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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이 지나고 봄볕 완연한 날입니다. 벚꽃이 사태로 쏟아지는 아름다운 날에 몹시 추웠던 지난 겨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016년 설을 며칠 앞둔 지난 2월 3일 오후 함세웅 신부님은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활동가들을 불러 앞세우고 용산참사 사건의 피해자 한 분의 집을 조용히 방문했습니다. 서울 동작구 상도4동 마을버스 12번 종점 끄트머리, 산자락 폐허더미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철거반대' 깃발을 꽂은 집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상도4동 철거민대책위원장으로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 올라 끝까지 연대투쟁에 참여한 천주석씨입니다. 진압 과정에서 얼굴이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다시 구속되어 4년 가까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언덕 위 이 집에 상도4동 철거민대책위원장 천주석씨 가족이 아직 살고 있다
▲ 서울 상도4동 철거현장 언덕 위 이 집에 상도4동 철거민대책위원장 천주석씨 가족이 아직 살고 있다
ⓒ 인권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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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4동 철거현장은 벌써 철거 9년째를 맞이하지만, 복잡한 토지 소유관계, 조합비리, 재개발 업체의 난립 등으로 재개발이 중단되어 사실상 쓰레기 폐허더미로 변해 있습니다. 수도 서울의 한복판, 대명천지 이런 경우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함세웅 신부와 저희 일행이 방문한 집을 비롯 현재 약 9가구가 갈 곳을 몰라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철거지역 주민들과의 대화는 시종 무겁게 진행되었습니다. 2008년 강제 철거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한 아주머니가 어렵게 말했습니다.

"2008년 철거 당시 딸 셋을 기르고 있었어요. 용역들이 새벽에 들이닥쳐 잠옷 바람으로 딸 셋이 길바닥에 서 있었습니다. 여경들이 왔지만 아무도 애들을 보호하지 않았어요. 내가 10분만 시간을 주면 딸애들 옷이라도 입혀 나오겠다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 한 장 덮어주지 않았습니다. 사춘기 애들인데 아침 학교 등교 시간에 동네 친구들이 그렇게 애들이 길바닥에 서 있는 것을 다 보았어요. 막내 아이가 그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지금 좀 문제가 있어요. 도움이 필요해요. 현재 상도4동 철거현장에 9가구 정도가 살고 있어요. 모두들 갈 데가 없어 이렇게 버티고 있네요." 

서울이지만 시골처럼 인심이 좋아 날마다 저녁이면 이웃과 음식을 나누었고, 지금도 정을 못잊어 떠나간 이웃들이 철거현장을 찾아온다는 천주석 위원장
▲ 지난 설 전 상도4동 철거현장을 방문한 함세웅 신부 서울이지만 시골처럼 인심이 좋아 날마다 저녁이면 이웃과 음식을 나누었고, 지금도 정을 못잊어 떠나간 이웃들이 철거현장을 찾아온다는 천주석 위원장
ⓒ 인권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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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사건이 일어난 때가 2009년 1월이었습니다. 용산 남일당 철거민연대투쟁은 이곳 상도4동과 같이 당시 수도권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던 뉴타운 재개발에 저항하던 여러 지역 철거민(용산 신계동, 인천 도화동, 수원 천천지구, 남양주 지금동, 성남 단대동, 용인 신봉동, 사당동 정금마을, 순화동 등)들이 용산4구역 철거민들과 연대해 강제철거 반대, 생존권 보장, 재개발 정책개선 등을 요구하며 용산역 앞 남일당 건물에서 연대 농성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985년 6월 서울 구로공단에서 일어난 '구로동맹파업'을 연상하게 할 만큼 철거민 운동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연대투쟁이었습니다.

용산참사 7주기 추모집회
 용산참사 7주기 추모집회
ⓒ 인권의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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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투쟁이 참사로 이어지게 된 것은 당시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농성진압 작전으로 철거민 다섯 분과 경찰 한 분이 숨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철거민들이 구속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공권력 남용'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세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진압작전의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건 이후 7년이 흘렀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는 그날 농성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살펴보았습니다.

고인이 된 철거민 유가족 중 일부는 생계를 위해 다시 장사를 시작했지만, 용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밀양, 강정마을과 함께 계속 투쟁 중입니다. 또 일부는 최근까지 재개발 현장에서 천막농성을 계속했습니다. 또다른 유가족은 아예 모든 외부 연락을 단절한 채 상처를 잊고자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찰 진압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부상자들도 있습니다. 그동안 10여 차례 큰 수술을 받았거나 허리와 하반신 분쇄 골절로 정상적인 보행조차 힘든 분들입니다. 7명의 구속자들은 긴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지만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철거와 연이은 장기 구금 생활로 생계 터전을 잃은 것은 물론 그 중 일부는 이혼으로 가족이 해체되었고, 일부는 정신적 충격으로 알코올 의존과 우울증, 불안, 분노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견디다 못해 지방으로 생활기반을 옮긴 피해자도 여럿입니다.

용산유족이면서 서울 순화동 철거민이었던 유영숙 씨는 지난 1월까지 1년여 순화동 재개발 공사현장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 지난 겨울 용산참사 유족의 철거현장 천막농성 용산유족이면서 서울 순화동 철거민이었던 유영숙 씨는 지난 1월까지 1년여 순화동 재개발 공사현장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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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월부터 인권의학연구소는 서울시와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후원과 협조로 용산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나 이 분들의 인권상황 실태를 조사하고, 치유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이 사업의 1차 조사결과가 보고서 <2015년도 서울시 인권피해자 치유지원사업 최종보고서>로 제출되었습니다.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용산참사 피해자들은 가족이나 배우자의 사망, 4~5년의 장기 구금 생활, 구속 등 법적 처벌로 인한 피해 외에도 사건 이후 이혼 등 가족해체, 심각한 신체부상으로 인한 경제능력 상실, 여전히 남아 있는 자신들의 철거지역 문제의 미해결 등 다양한 고통을 겪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실태조사 응답자의 80%는 용산사건 이전부터 철거현장에서의 용역업체 직원들에 의한 폭언, 폭행을 직접 경험했고 1년 이상 생업을 중단하고 철거반대투쟁을 해오던 철거민들이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용산사건 진압과정에서 신체적 손상을 입은 사례가 53%, 사건 이후 신체적 피해 외 사회적 불이익, 고립과 소외를 경험한 응답자도 절반에 이르렀습니다. 피해자들은 '가족에 대한 망신과 모멸감', '소외감', '왠지 모를 불안, 초조, 창피, 불이익과 차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용산사건 피해자라는 것을 숨긴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도 60%였습니다. 피해를 숨긴 이유도 '불이익과 차별이 걱정되어'라는 것이 가장 많았습니다.

용산사건 피해자들은 법적 처벌을 받은 이외에도 국가에 의한 감시 미행 도청, 언론의 왜곡 보도, 철거업체의 협박과 폭행 그리고 사회적 냉대와 외면으로 심각한 인권침해를 경험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이러한 1, 2차적인 피해는 현재 용산사건 피해자들의 심각한 정신심리적 위기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용산사건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변화된 점으로 '성격이 난폭해졌다', '딸하고 사이가 낯설다', '배우자가 심리가 불안하고 우울증 치료받고 암이 발생했다', '모친도 스트레스로 간 치료를 받고 있다', '이혼 후 가족이 파괴되었다'고 호소하고 있으며 특히, 가족관계의 급격하고 불안정한 변화로 크게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상의 무력감', '출소 후 정신적 어려움', '용산참사에 대한 무관심', '남 앞에 나서지 못하고 주눅 든다'는 등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도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실태조사 응답자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검사 결과, 완전 PTSD 위험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피해자들이 전체 응답자의 86%였습니다. 응답자의 60%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고, 실제 자살, 자해 경험이 있는 응답자도 20%에 달했습니다.

인권의학연구소의 2011년 조사결과, 고문피해자들의 약 76%가 PTSD 위험군에 해당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용산사건 피해자들의 심리적 상황이 매우 우려할 수준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참사의 결과는 용산사건 참여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2009년 당시 농성 철거민들은 40대 전후였는데 대부분 10대 자녀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1년 가까운 장례농성투쟁과 그 후 계속된 구금생활 중 자녀들에 대한 충분한 관심과 보호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대부분 건강하게 어려움을 극복해가고 있지만, 일부 유가족과 자녀들의 경우, 신체적 장애와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용산사건은 2009년 12월, 356일에 걸친 유족들과 시민들의 노력의 결과 시공사, 서울시 등과 피해지원 및 사태수습안에 합의한 바 있습니다. 당시 건설사와 합의한 피해 지원대책 역시 일부에게만 국한되었고 그마저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상도4동, 성남, 남양주, 신계동, 사당동 등 타 지역에서 지원투쟁 왔다가 용산 남일당에서 연행되어 구속되어 삶이 송두리째 어긋난 다수 피해자들은 최소한의 피해보상, 지원대책에서도 제외된 형편입니다.

당시 세부 합의 내용은 외부에 비공개되었습니다만, 합의결과에 대한 만족도는 대체로 불만족(13%), 아주 불만족(47%)이었고, 응답자 가운데 33%는 피해당사자 임에도 '합의내용조차 모른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2009년 12월 타결된 합의 내용의 이행에 대해서도 '이행되지 않았다' 등 부정적 평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현재 피해자들은 '국가의 사과와 배상, 명예회복 조치', '용산참사 특별법 등 입법조치', '진실규명과 추가 피해조사', '폭력진압 책임자 처벌' 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용산참사 당시부터 여러 기관, 단체와 시민들이 용산 참사 피해자, 가족에 대한 치유지원 노력을 해왔지만, 7년여 시간이 흐르면서 참사 사건은 시민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만나본 피해자, 유족들은 2009년 1월 20일, 남일당 건물의 참사현장에서 한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참사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의문과 의혹에 싸여 있고, 참사를 일으킨 국가폭력의 책임자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 태연히 고개를 들고 처벌받지 않는 모순된 상황이 피해자와 유족들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아직도 깊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무리한 진압작전으로 희생된 1.20 수도권 철거민연대투쟁 참여자들 살아남은 이들은 아직도 깊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용산참사 진상조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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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 해는 '용산참사'라는 비극 외에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두 전직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서거 등으로 온 사회가 슬픔에 젖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전까지 이 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국민들 다수의 신뢰는 용산 참사와 잇따른 비극으로 인해 깊은 상처와 회의로 바뀌었습니다.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개개인들에 대한 심리적 지지, 재활을 위한 생활 복지 연계지원 등 다각도의 대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기억, 연대에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가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연대할 때, 우리 사회 내부의 깊은 상처와 회의도 치유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는 서울시 후원으로 용산참사 피해자를 비롯하여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인권실태를 조사하고 치유지원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드러나지 않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찾아서 삶의 회복을 지원하겠습니다.



태그:#용산참사, #국가폭력, #서울시, #트라우마,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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