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노동자들의 피땀 위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 혜택은 노동자에게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이다.

경제는 노동자들의 피땀 위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 혜택은 노동자에게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진중공업도 마찬가지이다. ⓒ (주)시네마달


동네 아저씨, 아줌마, 형이 떠오르는 푸근한 인상의 다섯 사람이 한 사진관에 모인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데, 잿빛 도는 파란 작업복만큼은 하나같다. 편하게 서로 안부를 묻고 웃음꽃을 피우다가 카메라 앞에 앉는다. 그리곤 주섬주섬 각자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낸다. 라디오에 나온 여성 용접공 얘길 듣고. 공고 졸업 후 집을 사겠다는 꿈으로. 백수 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의 권유로. 이런저런 사연으로 조선소 노동자가 되었던 사람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운동을 이끈 김진숙, 박성호, 윤국성, 정태훈, 박희찬이 바로 그들이다.

영화 <그림자들의 섬>은 다섯 주인공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조 30여년의 기록을 되새기는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30대부터 50대까지 각기 다른 역사를 지나온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생활과 그들이 처한 환경을 폭넓게 다룬다. 연출을 맡은 김정근 감독은 2003년 김주익, 곽재규 두 노조원의 투신 사건을 계기로 한진중공업 노조와 인연을 맺었고, 2010년 정리해고 투쟁을 시작으로 5년여간 이들의 활동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전적으로 노조원 개개인의 입장에서 한진중공업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내내 객관성을 잃지 않는 점은 인상적이다. <그림자들의 섬>은 자본과 기업의 횡포를 고발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많은 비중을 할애하지 않고, 시스템의 부당함 대신 그로 인한 개인의 상처와 각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이 작품이 단순히 '선전 영화'로 그치지 않고 대중을 움직이는 다큐멘터리 본연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이유다.

 198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 그녀가 없었다면 이 싸움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198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진숙. 그녀가 없었다면 이 싸움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 (주)시네마달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한진중공업 노조의 정점에 서 있는 여성 운동가 김진숙의 인터뷰는 특히 인상적이다. 그는 1980년대 "제대로 된 식당도 화장실도 없고 열악한 작업 환경에 하루가 멀다고 사람이 죽어 나가던" 한진중공업에서 처음 노조를 만든 에피소드를 전한다. "매일 퇴근하면 술 마시고 마누라 패면서도, 출근하면 새파란 관리자 앞에서 꼼짝도 못 하던 아저씨들"이 바뀌었다고. 그들은 "쇠파이프 들고 파업"에 나섰고, "수십 년 노동 속에서도 깨우치지 못했던 인간의 자존심을 처음 확인"하며 존엄성을 찾았다. 사람을 존중할 줄 알게 됐다. 김진숙은 눈을 반짝인다. 당시의 경험이 '인간 해방'이자 '노동 해방'의 기억으로 지금의 김진숙을 만들었단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진중공업 노조의 시작과 투쟁을 그리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최근 이루어진 정리해고를 다룬다. 부당한 처우와 열악한 환경을 견디며 대한민국을 조선 강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노동자들이 산업이 위축되자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모습은 '보호막 없는 자본주의'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규직 위주로 조직된 노조원들이, 승리에 도취해 미처 '보이지 않았던' 하청 노동자들을 향해 반성해야 할 점도 짚고 넘어간다. 사용자 측의 달콤한 회유에 노조를 탈퇴한 이들을 두고 배신감을 느끼는 동료들 사이에서 "노조 탈퇴서를 쓰는 마음이 더 괴로웠을 것, 그 마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며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김진숙의 말은 노조 활동의 현실적 제약을 내보이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처음엔 쥐똥 묻은 도시락 때문이었고, 위험천만한 작업대에서 떨어져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진숙을 비롯한 한진중공업 노조는 그렇게 '당연한'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한진중공업을 지나쳐 온 수천 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투쟁 위에 무임승차해 덕을 봤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나라 모든 '일하는 사람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우리 개인과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뉴스 속 머리에 빨간 띠 두른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나서 맨날 저렇게 싸우지?'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다면, 영화 <그림자들의 섬>이야말로 아주 적절한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는 25일 개봉.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는 그들. 스크린에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당연한 권리를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는 그들. 스크린에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 (주)시네마달



그림자들의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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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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