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하루> 중 한 장면. 은희는 남산 산책로에서 남자친구 현오를 만난다.

<최악의 하루> 중 한 장면. 은희는 남산 산책로에서 남자친구 현오를 만난다. ⓒ CGV아트하우스


연기 수업을 마친 뒤 서촌 거리로 나선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 분). 그 앞에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 분)가 나타나 길을 묻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신다. 이내 료헤이와 헤어진 은희는 남산 산책로에 올라 촬영 중 잠시 짬을 낸 배우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와 짧은 데이트를 한다. 은희는 현오의 과거 여자 문제로 그와 다툰 뒤 다시 혼자가 되고, 이번에는 자신의 과거 남자인 운철(이희준 분)과 마주친다. 그리고 은희의 하루는 어느새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여러모로 효율적인 작품이다. 제목대로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루다 보니 로케이션은 남산 산책로와 서촌 골목 일대가 전부고, 서사를 이끄는 주연급 배우 넷의 연기는 (연출에 많은 품이 들지 않는) 일상적인 공간에서 대사 위주로 표현됐다. 예산은 1억5000만 원이었고 촬영은 16회차 만에 끝났다. 제작 과정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저예산 독립영화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에서는 신기하게도 전혀 '싼 티'가 나지 않는다. 고르고 골라 속이 꽉 들어찬 과일처럼, 이 작은 영화의 밀도는 실로 엄청나다.

 <최악의 하루> 중 한 장면. 운철은 은희가 올린 트윗을 보고 남산까지 찾아온다.

<최악의 하루> 중 한 장면. 운철은 은희가 올린 트윗을 보고 남산까지 찾아온다. ⓒ CGV아트하우스


"최소한의 관계 속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최악의 하루>가 이뤄낸 성취는 극중 료헤이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설명하는 이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은희가 세 남자를 차례차례 만나는 동안 관객은 오히려 은희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된다. 그녀는 낯선 외국인 남성을 거리낌없이 돕는 해맑고 친절한 한국여자였다가, 이내 연인과 알콩달콩 풋풋한 연애를 이어가는 귀여운 여자친구가 되고, 어느 순간에는 돌연 양다리를 걸치는 'X년'이 된다. 은희에 대한 단서들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중에서 뭐가 '진짜'인지는 묘연하다. 자신을 떠나는 은희를 향해 "어떻게 진실이 진심을 이기느냐"고 따져묻는 운철처럼, 영화는 하나의 분명한 '진실'대신 불확실하지만 무한한 '진심'을 선택한다.

극중 은희가 료헤이와 현오, 운철을 오가며 나누는 대화들은 <최악의 하루>가 그리는 '진실 없는 진심'의 주된 동력이다. 은희는 세 남자 앞에서 그때그때 나름 최선의 방법으로 상대방과 소통한다. 상대의 진심을 떠보거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어떤 말이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그건 은희를 대하는 세 남자도 마찬가지다. 재미있는 건, 하나의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 다른 대화를 통해 그대로 재생산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선배 배우에게서 "귀여우면 다야?"라는 말을 들은 은희가 현오에게서도 똑같은 얘길 듣고, "알아, 나도 내가 병신같다는 거"라는 현오의 말을 은희가 운철 앞에서 스스로 되뇌이는 장면 등이다. 이들 대사는 상황과 화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게 읽히는데, 이게 곧 관객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유희가 된다.

 <최악의 하루> 중 한 장면. 로헤이 역을 맡은 이와세 료와 한예리의 연기는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연상시킨다.

<최악의 하루> 중 한 장면. 로헤이 역을 맡은 이와세 료와 한예리의 연기는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연상시킨다. ⓒ CGV아트하우스


모두가 서로 능숙하게 진심을 전하는 가운데, 기본적인 영어로 밖에 대화할 수 없는 료헤이와 은희의 관계는 그 어설픔 때문에 오히려 이상적으로 느껴진다.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에서 일본을 찾은 혜정(김새벽 분)과 그의 가이드를 맡은 유스케(이와세 료 분)의 에피소드가 연상되는 지점이기도 한다. "마치 신이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한"은희의 '최악의 하루'속에서, 둘의 관계는 그렇게 유일한 안식처가 된다.

은희는 료헤이에게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의 연기는 진짜지만, 연극이 끝나고 나면 가짜가 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맺음을 함께하는 료헤이와 은희가 극중에서 각각 "거짓말을 만드는"소설가이고 "거짓말을 하는"배우라는 점은 미묘한 뒷맛을 남긴다. 어쩌면 <최악의 하루>는 거짓말을 일삼는 인물들로 가득한 작품인 동시에, 스스로가 거짓말(픽션)이란 사실을 당당히 내보이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영화 말미, "원하는 걸 들을 순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것"이라고 되뇌는 은희의 대사처럼 말이다. 오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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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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