? 이걸 누가 이해하겠어?" 
"그래도 기억하기는 쉽겠네. 숫자만 바꾸면 되잖아."
"아까 본 소설은 날개, 이 시는... 한자가.... 새, 맞아?"
"점이 하나 없잖아. 새가 아니라 까마귀. 까마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그림."
"킥킥, 시인이 새를 너무 좋아했나? 나는 까마귀도 싫고... 개는 뭐... , 나는 치킨 날개가 먹고 싶어라."
"잡담은 그만! 이건 그 시대 최고의 모더니스트가 쓴 실험적인 아방가르드 시인데... 조용히! 거기, 그래, 너,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
"아방...."
"아방, 뭐? 똑바로 말해봐."
"아방, 궁?"

그 순간 말만 한 여고생들의 말 많은 교실은 깔깔대는 소리로 터질 듯 했다. 눅진한 오후의 졸음을 날려버린 시는 이랬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 여고생들의 불만어린 평가는 차라리 귀여웠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 에 연재되자마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개수작", "미친놈의 잠꼬대"는 기본이었다. 신문사 내부에서도 반감이 심했다. 결국 원래 계획의 반밖에 못 채우고 15회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수학자가 등비수열로 해석한 연작시 「오감도」에 포함된 「시 제4호」(오른쪽)와 「시  제5호」, 둘 다 일본어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에 있는 「진단 0:1」과 「이십이년」을 패러디한 것. 출처: 이상문학전집, 소명출판, 2005.
 수학자가 등비수열로 해석한 연작시 「오감도」에 포함된 「시 제4호」(오른쪽)와 「시 제5호」, 둘 다 일본어 시 「건축무한육면각체」에 있는 「진단 0:1」과 「이십이년」을 패러디한 것. 출처: 이상문학전집, 소명출판, 2005.
ⓒ 조선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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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기호로 엮어진 시와 초현실주의 소설마다 '난해'라는 딱지가 붙었다. 작품만 어지럽도록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개인사는 잔인할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백부의 양자, 기생 금홍과 다방 제비, 훗날 화가 김환기의 아내가 된 변동림과의 짧은 결혼생활, 폐결핵, 각혈, 무엇보다 26년 7개월의 짧은 생애... 그의 삶과 작품 모두 살아서는 몰이해, 죽어서는 신화가 되기에 딱 좋았다. 신화가 된 천재는 소설, 영화, 연극의 주인공이 되거나 모티브가 되었다.

문제적 작가답게 이상은 여러 장르에서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날개 잃은 천재, 박제된 천재는 오히려 평범한 수식어였다. 트라우마, 억압된 리비도, 성도착증과 같은 개념이 분석용 메스가 되었다. 시에 들어간 숫자는 등비수열로 해석되고, 숫자가 배치된 이미지는 디지털 코드나 추상화로 설명되었다. 기하학,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까지 거론되었다.

해석은 다양해도 공통분모가 있었다. 바로 이상은 모더니스트라는 것. 그냥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최초의, 최고의, 첨예한 모더니스트라는 것. 그래서 이상은 근대사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탐나는 존재이다. 근대라는 시기에 절실했으나 부족했던 '근대성'을 이상을 통해 만회하고 싶기 때문이다.      

근대건축사에서도 이상은 그런 존재이다. 그도 한때 건축가였다. 박길룡, 박동진, 김세연처럼 그도 경성고등공업학교(아래 경성고공) 건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그들처럼 총독부의 건축 기수로 근무했다.

같은 학교 선후배로 같은 조직에서 일했지만 이상의 삶은 그들과 달랐다. 선배 건축가들이 퇴근 후 건축 부업을 할 때, 후배 이상은 시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시와 소설은 <조선>과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실렸다. <조선>은 총독부에서 일본 식민지 정책을 일반에게 홍보하기 위해 발간하던 잡지였다. <조선과 건축>은 '조선건축회'에서 발행하던 건축잡지였다.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미쓰코시백화점(1930,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준공되었을 때, 이상이 의주통 공사현장에서 썼던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이 <조선>에 연재되었다. 박길룡이 설계한 경성제국대학 본부(1931, 현재 대학로 예술가의 집)가 세워졌을 때, 이상의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과 연작시 '조감도'가 <조선과 건축>에 실렸다.

이상이 그린 '자상(自像)'은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렸다. 그래서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다. 이미 15세 때 유화 '풍경'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 교내 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키웠던 백부의 권유로 "세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배는 곯지 않는" 건축을 선택하게 되었다. 경성고공 입학 후 그는 미술부에 들어갔고, 회람지의 표지를 그리고 편집을 했다. 본명이 김해경인 그가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최초로 쓴 것도 경성고공 졸업앨범에서였다.

그렇다고 이상이 건축을 등한시하거나 실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성고공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작품은 '수상 경찰서 겸 소방서 설계안'이었다. 총독부에 입사한 후에는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 현상공모에 응모해 1등과 3등을 차지했다. 독특한 글씨체와 건축도면을 활용한 기하학적인 디자인이 돋보였다.

1929년 12월에 실시된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 현상공모에서 수상한 1등안(왼쪽)과 3등안. 출처: 이상문학전집, 소명출판, 2005.
 1929년 12월에 실시된 『조선과 건축』 표지 디자인 현상공모에서 수상한 1등안(왼쪽)과 3등안. 출처: 이상문학전집, 소명출판, 2005.
ⓒ 조선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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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시의 제목도 건축과 연관이 깊다. 기호와 숫자, 수학 수식을 사용한 시의 형식도, '운동'처럼 상대성 원리와 공간적 상상력을 다룬 시의 내용도, 경성고공 시절에 배웠던 건축과 수학, 물리학의 영향이었다.

그가 실무를 했던 조선총독부의 도서관은 그에게 지적인 편력의 장소였다. 일본에서 출간된 최신 책들이 바로바로 들어오는 도서관에서 그는 서구 모더니즘 예술과 문학을 마음껏 흡수했다.

하지만 이상에게 건축과 문학의 공존은 딱 거기까지였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7년간 이상의 일상은 건축 안에 있었다. 건축잡지에 실린 그의 시들은 대단한 관심도 질타도 받지 않았고, 그의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마치 태풍전야의 고요함처럼.

1933년 그는 폐결핵으로 총독부를 그만두면서 건축도 떠났다. 1937년 도쿄에서 사망할 때까지 4년의 삶은 일탈과 기행으로 파란만장했다. 건축전문잡지가 아닌 대중적인 신문에 드러낸 그의 시들은 돌팔매를 맞았고 그는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짧지만 강력했고, 그는 극과 극의 비평을 받는 이상다운 이상이 되어갔다. 대신 건축적인 아이디어나 시어는 사라져갔다.

근대건축 연구자라면 이 대목이 가장 아쉬울 만하다. 만일 이상이 건축을 계속 했더라면? 그래서 독자적인 설계를 하고 작품을 남겼다면? 그의 시에 나타난 근대성이 조형으로 표현되고 건축공간으로 발전했다면? 그랬다면 당대 건축가들이 인식했던 물질문명의 근대를 넘어서는 근대건축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한국의 근대건축가를 두고 "그래봤자 근대를 살았던 건축가밖에 더 되겠어?" 자조 섞인 말은 안 나올 텐데.  

오래전 '오감도'와 '날개'를 읽었을 때, 왜 아이들이 열 세 명인지, 왜 그렇게 질주하는지, 왜 막다른 골목길이었다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한지,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가 도대체 몇 명이고 왜 무서운 것인지, 그런 설명보다 먼저 확 다가온 이미지가 있었다.

높다란 담들이 쳐진 좁은 골목이었다. 톱날 같은 불안이 작고 단단한 회오리바람처럼 사방을 할퀴며 쌩쌩 달리고 있었다. 불안이 지나간 담벼락엔 무섭도록 외롭고 절망스러운 기운이 새어나왔다. 그때 내 청춘이 불안해서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이상이 세상을 떠난 지 80여년이 된 오늘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광복이 되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며 대통령은 G20 정상회담에 나가는데, 그 옛날 이상의 숨통을 옥죄던 식민지는 정말 사라진 것일까.

여성이라는 식민지, 비정규직이라는 식민지, 흙수저라는 식민지... 건축계에도 그런 식민지가 많다. 갈수록 새로운 식민지가 생겨나는 오감도의 현실에서, 그래도 불끈 힘주어 쥐고 싶은 이상의 글 한 대목.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 '날개', 1936)  

그런데 이 시대에 그냥 날아서만 될까.
날더라도 남들 따라 날지 말고 자신의 방향을 찾아 날자꾸나.
그렇게 날았다 해도 때로는 방향을 과감히 바꾸어 날자꾸나.
약한 날개일수록 혼자 날지 말고 연대해서 날아보자꾸나.  


태그:#이상, #근대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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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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