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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 기자 말

일본 최고 건축가들과 도시계획가들이 모인 곳, 만주

다롄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본사
 다롄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본사
ⓒ 중국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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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행 열차는 신의주를 지나 압록강 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땅과 다가오는 풍경 사이, 객차 안은 저마다의 사연과 감상으로 술렁거렸다. 23살의 이천승은 등 뒤로 사라지는 조선을 돌아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벌판만 응시했다. 벌판 위에 들어설 온갖 새로운 건물을 상상하면서.

그는 윗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은 금시계, 경성고등공업학교(아래 경성고공)가 전교 수석 졸업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입학할 때도 차별 졸업할 때도 차별이라던 경성고공에서, 이천승은 건축과가 아닌 전교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막상 금시계를 받고 나자, 그는 그것을 얻기까지 감내해야 했던 차별이 징글징글해졌다. 졸업 후 몇 달간 박길룡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조선도 일본도 아닌 곳, 그러면서 더 넓고 더 새로운 건축을 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고민하던 그는 결국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아래 만철) 입사 시험을 보고 합격했다.

만주와 만철은 경성고공의 수재였던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만주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몰락한 농민층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개척하고 정착했던 간도. 정치적 망명자들이 항일 독립운동을 하던 변방. 그 생존과 저항의 만주는 애당초 그의 안중에 없었다.

이천승이 선택한 만주는 1930년대 '만주 붐'이 일어나던 만주국이었다. 그가 만주에 간 것은 1933년,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만주국을 세운 후였다. 한창 대규모 경제 투자와 만주개발이 시작되던 때였다.

일본 최고의 건축가들과 도시계획가들이 모여들었다. 대중의 저항 없이, 마치 텅 빈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프랑스의 오스망 파리개조 못지않은 근대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새롭게 조성된 도시환경은 오히려 도쿄가 못 따라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선진적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최고를 꿈꾸는 건축가와 기술자를 끌어당길 만한 환경이었다.

만주국은 일본인, 만주인, 조선인, 한족, 몽골인이 다 평등하다며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선전해댔다. 포장된 허상이었지만, 민족차별에 치이던 식민지 엘리트 청년이 혹할 만한 조건이었다.

그곳에 만철이 있었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러시아의 남만주 철도 경영권과 철도부속지를 차지했다. 그걸 기반으로 설립된 만철은 일제의 식민지 경영을 위한 실질적인 국책회사였다.

만철은 철도사업뿐 아니라 광업, 해운, 항만, 부두, 제철, 호텔, 병원, 학교 등 이윤이 될 만한 사업은 도맡아 했다. 만주국의 수도가 된 신징(新京, 현재 장춘)의 '국도건설계획'과 펑톈(奉天, 현재 선양)의 '도시건설계획' 등 도시계획까지 만철이 주도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10년 근무, 대표작은 다롄역사, 하지만...

이천승은 만철에서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설계, 구조, 도시계획까지 두루 경험했다. 그의 곁에는 자극제도 있었다. 일본 건축계를 이끌었던 동경제대 출신의 동료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동경제대에서는 가르치지만 경성고공에서는 배울 수 없는 고급 지식들을 채워나갔다.

그는 만철에서 10년간 근무했다. 그동안 참여했던 프로젝트는 다롄의 간징쯔발전소, 다롄역사(驛舍), 신징역사(驛舍), 다롄과 펑톈의 야마토호텔, 투먼(圖們)철도공장, 신징도시계획, 관동군청사 등이다. 그 중에서 이천승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것은 다롄역사였다. 훗날 그는 이런 사연을 소개했다.  

"내가 자력으로 처음 했던 것은 만철로 온 지 5년 만에 대련역 역사설계와 감독을 한 것이었다. 회사에서 각 부별로 현상모집이 있었는데 내가 주도한 우리 그룹의 안이 좋은 평을 받아 채택되었다. 대련역 역사 사진을 가지고 박 선생님(박길룡)께 찾아왔더니 선생님께서는 미리 건물의 스타일을 보고 내가 설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면서 흐뭇해 하셨다."(이천승,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대한건축학회지, 1975. 07)

낙성식 당시의 우에노 역사(왼쪽)와 다롄역사
 낙성식 당시의 우에노 역사(왼쪽)와 다롄역사
ⓒ 위키백과, 중국 바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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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 자료는 좀 다르게 말한다. 만철은 1924년부터 다롄역사 설계공모를 시작했고, 최종 당선작은 오오타 무네로오(太田宗郎)가 낸 것이었다, 착공은 1935년이고 준공은 1937년이었다.    

두 이야기의 간격을 최대한 줄여본다. 이천승은 입사 연차나 공사 연도를 착각했고, 최종 당선작은 착공 직전에 결정되었다고. 일본인은 그가 속한 설계부서 리더이고, 그는 최종 응모안에서 눈에 띌 만한 입면 같은 것을 제안했을 거라고. 그래도 미심쩍은 것은 다른 물증 때문이다.

다롄역은 완공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였다. 역사의 공간은 기능적이고 합리적이며, 형태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더니즘 풍이었다. 가장 큰 특징은 공항처럼 승객의 승하차 동선을 층별로 분리했다는 것.

그런데 이 방식은 이미 1932년에 개축한 도쿄 우에노역사에 적용된 것이었다. 우에노역사와 다롄역사의 구성 방식도 유사하다. 이쯤 되면 자부심 넘치는 그의 사연은 무색해진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그는 주요 설계보다는 공사에 필요한 실시설계와 공사감독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1943년 귀국,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 취직

1940년에는 중국에 세우는 '충령탑' 현상설계에 응모하여 가작을 했다. 응모작은 모두 1700점이나 되었다. 일본 육군정보부에서 주관한 현상설계였고,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한 탑이었다.(김정동,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대원사, 2001)

그때 그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누구를 위한 설계를 했던 것일까. 그의 만주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투먼에 있는 철도공장 일을 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조선인을 만났고, 비로소 독립군의 활동과 국내 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단다. 그때가 만주에 온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만주 붐'이 일어났던 그 시기는 조선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만주에 왔다. 과거와 달리 만주내 도시 이주자가 급증했고 민족단체도 형성되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다롄, 펑톈, 신징, 하얼빈은 교통과 사람이 몰리는 곳이었다.

만철 본사는 신징으로 옮기기 전까지 다롄에 있었다. 항일 운동가들이 법정투쟁을 벌였던 다롄지방법원도 다롄에 있었다. 그들이 옥중투쟁을 벌였던 뤼순감옥도 다롄 지역이었다. 그런데도 8년 동안 조선인을 만난 적도, 독립운동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다니.

그는 만주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살았을까. 그는 나라를 잃은 해에 태어났고 줄곧 식민교육을 받았다. 유독 엘리트 의식이 강했고 기회와 출세를 위해 만주에 왔다.

만주에서 그의 신분은 제국의 시민, 일본에 대한 심리는 식민지인, 중국에 대한 시선은 일본인, 오히려 조선에서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내면화된 일본인이 되거나 스스로를 조선계 일본인쯤으로 여기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만주지방이 점점 어수선해지자 그는 1943년에 귀국을 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거리는 없었다. 조선에서 그가 선택한 곳은 박흥식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였다. 박흥식은 반민특위에 1호로 체포된 매판자본가였다.

조선비행기공장은 전투기 제작을 목적으로 설립된 군수공장이었다. 강제 징용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천승도 그런 이유로 왔고, 안양 비행기 제조공장과 격납고를 설계했다. 김태식, 김중업, 이희태 등 광복 후 한국건축계를 이끌었던 건축가들도 그곳에서 일했다. 

시민회관 신신백화점 국제극장 설계, 지금은 모두 사라져

광복이 되자 그는 활개를 폈다. 만철에서 쌓은 남다른 경험은 차별화된 경쟁력이 되었다. 그가 만주국의 수도인 신징도시계획 작업팀에 있었을 때, 새로운 분야인 도시계획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1946년 그는 이희태와 '도시계획연구회'를 개설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도시문제와 주택문제를 다루는 연구소였다.

1950년대 서울시도시계획과 1960년대 남서울도시계획을 입안하고, 고려대학교 녹지캠퍼스 마스터플랜과 기본설계 등 건축설계와 도시계획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했다. 1950년에 국회전문위원으로 위촉되어 건축법, 건축사법, 도시계획법 등의 초안을 만들어 건설관련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1961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시민회관 낙성식 기사
 1961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시민회관 낙성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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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는 경성고공 후배인 김정수와 '종합건축연구소'를 개설했다. '종합'이란 이름처럼, 건축계획, 설계, 구조, 전기, 설비, 도시계획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대형 설계조직이었다. 이런 형식의 설계사무소도 한국 최초였다. '종합건축'은 탄탄한 인맥으로 구성되었고, 선후배 건축가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경영했다.

'종합건축'의 주요작품은 시민회관(1956, 화재로 소실), 신신백화점(1956, 철거), 국제극장(1957, 철거), 명동성모병원(1958), YMCA본관(1960), 장충체육관(1963), 연세대학생회관(1966), 조흥은행 본관(1966), 국회의사당(1969), 한국과학원(1972), 서울대중앙도서관(1972), 서울서부역사(1974), 한국증권거래소(1975), 국회도서관(1981), 국립중앙박물관(1982), 한국조폐공사(1985), 목동청소년회관(1986)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이 많다.  
그 중에서 이천승의 대표작은 시민회관, 신신백화점, 국제극장 등이다. 이 세 건물은 현재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시민회관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건물로 유명했다.

원래 이름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를 따서 우남회관이었다. 명칭에 대한 반감과 공사비 문제로 공사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다. 4·19혁명 후 '시민회관'으로 개명되었고, 착공한지 5년만인 1961년 10월에 완공되었다.

기념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로에 면한 부분을 10층 높이의 탑 모양으로 세웠다. 1972년 화재로 소설되었고,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신신백화점은 2층 높이의 임시 건축이었지만, 아케이드 형식과 커튼월 구조를 도입한 최초의 쇼핑몰이었다. 국제극장도 커튼월로 밝고 가벼운 느낌을 주었고, 최초로 객석을 스타디움 형식으로 설계했다.   

이천승이 설계한 국제극장
 이천승이 설계한 국제극장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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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195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건축부를 신설하고 건축부 심사위원을 맡았다. 건축이 예술분야임을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57년에는 새로 창설된 '한국건축작가협회'(현재 한국건축가협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한국건축작가협회'는 건축예술과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점에서 기존의 건축학회와 달랐다.   

건축설계, 도시계획, 건축법, 건축단체, 여러 대학의 건축 교육까지, 그는 만능 건축가에 건축계의 개척자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이 대단한 업적 이면에 비하인드스토리가 있다.

흔히 '종합건축'은 이천승과 김정수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래는 건축학회 이사진과 건축가들이 단합하고 김윤기가 있던 교통부가 지원해서 만든 설계사무소였다. 설립 목적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발 빠른 전재복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몇 개월 후에 이천승과 김정수의 개인 설계사무소가 되었다. 설립 취지가 어긋나자 창립 멤버들은 나갔지만, 회사는 학회의 지원 덕에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이광노, 나의 건축수업, 건축가, 9306).

그가 심사위원을 맡았던 현상설계에 '종합건축'이 응모하고 당선까지 되는 일도 있었다. 동료 건축가들의 회고담을 보면 그는 드라마에 나올 만큼 캐릭터가 강하다.

비상한 머리와 문제해결 능력, 설계 뿐 아니라 구조도 척척박사, 투철한 모더니스트, 활달한 성격. 댄디즘의 멋쟁이, 목표에 대한 강한 집념, 식지않는 우월감과 자부심,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였다.

모던보이의 멋과 욕망은 펄펄 살아있는데,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감과 윤리의식은 글쎄올시다이다. 그는 시대의 늪과 빙판에 빠지지 않고 표면 위를 매끄럽게 잘 빠져나갔다. 살아생전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한국의 현대건축가 이천승-한국의 현대건축작가 김중업-한국의 국제건축가 김수근"이라고.(권태문, 한국의 건축가 이천승, 건축사, 9702)

당시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오늘날 여기에 동의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박길룡, 김중업, 김수근만큼 그를 기억할 수 있을까. 시대상은 보여도 시대의식은 보이지 않는 삶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태그:#근대건축가, #이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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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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