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이 15일 오전 9시부터 유해 암매장지를 찾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이 15일 오전 9시부터 유해 암매장지를 찾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이 15일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이 15일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굴삭기 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웅덩이가 깊어졌다. 벌써 두 시간 째다. 파낸 흙이 작은 집 한 채 크기만큼 쌓였다.

15일 오전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 40여 명의 시선은 굴삭기 삽날에 쏠려 있었다. 폐광 입구를 찾기 위해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6월 말과 7월 충남 전역에서 군인과 경찰이 보도연맹 가입과 부역 혐의를 이유로 민간인을 끌고 갔다. 그리고 곳곳에서 학살했다. 9월 말 인민군들이 물러갔지만 학살은 계속됐다. 충남 서부 지역인 서산, 당진, 홍성에서는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의 유족과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구성원, 의용소방대, 낙오군인, 낙오경찰 등이 치안대를 구성했다. 이어 경찰과 합세해 인민군에 대한 부역 혐의가 있거나 좌익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복적으로 연행, 구금, 살해했다.

구덩이에 버려진 시신... 폐광 입구마저 사라지다

홍성지역  희생자  유가족인 이종민(왼쪽)씨와 최홍이씨가 제를 올리고 있다. 두 사람은 6.25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각각 아버지가 희생됐지만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했다.
 홍성지역 희생자 유가족인 이종민(왼쪽)씨와 최홍이씨가 제를 올리고 있다. 두 사람은 6.25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각각 아버지가 희생됐지만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일부 희생자 유가족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아래 유해발굴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이 유해 시굴조사 전에 개최한 개토제에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일부 희생자 유가족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아래 유해발굴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이 유해 시굴조사 전에 개최한 개토제에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이중 충남 홍성군 광천읍 광천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최소 36명의 주민은 이곳 담산리 마을로 끌려왔다. 그해 10월 8일 한밤중이었다. 경찰은 이들을 마을 한복판에서 총살한 후 마을 뒷산 금광 구덩이에 암매장했다. 이날 버려지듯 파묻힌 희생자들의 유골엔 단 한 번도 햇볕 한 줌 스며들지 않았다. 희생자 중에는 인근 홍성은 물론 광천읍과 가까운 서산, 태안에서 끌려온 주민들도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6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폐광 입구마저 흙더미에 파묻혔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아래 유해발굴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은 이날 오전 9시부터 폐광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유해 암매장지를 찾기 위해서다.

지난 2014년 2월 발족한 공동조사단은 매년 한 곳씩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들의 방치된 유해를 찾아 발굴하고 있다. 지난해 '진주지역 보도연맹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39명의 유해와 유품을, 지난 2월에는 '대전형무소사건 관련 민간인 학살 희생자'(대전 동구 낭월동) 약 20명의 유해와 유품을 발굴했다. 이번이 3차 발굴지다.

한 시간여 동안 부지런히 굴삭기 삽날이 오갔지만 허사였다. 오전 10시. 참석자들이 작업을 멈추고 제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유가족 최홍이씨는 재상에 술잔을 올리며 "제발 유해를 찾게 해달라"고 염원했다. 최씨는 부친의 유해가 이곳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종민씨도 엎드려 아버지의 유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씨의 부친인 이강세씨는 일제강점기 홍성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해방 이후에는 홍성군농민조합장으로 일했다. 참석자들도 "반드시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반드시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65년만에 드러난 유해
 65년만에 드러난 유해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희생자의 몸 속에 박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탄두(카빈총 또는 M1 소총)
 희생자의 몸 속에 박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탄두(카빈총 또는 M1 소총)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이 희생자 유해를 손질하고 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이 희생자 유해를 손질하고 있다.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간단한 제례가 끝난 후 다시 작업이 시작됐다. 오전 11시 10분경. 현장을 지휘하던 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이 급히 손짓하며 굴삭기 작업을 중지 시켰다. 유가족과 참석자들의 간절한 바람이 전해졌기 때문일까. 폐광 구덩이로 보이는 입구가 드러났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실제 유해가 매장돼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10여 명의 발굴단들이 호미를 들고 흙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20분이 지났을 때였다.

"여기요! 여기!"

호미질을 하던 한 발굴단원이 소리쳤다. 큼지막한 정강이뼈가 드러났다. 인근에서 또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정강이뼈와 턱뼈가 잇달아 발굴됐다. 희생자의 몸에 박혀 있던 것으로 탄두(카빈 또는 M1 소총)도 나왔다. 땅속에 묻힌 지 65년 만에 희생자 유해에 햇볕이 스며들었다. 이날  2명 정도로 추정되는 유해 수십여 점이 발굴됐다.

폐광 구덩이 속에는 몇 명의 희생자가 묻혀 있는 것일까? 유해매장을 공식 확인한 유해발굴단은 내년 2월 중에 본격적인 유해발굴을 벌일 계획이다. 유해발굴단은 발굴비용을 시민 모금으로 마련할 예정이다.

안경호 4.9 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수십 년 동안 캄캄한 폐광 속에 갇혀 있는 유해에 햇볕이 비출 수 있게 해야 한다"며 "뜻 있는 시민들의 후원을 바란다"고 말했다.

"고추잠자리에 빠져 그리도 철이 없었을까"
희생자 유가족 최홍이씨의 <고추잠자리>
희생자 유가족 최홍이씨(73)
 희생자 유가족 최홍이씨(73)
ⓒ 심규상

관련사진보기

홍성 희생자 유가족인 최홍이(73)씨가 아버지가 숨진 그 날의 기억을 지난 2008년 '고추잠자리'(도서출판 계간문예)라는 제목의 글로 풀어냈다.

"(중략)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아까부터 소리 죽여 울고 있다. 얼굴은 눈물로 세수하겠다. 아이는 그제야 누나와 동생들이 거기 없다는 걸 깨닫는다. 다 심부름 갔나, 밭매러 갔나? 어머니는 깔고 앉은 밀 방석을 쥐어뜯으며, 쥐어뜯으며 운다, 입은 앙다물었다.

저 낯선 어른은 누구지? 왜, 그가 입만 열면 어머니는 자꾸만 더 울지? 참 이상하다. 그러다 아이는 배고픈 걸 잊고 구멍 난 고무신을 끌며 고추밭 고추잠자리에게 갔다. 같이 놀자고. (중략)

고추잠자리를 쫓던 그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는 오늘도 5.18 광주항쟁 때 희생된 아버지 장례식에서 영정을 받들고 앉아 있는 4살배기 사내아이의 슬픔 어린 사진을 떠올리면서, 소리 없이 통곡한다.

아홉 살배기가 고추잠자리에 빠져 그리도 철이 없었을까, 그 철부지가 머리 허연 나이에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 어머니를 향해 오늘도 소리 없이 통곡한다"




태그:#유해발굴, #홍성, #암매장, #민간인학살, #공동조사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