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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울의 추'
내가 이 연재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내 저울의 추'에 대한 문제다. 오래 전 베이징에서 만난 당시 93세의 독립운동가 이명준 선생은 "이 세상에 '진선진미'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그 비율이 7:3이냐, 5:5냐, 3:7이냐가 문제다"고 '금과옥조'와 같은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내 마음속에 선과 악을 다 지녔으며, 빛과 그림자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같은 필부들로 다만 내가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미 지난날의 모습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는 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피차 많이 변했으리라 믿으며,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데 다만 한 글감으로 썼음을 밝힌다. - 기자의 말

어느 헌법재판관의 도덕률

지난 이명박 정권 때의 일이다. 2013년 1월, 헌법재판소 소장으로 임명된 이동흡 헌법재판관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자진 사퇴했다. 그는 재직 중 3억여 원의 특정업무경비 일부를 자신의 개인 통장에 넣어 사적으로 썼다는 의혹에 몹시 시달렸다. 게다가 아파트 위장 전입, 증여세 탈루 등의 논란에도 휩싸여 악화된 국민 여론을 이기지 못해 결국 그는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한심한 문제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는 그의 도덕률과 잣대로는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부정이냐고 항변하는 대목이었다. 더욱이 당시 여당 원내대표는 그런 재판관을 성원까지 했다가 거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자기가 전 현직 대통령보다는 더 깨끗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모양이었다. 하기는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의 재산은 그들보다 적으니까(관련 기사 :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어느 공직 후보자를 보고).

내가 부대 생활을 하며 지켜보니까 말단 소총소대원보다는 중대 행정요원들이 그 세계에서는 특권층이었다. 그런데 내막을 알고보니 그들의 애로도 무척 컸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중대장이 중대행정 근무비를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사적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대원들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중대장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자기 주머닛돈을 털어 쓰고 있었다. 심지어 중대 행정병들은 10킬로미터가 넘는 대대본부나 연대본부 문서 수령 길에도 버스를 두고 줄곧 걸어 다녔다. 그러자 중대행정요원 가운데 약은 자는 소대원들을 편취 또는 갈취하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의 휴가나 진급이 주 미끼였다.

그 시절에는 월남파병이 시작됐다. 파월 초기 일부 병사들은 월남에 가서 한 밑천 벌어오겠다고 파월 지원에 뒷돈을 썼고, 후기에는 월남에서 전사자가 속출하자 파월에 차출되지 않으려고 뒷돈을 썼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펜대 잡은 이들은 이래저래 검은 돈을 챙겼다.

집단의 지도자가 썩으면 그 아래도 썩기가 마련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생겨난 말은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으로 곧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헌법재판관조차도 그런 기초적인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나라 전체가 시궁창처럼 그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그가 무슨 재판관이었다는 말인가? 바로 헌법재판관이 아니었던가? 이만저만한 개그가 아니요, 현대판 탐관오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기네스북에 오름직한 블랙 코미디였다.

사실 사법부는 양심의 최후 보루요, 또한 헌법재판관은 그 가운데서도 최상위에 있어야 할 거룩한 분이 아니신가.

중대장의 호출

그 무렵 진관사 들머리 부대에서 복무할 때 기자, 배경은 북한산이다(1969. 7.).
 그 무렵 진관사 들머리 부대에서 복무할 때 기자, 배경은 북한산이다(1969.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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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 새벽같이 중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박 소위, 서울 지리에 밝지?"
"네, 대충은 압니다. "

"그럼 됐어. 내 당번병 오장복(가명) 이병 그 자식 말이야. 집안에 사정이 있다고 해서 내가 지휘관용 일주일짜리 증을 끊어줬더니 귀대날짜가 벌써 사흘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어. 박 소위가 서울 나가서 그 자식을 좀 잡아오도록 해."

그날 중대장은 평소와는 달리 여간 나근나근치 않았다.

오장복 이병이라면 우리 중대로 전입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새까만 졸병이었다. 그가 우리 중대로 전입해 온 다음날, 그의 아버지가 중대장을 면회하고 갔고, 그날부터 중대장 당번병(전령)이 됐다.

그동안 중대장 당번병이던 정 상병은 화기소대로 밀려났다. 중대 행정반 요원들의 쑥덕거림도 많았지만 당번병 인사권은 중대장 고유 권한이었다.

"지금 곧장 출발해서 그 자식 붙잡는 대로 즉시 데리고 와. 검문소 헌병들한테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네. 알겠습니다. "

중대장은 예삿날과는 달리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날 따라 말씨조차도 사근사근했다.

중대장 강철 대위, 그는 '더티'(Dirty)한 상관이었다. 그는 나보다 두어 살 위로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무자비하게 잔인했다. 자신의 출세와 치부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연대장, 대대장, 보안대장, 심지어 보안대 파견 사병에게까지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렸다.

내가 전입 전에 충북 진천 출신의 신아무개 하사는 중대 ATT(기동훈련) 때 야간 훈련 중 구덩이에 발을 헛디뎌 발목을 다쳤는데도 후송시키지 않고 자대에서 치료하다가 때를 놓쳤다. 내가 전입할 때도 다리를 절름거렸다. 중대장은 그런 식으로 중대 내의 안전사고를 죄다 덮어 버려 마침내 무사고 중대 표창을 받았다. 매달 2만여 원 나오는 중대 행정비도 자신의 주머니에 넣자 행정반원들은 각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중대 행정비나 필요한 사무용품을 사다 썼다.

그러다 보니 행정 요원들은 조그마한 언턱거리를 빌미삼아 힘없는 소대원들에게 손을 벌리고, 소대원들은 집으로 송금을 요청한다. 한 집단의 지도자가 부도덕하면 그 부정의 고리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중대장은 내게도 상납을 은근히 유도했지만, 끝내 묵살하자 헤어질 때까지 아주 치사하게 골탕을 먹였다.

정치를 하라

어느 하루 한밤 중에 안 하사가 잔뜩 취해서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내 BOQ로 들게 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도 정치를 좀 하십시오."
"정치? 군인이 무슨 정치냐? 군인이 정치를 하면 나라가 망해. 군인은 그저 우직해야 돼."
"세상을 너무 모르십니다. 1소대장님은 중대장님께 상납을 아주 잘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닭도리탕이나 닭죽 같은 걸 중대장 숙소로 보냅니다. 우리 중대가 여기 오기 전 도봉산 어귀에 있을 때부터 1소대는 비봉 파견 근무를 했고, 앞으로도 우리 중대가 이동을 하면, 또 1소대가 파견 나갈 겁니다."

"누가 그래 ? "
"1소대원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편하기 위해 소대장한테 협조를 아주 잘합니다. 소대장님이 묵인해 주신다면 제가 알아서 상납 비용을 마련하겠습니다. 파견 나가서 한 달이면 1종(쌀)을 팔아 그 비용 충당할 수 있습니다."
"야! 난 그런 짓은 못해."

"소대장님은 홀몸이 아니십니다. 40명이나 딸려 있습니다. 소대원들 사기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1소대장 한 소위가 그럴 리가 없다. 네가 잘못 알고 있을 게다."

선임 1소대장 한 소위는 간부 출신으로 중대장 5기 후배였다. 소대장끼리 만나면 자기가 가장 앞장서서 중대장을 매도했다. 중대장이 연대나 사단으로 회의를 갈 때 지프차가 뒤집어져 후송됐으면 좋겠다는 막말을 했고, 만일 전쟁만 일어나면 자기가 오발을 가장해서 해치우겠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야비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두고 보십시오. 제 말이 틀렸는가."

안 하사는 볼멘소리를 남긴 채 내 숙소를 나갔다. 그 며칠 후, 어느 날 밤 급한 보고로 중대장 BOQ로 갔다가 한 소위와 중대장이 양주병을 앞에 놓고 히죽거리면서 닭다리를 뜯는 걸 목격했다.

첫 외출이었다. 얼마나 그리던 외출인가. 버스로 박석고개를 넘자 눈물이 쏟아질 만큼 정겨웠다. 하지만 나는 휴가 미귀대자를 잡으러 간다는 생각에 미치자 들뜬 마음이 사라졌다.

휴가 미귀대자

오 이병의 집 주소는 성동구 금호동이었다. 그 무렵 금호동은 동네도 넓고 번지도 뒤죽박죽으로 산비탈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촘촘했다. 골목도 헝클어진 실타래였다.

나는 고교시절 신문배달로 집 찾는 데 이력이 났지만, 금호동 산동네는 원체 복잡한 골목이라 1시간 여 헤맨 끝에 간신히 오 이병 집을 찾았다. 허름한 가구공장에 딸린 단칸방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잠을 자고 있었다. 오 이병은 나를 보자 처음엔 잔뜩 겁먹은 표정 이었지만, 도망갈 생각도 않고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 이병! 널 데리러 왔다. 왜 제 날짜에 귀대하지 않았나?"
"…."
"너 귀대를 못한 이유를 솔직히 말해 봐."
"제가 잘못했습니다."
"뭘?"

오 이병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군대에 가서 학벌이 낮고, 집안이 가난하면 대부분 전방 소총소대로 떨어지지요. 사실 돈 있고, 백 좋은 놈들은 미군부대 카투사나 육본 등 후방으로 빠지지 않습니까?"
"다 그런 건 아닐 테지. 그래서…."

"논산훈련소에서 내버려 뒀더니 101보(보충대)로 떨어지대요. 가만히 있었더니 결국은 소총중대로 떨어졌어요. 중대장 전입신고 후 면담할 때 구라를 좀 풀었습니다. 아버지가 뭘 하느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가구공장을 경영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이 공장의 경비를 맡고 있습니다. 중대로 떨어진 다음날 아침, 가설 나가는 통신병에게 담뱃값을 줘서 집에다 연락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귀대치 못한 사유

"이튿날 점심 무렵 아버님이 득달같이 부대로 달려왔어요. 중대장님에게 담뱃값을 좀 드렸나 봐요. 그게 잘못된 겁니다. 그 담뱃값 때문에 제가 중대장 따까리(당번병)가 된 겁니다."
"잘못된 거라니? 네 소원대로 된 게 아니었나?"

"아니에요. 처음엔 소대로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중대장님 식성은 보통 까다로운 분이 아니에요. 부대 부식은 아예 싫대요."
"그래서…."

"보름 만에 아버지가 주고 간 비상금이 떨어지대요. 자연 부식이 나빠질 수밖에. 그러자 중대장님이 집에 한 번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묻더군요. 새까만 졸병 놈을 집에 보내 준다는 데 싫다는 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중대장님은 일주일짜리 증을 끊어 주대요. 제가 부대를 떠나려고 신고를 하자 중대장님은 주머니에서 돈을 2만 원을 꺼내주더군요. 그동안 수고했다고 차비로 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귀대할 때 야외용 전축을 사다 달라고 하더만요. '아차' 싶었지만 집에 오고 싶은 마음에 그냥 대답을 해 버렸어요.
"…."

"휴가 나온 다음 날 청계천 전파상에 가서 값을 알아봤더니 중고품도 최하가 6만 원 하더군요. 부모님께 손 벌릴 염치가 없어 말씀을 못 드렸어요. 중대장님이 주신 돈은 일주일 놀면서 다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귀대를 못 하고, … 강도짓이라도 해서 야외전축을 사고 싶었지만 차마…."
"…."

당시 중대 행정병이었던 안연식 병장(왼쪽)과 함께(1970. 5.)
 당시 중대 행정병이었던 안연식 병장(왼쪽)과 함께(1970.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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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중대장은 지휘관용으로 주는 매월 두 장의 휴가증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다. 그 휴가증은 포상용이나 긴박한 처지의 중대원용이다. 중대 행정반 남아무개 병장도 그 휴가증을 쓰고 중대장에게 방수용 시계를 사다 줬다는 소문이 틀린 얘기가 아닌 것 같았다. 오 이병 아버지가 새파랗게 놀라서 왔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정을 자초지종 다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는 옛 어른 말씀이 하나도 안 틀려."

아버지는 사무실에 가서 급전을 구해 왔다.

"중대장한테 받은 돈만 갚아라. 앞으로 이런 휴가는 다시는 나오지 말고."

나는 오 이병을 데리고 곧장 귀대했다.

"더러운 세상이야요."
"인마! 세상을 편하게 살겠다는 너한테도 책임은 있어."

오 이병은 귀대 즉시 화기소대로 내려가고 정 상병은 제자리로 복귀했다. 강철 중대장의 야외전축 해프닝은 그렇게 끝났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군의 생명이다. 하지만 나는 부당한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다는 양심의 명령에 따르겠다.

아! 사람들은 왜 대부분 물질에 약할까? 그럼 난 어떤 사람인가. 나는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내 소대원에게 공정했는가?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기자보다 한 달 늦게 전입한 박한진(오른쪽) 소위(1969. 8.)
 기자보다 한 달 늦게 전입한 박한진(오른쪽) 소위(1969. 8.)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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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 이후로 갑오에 이르는 10년의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천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이 되었다. 살 수 없는 민중이 혁명 난을 일으킴은 자연의 추세였다."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8권 158쪽 <한국말년사>

전입 한 달 후 무렵 파견 나갔던 화기소대가 귀대하자 간보 출신 박한진 소위가 새로 우리 중대에 전입해 소대장을 맡았다.

그는 성격이 매우 활달하고, 시원한 친구로 진리나 순리에 승복할 줄 아는 매우 직설적인 정의파였다.

그의 전입으로 나는 말뚝 일직에서 격일 일직을 맡게 됐고, 아울러 5분 대기조 역할도 격일로 나눌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중대장 강철 대위에게 그동안 일방으로 당한 횡포를 다소 견제할 수 있었다. 그는 참 고마운 전우였다.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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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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