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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산빛이 참  맑기만 하다
▲ 지리산의 오월의 산빛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에 만난 산빛이 참 맑기만 하다
ⓒ 임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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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까마득한 옛 일이다. 친구들과 스물 세 살의 나이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리산 종주를 떠났었다. 그때 한 친구가 혈당 부족으로 산행 중 쓰러지는 일도 있었고, 산밥짓는 기술이 서툴러 삼층밥을 먹기도 하였다. 참으로 멀고 힘든길이 아니었나 싶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그길이 그리워진다. 언젠가 다시 그길을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힘들었던 기억이 너무 생생하여 망설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어느새 나이가 오십 중반이 되었다. 오월 연휴를 맞이하여 작심을 하고 아내와 함께 지리산으로 떠났다.

2016년 5월 4일 오전 6시 ktx를 타고 오송역에서 구례구역으로 향했다. 기차는 생각보다 분비지 않았다.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채 안되어 정시에 구례구역에 도착을 했다. 역앞에는 성삼재로 출발하는 버스가 한 시간 뒤에나(오전 8시 40분) 있었다. 역앞에서 잠시 두리번 거리자  택시기사가 다가오며 호객을 한다. 그러던 중 기차에서 함께 내린 한 부부가 함께 타고 갈 것을 제안한다. 택시 기사의 입담이 어찌나 좋은지 아니 탈 수가 없다. 시간도 돈도 절약할 겸 택시를 합승하기로 했다. 택시 요금은 3만 5천원, 일인당 약 9천원 정도인 셈이다.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가는길에 구례 시내에서 잠시 내려 깁밥을 몇 줄 샀다. 첫날 점심을 김밥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다. 택시기사는 말을 꺼내자마자 김밥도 예약해주고 지리산에 대한 정보를 막힘없이 쏟아낸다. 오랜시간 많은 등산객을 접하다 보니 눈치가 백단쯤은 되어 보인다. 

성삼재에 이르니 오전 8시 30분이다. 하늘은 맑으나 바람이 좀 세다. 등산화 끈을 고쳐메고 노고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택시에서 함께 내린 부부는 1박으로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다며 서둘러 올라간다. 아내와 나는 지리산 산빛을 깊숙이 응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노고단 숲은 아직 사월 초순의 모습이다. 귀여운 아기잎들이 다투워 내밀며 나뭇가지에 예쁘게 색칠을 하고 있다. 어찌나 귀엽고 보드라운지 그냥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되고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때아닌 단풍같은 붉은 빛들이 곳곳에서 쏟아지며 시선을 끈다. 오월에 단풍이라니! 이런 호기심으로 가까이 가보면 생명의 기운으로 넘치는 애기 잎들이 붉그레한 모습으로 잎을 키우고 있다. 마치 꽃잎처럼 말이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땅의 힘찬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지리산은 이렇듯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모든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위대한 숲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리산의 정상의 산속은 아직 애기 잎이 돋아나는 초봄이다
▲ 노고단 정상의 산속 지리산의 정상의 산속은 아직 애기 잎이 돋아나는 초봄이다
ⓒ 임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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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대피소에는 이미 올라온 등산객들이 자리를 잡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 얼굴에 쏟아지는 아침빛이 참 좋다. 모두가 영화배우처럼 멋진 모습이다. 대피소에서 돌계단을 밟고 곧장 노고단으로 올라섰다. 반야봉이 눈앞에 듬직하게 솟아 오른다. 앞으로 저 반야봉을 너머 천왕봉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반야봉 너머 능선길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어제 밤 강풍이 좀 수그러들며 노고단에 부는 바람은 부드러워 졌다. 바위에 앉아 마음 놓고 산아래 풍경을 바라보니 마음에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 온다. 마음을 짓누르던 잡다한 번뇌도 사라지고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물 한 모금을 먹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발아래 풍경이 막힘이 없이 참으로 시원하다. 언제 보아도 지리산은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고 편안하다. 노고단은 '할미'를 뜻하며 신라시대 때부터 국운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다.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영봉이기도 하다. 

노고단을 뒤로하고 돼지령을 거쳐 피아삼거리가 있는 임걸령을 향해 걸어간다. 오르막이 없어 산책길을 걸어 가듯 편안하다. 산을 오르는 수고가 없다면 이런 편안한 능선길의 호사를 누릴 수 있겠는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산길에는 산죽만이 변함없이 동행을 해 줄 뿐 방해자 하나 없이 고요하다. 이따끔 길가에 피어 있는 엘레지, 애기나리 등의 야생화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엘레지는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의 치마가 바람에 뒤집어 진 모습과 같다하여 먼로꽃이라는 별칭도 붙어 있다.

마릴린 먼로 꽃이 연화천으로 가는 길에 지천으로 피어 있다
▲ 엘리지 꽃 마릴린 먼로 꽃이 연화천으로 가는 길에 지천으로 피어 있다
ⓒ 임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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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걸령에 이르자 목이 마르고 허기가 돈다. 샘터 근처 널따란 바위에 걸터앉아 과일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삼도봉으로 향했다. 산속은 아직 오월이 오지 않았다. 애기 잎들만이 바깥의 날씨를 살피며 잎을 다투어 내밀기 시작한다.

삼도봉 바위에 이르자 분홍빛 진달래가 만개하여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진달래는 언제보아도 가냘프고 수줍은 봄 처녀다. 봄에 만난 분홍 빛은 단연 으뜸이다. 누구라도 만일 이 빛을 보게 되면 설레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 밤 강풍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꽃잎은 낙엽처럼 바닦에 수북히 떨어져 있고 그나마 달려 있는 꽃잎들은 지쳐 생기를 잃었다.

삼도봉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가 만나는 곳이다. 삼도봉에 올라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 많은 능선들이 다져진 근육의 몸으로 섬진강을 향해 길게 뻗어 있다. 산 이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은 산맥과 마음속의 심경이 펼쳐질 뿐이다.

삼도봉은 노고단에서 천황봉으로로 가는 길에 반야봉 아래에 위치해 있다. 반야봉을 등지고 남도를 내려다 보는 맛이 참 시원스럽다. 반야봉은 천왕봉 다음으로 높은 봉으로 석양의 낙조가 유명한 곳이다. 천왕봉 일출, 노고단 운해, 세석의 철쭉과 함께 지리산의 4경에 속한다. 

삼도봉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한 시가 넘어  화개재를 향해 출발했다. 성삼재에서 오전 8시 30분에 출발했으니 삼도봉까지는 4시간 쯤 걸린 샘이다. 주변 풍경과 야생화에 빠져 놀다 보니 예정시간 보다 산행시간(예정 3시간 30분)이 한 시간 정도 더 걸렸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가다 문득 친구가 혈당 부족으로 쓰러졌던 장소가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당시에 젊은 혈기만 믿고 산행 속도를 내다 좀 무리를 했던 탓이다. 친구는 사탕과 물 한모금을 먹고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 걸어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아쉽게도 오십을 채우지 못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다.

뱀사골로 내려가는 화개재를 지나 토끼봉으로 올라섰다. 간밤의 강풍이 얼마나 세었는지 아름들이 거목이 산길을 막고 넘어져있다. 진달래 꽃잎도 이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길가에 많이 떨어져 있다. 토끼봉은 사방에 바람막이가 없어 온몸으로 바람을 맞다 보니 더 심한 몸살을 앓은 것 같다.    

임걸령으로 가는 산길에 이름모를 야생화가 활짝 웃고 있다
▲ 돼지령에서 만난 야생화 임걸령으로 가는 산길에 이름모를 야생화가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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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토끼봉을 넘어 연하천으로 가는 길에는 야생화가 곳곳에 지천으로 피어 있어 걷는 이를 즐겁게 한다. 그들도 바람을 얼마나 맞았는지 꽃잎의 모양이 가지각색이다. 토끼봉에 부는 바람은 아직 힘이 있다. 바람소리가 숲속을 큰 소리로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산등성이를 계속 오르내리고 있지만 쉼없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땀이 금방 식어버리고 만다.

오늘 목적지는 연하천 대피소다. 목적지를 불과 1km를 남겨 두고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 걸음이 더 불편하다. 이제 산속에 곱게 핀 야생화도 관심이 없다. 8시간 이상을 걸었으니 발병이 날 만도 하다. 아내는 힘이 부쳐 점점 말이 없어지고 목적지만 반복해 물을 따름이다. 결국 무아의 지경이 된 샘이다. 오로지 머리에는 목적지만 존재할 뿐 아무 생각이 없다. 

명선봉을 넘고 얼마되지 않아 연하천 대피소가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왠지 다리는 더 아프다. 다리를 질질 끌며 연하천 대피소에 이르자 오후 다섯시가 되어 가고 있다. 대피소가 얼마나 반가운지 마치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 같다.

대피소는 남녀방이 구분되어 있어 남녀가 함께 숙박을 할 수가 없다. 취사장도 있지만 오염을 막기 위해 설거지도 휴지로 해야하고 치약이나 비누를 써서 세척을 해서도 안된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대피소에는 라면을 비롯한 간단한 음료와 밑반찬 그리고 구급약이 있다. 물론 필요하면 돈을 주고 구입을 해야한다.

저녁을 햇반과 라면을 넣어 끓여 먹고 9시에 잠을 청하니 잠은 오지 않고 다리만 쑤셔온다. 성삼재에서 대피소까지 12km를 넘게 걸어 왔으니 아픈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다리를 쭉 펴자 피로가 한꺼번에 기분 좋게 밀려온다. 대피소에는 외국(체코)에서 온 젊은 남녀들도 보인다. 그들은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노고단으로 가는 길이라며 지리산 산행을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첫날 산행 일정

구레역 (07:50) - 성삼재 (08:30) - 노고단 (10:00) - 돼지령 – 임걸령 –노루목 – 삼도봉(12:30) - 화개재 – 토끼봉 – 명선봉 –연하천대피소( 17:00)


태그:#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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