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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 용화축전에서 신춘희 씨가 효자 효부 상을 받았다.
 강원도 화천 용화축전에서 신춘희 씨가 효자 효부 상을 받았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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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런 사람 없어요. 스물다섯,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산골로 들어와 까다로운 시부모님 모시고 군말 한 마디 없이 그 많은 농사일을 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난 7일, 강원도 화천에서 용화축전이 열렸다. 5개 읍·면 2만7천명 군민들의 잔치. 그 자리에서 화천군 사내면 광덕4리에 사는 신춘희(54)씨가 '효자효부상'을 받았다. 상금이 무려 100만 원이다.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다.

25일 취재차 나섰다. '놀러 오는 것이라면 환영하지만, 취재는 절대로 응하지 않겠다'는 신씨에게 '효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소개가 필요하다'는 내 억지성 고집을 꺾지 못했다.

취재는 객관적 사실이 중요하다. 먼저 광덕4리 이장인 정화철씨를 찾았다. 신씨에 대한 평가를 듣기 위해서다. 출장 중인 이장을 대신해 부인인 임인숙씨가 나를 반겼다. '효자효부상'이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씨는 마치 자신의 일인양 칭찬 일색이다.

부모의 등살에 한 결혼 그러나 행복합니다

신춘희 씨 효자 효부 상, 마을 사람들 모두 축하해 줬다.
 신춘희 씨 효자 효부 상, 마을 사람들 모두 축하해 줬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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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집을 왔는데, 산 너머에선 총소리가 들리지, 보이는 건 둥그렇게 뚫린 하늘과 산이 전부였어요. 또 농사는 좀 많나. 1만평이 넘었으니까요."

충남 대천이 고향인 신씨는 1988년 1월, 지금의 남편 이종덕씨와 결혼했다. 당시 25세 나이는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은 나이였다. 친정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툭하면 노처녀라고 구박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서울의 한 방직공장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남편 누님을 만났다.

처음 만난 남편 이씨는 순박함을 빼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게 신 씨의 말이다. 그러나 결혼 독촉을 생각하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민통선 이북지역이라 산 너머 군부대에선 사격이 잦았다. 싱숭생숭한 불안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논과 밭 모두 합쳐 1만평이 넘는 농토. 6명의 시동생과 시누이, 엄한 시부모님 틈에서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먹을 물도 나오지 않았다. 펌프를 이용해 지하수를 끌어 생활용수와 식수로 사용했다. 겨울엔 정도가 더 심했다.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는 날이 많았다. 비누도 귀했기에 식구들이 (비누 없이)돌아가며 세수를 하고 남은 물은 소여물을 끓이는데 사용했다. 부엌이래야 흙벽이 다 무너져 내려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그릇을 잡으면 손에 달라붙었다. 겨울철엔 땔나무도 하고 여름엔 소 꼴(풀)도 벴다. 

1만평이 넘는 농토엔 콩과 옥수수, 배추, 무를 심었다. 논도 6천 평이나 됐다. 화전 밭이라 돌도 많았다. 돌이 새끼를 치는지 해마다 골라내도 숫자는 좀체 줄지 않더란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입니다

신춘희 씨 소망은 시어머님(좌축)과 오래 같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신춘희 씨 소망은 시어머님(좌축)과 오래 같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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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데이트라 해야 하나, 남편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을 때가 참 행복했었어요. 그 이는 부모님께 참 잘하셨어요. 돌이켜 보면 남편이 효자 상을 받아야 해요."

한국전쟁 당시 14살 나이에 혈혈단신 월남하신 시아버님은 그야말로 억척이셨다. 1만평의 논과 밭을 직접 괭이로 일궜다. 단점도 있었다. 술만 드시면 주정이 심했다. 했던 말을 반복하고, 평소 불만을 술에 취하면 한꺼번에 쏟아냈다.

술이 깰 때까지 이어지는 잔소리. 남편은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맞아도 아프다는 말이나 원망 섞인 눈빛 한번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위로하곤 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부모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였단다.

지금 27살인 큰 아들을 낳았을 때 천정을 보니 얼음이 보였다. 위풍이 심한 방이라 신문지를 두텁게 깔아 놓은 방바닥은 절절 끓어도 천정은 얼음이 두껍게 얼 정도였다. 그런 환경에서 삼남매를 키웠다.

"아빠를 닮아서인지 아이들도 말썽한번 부리지 않고 농사일 다 하고 자랐어요."

공부가 전부가 아닌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 말을 거역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부모는 또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큰 아들은 유기농 식품업에 종사하고 막내인 둘째 아들은 의류 업을 한다. 딸은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라 했다. 모두 부모 권유가 아닌 자신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시아버님 암 투병하실 때 제일 힘들었던 때였죠."

살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묻자 신씨는 시아버님께서 암을 얻어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 드렸던 일을 떠올렸다. 암 판정을 받자 아버님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어려운 시기를 넘어 살 만한 환경이 되니 세상과 하직해야 한다는 아쉬움. 손자들의 결혼을 보고 가야한다는 미련, 할 일이 더 남았는데 삶을 접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가족에게 하루 종일 훈계를 하는 날이 잦았다. 대수롭지 않은 말에 노여워하곤 했다. 그럴 땐 늘 술을 드셨다. 눈치를 챈 아이들은 밖을 맴돌았다. 몇 년간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지만 아버님 말씀 한번 거역하지 않았던 사람이 남편이란다.

나랏돈 절약하는 방법

신춘희 씨 집. 빚이 없는 농업,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춘희 씨 집. 빚이 없는 농업, 끊임없는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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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현재 화악산 토마토 영농조합법인 대표다. 22년 전, 토마토를 심었다. 준 고랭지를 이용한 농법.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기후 탓일까, 당도와 찰진 정도가 타 지역 생산품보다 뛰어나자 도시 사람들은 이씨의 토마토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 마을 일대 토마토 농가는 80세대에 이른다. 매년 8월이면 토마토축제도 연다. 광덕리 토마토가 전국에 알려진 계기다.

몇 년 전부터 사과나무를 심었다. 다들 미쳤다고 했다. 사과는 대구 등 따뜻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이란 선입견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연간 평균 온도가 크게 상승했다고 느꼈다. 토마토처럼 준 고랭지란 여건을 활용하면 사과의 신선도와 당도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패하면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100여리 떨어진 대학 원예학과 문을 두드려 2년간 사과농법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노력은 결과로 나타났다. 2700주에 주렁주렁 열린 사과는 이씨 부부의 주요 농산물이 됐다. 순탄하기만 한건 아니었단다. 품종을 잘못 선별해 얼어 죽은 사과나무도 많았다고 했다.

신춘희 씨가 수상한 효자효부상.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다.
 신춘희 씨가 수상한 효자효부상.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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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사서 한 것도 있죠."

신씨는 남편이 지역사회 활동 원했다. 이장, 새마을지도자, 농업경영인, 화악산토마토영농조합법인 대표. 남편 이씨의 이력이다. 그렇다보니 농사일은 오롯이 아내 신씨 몫이 되기도 했다.

"시부모를 멀리하는 시대라는데, 우리 며느리 같은 사람 없지."

신씨의 시어머님이신 석순남(80)씨는 칭찬에 인색한 분이다. '며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런 사람 또 없다'는 말로 대신했다. '며느님께서 효자 효부 상을 받으니까 좋지 않느냐'라는 질문엔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며느리만 같다면 나라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안 써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장입니다.



태그:#효자효부상, #신춘희, #이종덕, #광덕4리, #사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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