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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진이 드물어서 미안하다는
▲ 둘째 산들이 독사진이 드물어서 미안하다는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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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기뻐하며 말을 건넸다.

"낮에 전화가 왔는데 산들이 집 가까운 구립어린이집에 자리가 났대. 9~10월에 혹시 해서 대기 걸어놨거든. 그런데 대기 20번이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됐나봐. 그리로 보내야겠지?"

며칠 전만 하더라도 강동구 일곱개의 병설 유치원 중 네 군데를 지원해서 그중 한 곳에라도 추첨이 됐다며 좋아하던 아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어린이집 타령이지?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어린이집이었다.

"어린이집? 병설 유치원이 됐는데? 어린이집 자리가 나는 것은 아이들이 유치원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라며? 근데 병설 유치원이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겠다고?"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 게 최고지. 병설 유치원은 꼭 차로 20분 걸려서 데려다줘야 하는데 어린이집은 걸어서 20분이잖아. 내년에 까꿍이 초등학교 들어가면 나도 한동안 바빠질 것 같고. 동네 엄마들도 다들 집 가까운 데가 낫대. 어린이집도 누리과정 통합돼서 다 가르치고."

"아무리 그래도 교육을 전공으로 한 교사와 보육을 전공으로 한 교사가 같겠나. 난 어쨌든 어린이집 반대! 다만 장모님께 여쭤보고 장모님께서도 괜찮다고 하시면 나도 찬성할게."

아직은 뛰어 놀 나이
▲ 공부보단 노는 게 좋아 아직은 뛰어 놀 나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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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커버린 산들이
▲ 아빠와 건배 훌쩍 커버린 산들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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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내게 의견을 물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어린이집을 혼자 결정해 놓고 내게 동의를 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산들이의 등·하원은 나보다 아내가 더 많이 할 수밖에 없기에 집 가까운 게 최고라는 아내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산들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니 찝찝했다.

이는 결국 아내와 나의 아이 교육에 대한 관점 차이였다. 초등학교 입학 전 일정 수준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내 생각과 달리 아내는 유아 교육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물론 국공립유치원이 되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큰돈 들여가며 사립 유치원에 보내는 건 당연히 반대였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는 것 또한 크게 나쁘지 않다고 했다. 그 나이에는 노는 것이 곧 공부고, 선행학습은 오히려 초등학교 입학 후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에 독이 된다나.

물론 아내의 이야기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의 수고 때문에 유치원 다닐 수 있는 아이를 굳이 어린이집에 보낸다는 것이 쉽사리 용납되지 않았다. 어쨌든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다르지 않겠는가.

부족하기만 한 국공립유치원
▲ 강동 유일 국공립단설유치원의 위용 부족하기만 한 국공립유치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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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강동 유치원계의 서울대를 보내기 위한 부모 마음
▲ 줄을 선 학부모들 소위 강동 유치원계의 서울대를 보내기 위한 부모 마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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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내와 투닥거리다 보니 또다시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국공립유치원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정부는 왜 공약까지 한 국공립 유치원을 늘리지 않는 건가. 이제 곧 한국이 인구절벽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끊임없이 말로만 아이를 낳으라고 할 것인가? 정녕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것인가?

지난번 강동구 유일의 국공립 유치원에 가서 추첨을 할 때 들었던 교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역 내 초등학교 수용인원의 1/4만큼 공립유치원을 짓도록 육아교육법 시행령이 만들어졌었는데 올해 9월에 교육부 장관이 갑자기 입법예고를 해서 1/4을 1/8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국공립유치원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인데 그러면서도 이 정부는 끊임없이 보육을 떠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나.

어쨌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모님께서 회신을 보내오셨다. 2~3년밖에 안 된 병설 유치원보다는 25년 된 어린이집이 낫다는 의견이셨다.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사, 병설 유치원 교사를 하셨던 장모님이기에 나는 그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나 어린이집 안 갈래!

아직은 둘이다
▲ 누나가 유치원 간 뒤 아직은 둘이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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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어린이집에 가게 된 산들이. 그러나 또 하나의 난관에 부딪혔다. 산들이 자신이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며 생떼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는 산들이의 의지는 꽤 공고해 보였다. 녀석은 자신이 숫자도 모르고, 글자도 모르는데, 이런 것들을 어린이집에선 배우기 싫다며, 집에서 그냥 동생 복댕이와 짜니(반려견)와 놀겠다고 했다.

기가 찼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첫째 까꿍이와 비교해서 그 자존감이 훨씬 센 산들이 아니던가. 스스로 완벽하게 마스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숫자도, 글자도 차라리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녀석이었다. 배움의 갈망보다는 자신이 잘 못하는 걸 보여주기 싫어하는 산들이.

너무 센 누나의 영향력
▲ 삼남매의 공연 너무 센 누나의 영향력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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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집에서 흥얼거리면 녀석도 지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물론 작사, 작곡은 모두 산들이다. "나는~ 메르스가 싫어~ 메르스 때문에 집에서 나가지도 못해~ 빨리 밖에서 놀고 싶은데~."

그 노래 어디서 배웠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 역시 가관이다. '비밀 유치원'에서 부른단다. 그 유치원에는 자신을 비롯해서 동생 복댕이와 짜니, 외계인이 다니는데 그곳에서는 그런 노래가 유행한다나.

말은 안했지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고집이 센 산들인데, 어린이집을 강제로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아침부터 질질 짜고, 그런 아이를 혼자 어린이집에 놔두고 어떻게 뒤돌아설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데서 풀렸다.

나 어린이집 다닐래!

아내가 등록을 위해 산들이와 어린이집을 갔을 때였다. 마당에 미끄럼틀을 보고서도 어린이집을 다니겠다고 이야기하지 않던 산들이에게 어떤 아이가 말을 걸었다고 한다.

"넌 누구야?"
"나? 난 내년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게 될 산들이라고 해. 지금 다섯 살이야."
"어 그래? 그럼 나하고 친구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여기 어린이 집에 다녔어."

너무 어려워
▲ 숫자 배우고 있는 산들이 너무 어려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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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건 종이, 까만 건 글씨
▲ 책 읽는 산들이 하얀 건 종이, 까만 건 글씨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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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산들이는 어린이집을 가겠노라고 선언했다. 낯선 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와 먼저 말을 건넸던 것이 너무 기쁜 모양이었다. 그래, 김춘수가 이야기했던 '꽃'이 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이제 점차 부모보다는 친구가 좋을 나이가 되겠지.

녀석은 더 이상 '비밀 유치원'을 다니지 않겠노라고 했고, 막내 복댕이는 산들이 엉아가 자신을 놔두고 혼자 어린이집에 간다는 소식에 징징대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나는? 히잉…."

어쨌든 그렇게 산들이의 어린이집은 일단락됐다. 녀석은 현재 어린이집 등원을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엄마의 품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이제 곧 우리의 품을 떠나 기나긴 항해에 들어가겠지.

까꿍이를 뺀 산들이, 복댕이, 짜니
▲ 비밀유치원 구성원들 까꿍이를 뺀 산들이, 복댕이, 짜니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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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여기서 반전 하나. 어느 날 까꿍이가 와서 놀란 듯 이야기했다.

"엄마, 산들이 비밀 유치원에서 뭐 하는지 알아?"
"응? 노래하고 춤 배우는 거 아니었어?"
"아냐. 산들이가 선생님이었대. 헐, 대박."
"…."

산들이의 건투를 빈다.


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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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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