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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안의 '6D'는 12월 6일, 베네수엘라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일을 의미한다. 6D의 'D'는 스페인어로 12월(Diciembre)를 의미한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을 이렇게 줄여서 부른다... 기자말

지난 11월 22일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선거 결선투표는 중남미 전체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왔다. 중도우파 성향의 야당 '공화주의 제안당(PRO)'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가 친정부성향의 다니엘 시올리 후보를 근소한 차이(2.68%)로 제치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지난 13년간 아르헨티나를 지배했던 키르치네르주의(Kirchnerism, 키르치네리즘)의 종언을 고하는 동시에 지난 17년간 남미를 휩쓸었던 '좌파휘몰이'(Pink Tide)의 첫 균열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좌파휘몰이로 뭉쳤던 주변국들의 상황도 녹록지가 않다. 20년 만에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닥뜨렸다는 브라질의 지우마 호세프 정권은 연일 터지는 악재들로 눈앞이 캄캄한 지경이다. 그러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모두 좌파휘몰이의 산파역할을 했던 베네수엘라와 비교하면 약과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베네수엘라 좌파정권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5일 베네수엘라 과리코(Guárico)주에서 선거유세를 하던 루이스 마누엘 디아스 민주행동당 후보가 갑작스런 총격으로 사망했다. 야당은 이번 사건을 여당이 친위민병대인 꼴렉띠보(Colectivo)를 지시하여 발생한 일로 보고 있다. 총선을 불과 2주 앞둔 시점에 발생한 야당인사의 총격사망은 베네수엘라는 물론 미주기구, 남미국가연합 그리고 백악관까지 우려를 표하는 사안이 되었다.

여당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에만 주목하기에는 닥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현 베네수엘라 정국은 사면초가다. 석유수출 의존도가 90%에 달하는 베네수엘라 경제는 계속되는 유가하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 하이퍼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현상, 암시장 환율 폭등 등 어느 하나 손대어 고쳐볼 요량이 안 생기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치안도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다(세계은행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국가 중 살인율로 2위를 베네수엘라가 차지하고 있다 - 인구 십만 명 당 살인 당하는 사람의 수가 54명이다).

석유수요가 봇물을 이루던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지나고 셰일혁명 및 산유국들간의 치킨게임이 계속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국제무대에서 석유감산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번번이 묵살당하고 있다.
▲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 PDVSA의 주유소 PDV 석유수요가 봇물을 이루던 원자재 슈퍼사이클이 지나고 셰일혁명 및 산유국들간의 치킨게임이 계속되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국제무대에서 석유감산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번번이 묵살당하고 있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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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이 열광했던 혁명, 그리고 퇴행

문맹자 감소, 의료수혜 확대 등 전 세계의 좌파들이 열광했던 베네수엘라 볼리바리안 혁명은 심각한 퇴행을 겪고 있다. 국내 좌파 지식인들도 찬양해 마지 않았던 베네수엘라의 진통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현 여당의 위기는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태도, 야당을 공존해야 할 정치세력으로 보기보다는 제거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는 왜곡된 정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두로 현 대통령을 필두로 휘하의 여당세력들은 야당의 모든 의혹제기에 대해 '제국주의'라는 수사를 붙여 무마하고 있다(모든 진보 및 대안세력에게 '종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작태와 유사하다).

나만이 옳고 정의롭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정부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야당을 훈계, 조롱하거나 혹은 면박 주는 식으로 대하는 태도에서는 권위주의적 모습까지도 보인다. 독선적인 정국운영은 단기적으로 어젠더 추진에 윤활유가 될 수 있겠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정부 스스로를 좀먹게 되는 독약이 된다.

팔콘주에 위치한 석유화학시설단지에 부착된 차베스 프로파간다. CHAVEZ SOMO TODOS(우리 모두는 차베스다)라는 내용으로 차베스의 향수를 자극한다.
▲ 석유화학시설단지에 부착된 차베스 프로파간다 팔콘주에 위치한 석유화학시설단지에 부착된 차베스 프로파간다. CHAVEZ SOMO TODOS(우리 모두는 차베스다)라는 내용으로 차베스의 향수를 자극한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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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이 애초에 설계했던 경제정책이 왜곡을 낳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해 유연한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공산주의·사회주의 정권이 겪었던 톱니바퀴효과(Ratchet Effect)와 닮아 있다. 애초에 설계했던 경제정책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실패한 경제정책의 연속선상에 덧붙여진 후속정책이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다. 하이퍼인플레이션 발생의 근본 원인은 산업 생산력 저하와 원자재 수입차질에 따른 재화부족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결과를 낳은 기존 경제정책을 변경하기보다는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대증적 방안을 선택했다. '인플레이션→최저임금 상승→인플레이션 가중'이라는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 경제왜곡이라는 골병은 곪을 대로 곪아간다. 또한 석유수출에 정부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유가급락에 따른 플랜B나 긴축고려를 전혀 하고 있지 않은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던 유가는 현재 40달러 선마저 붕괴됐다. 대외환경 변화에 따른 정책선회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결국 이런 경제왜곡을 통해 고통 받는 당사자는 베네수엘라 대중이다. 생필품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설령 구하더라도 기존의 통제가격보다 부풀려진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근래에는 사재기를 막는다는 목적으로 일부 대형마트마다 지문날인기가 설치해 개인에게 할당된 수량 이상을 구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만기가 돌아오는 채무를 갚는 데 허덕이는 정부로서는 수입업자에게 외환을 제대로 공급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외환수급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자국화폐(볼리바르)를 고평가하고 있으니 암시장환율이 폭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00년대 중국의 원자재 슈퍼 사이클에 의해 호황을 누렸던 베네수엘라로서는 지금의 경제난국을 컨트롤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12월 6일 치러질 총선은 축적된 대중의 불만이 폭발하는 발화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본인을 차비스따(Chavista, 차베스를 추종하는 세력을 일컫는 말)라 생각하지만 마두로 현 대통령은 싫다는 응답이 전체 차비스따 중 절반에 달했다. 현재까지 실시된 여론조사들에 따르면 대부분 야당, 민주연합원탁회의(MUD, Mesa de la Unidad Democrática)가 압승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여론조사 따르면 더블스코어 차이를 넘어 여당이 3배 차이로 야당에게 패배할 것으로 점쳐진다.

마두로 대통령의 프로파간다도 많지만 차베스의 모습을 담은 프로파간다가 주를 이룬다. 차베스에 대한 향수를 중심으로 차비스따들이 결집한다면 현재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 수도 카라카스 시내에 설치된 차베스 프로파간다 마두로 대통령의 프로파간다도 많지만 차베스의 모습을 담은 프로파간다가 주를 이룬다. 차베스에 대한 향수를 중심으로 차비스따들이 결집한다면 현재의 열세를 뒤집을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해 보인다.
ⓒ 안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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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에서 통계를 발표하고 있지 않지만 외부기관들의 추정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에 인플레이션은 150%에 육박한다. 제국주의 타파, 정의 구현 같은 정치적 레토릭은 차제에 두더라도 당장 베네수엘라 대중이 고통 받는 경제현실을 외면해서는 위험하다. 

이번 주말에 치러지는 베네수엘라 총선(6D)은 아르헨티나에서 출발한 '반(反)좌파휘몰이'의 향배를 가늠할 분수령이 될 것이다. 만약 야당이 단순과반을 넘어 탄핵소추가 가능한 수준까지 의석을 차지할 경우 행정부 권력까지도 위태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정부여당에게는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베네수엘라, #중남미, #좌파휘몰이, #차베스, #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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