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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기슭 석굴암 보호각
 토함산 기슭 석굴암 보호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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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토함산 산등성이 식수대에서 10여 분 오솔길을 걷자 마침내 석굴암 보호각이 나타났다. 이 석굴암의 옛 이름은 '석불사'로 신라 경덕왕 때 세웠다. 다행히 석굴암 보호각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었으나 영구보존을 위해 본존불상을 모신 석굴암 내부는 유리로 차단되어 가까이 다가서서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진촬영도 금지라 하여, 나는 합장배례 후 본존불상의 대자대비한 상호를 마음에 새긴 채 발길을 돌렸다.

1960년 중3 수학여행 당시 나는 이 석굴암에 들어가 그 안에 모신 부처님, 관세음 보살, 나한님들의 좌상과 입상을 자세히 둘러 봤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이제 다시 가까이서 본다한들 내 어찌 현진건 선생의 문장에 미치겠는가.

석굴암 본존불상(신라인물관에서 재촬영)
 석굴암 본존불상(신라인물관에서 재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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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층대를 올라서니 들어가는 좌우 돌 벽에 새긴 인왕과 사천왕이 흡뜬 눈과 부르걷은 팔뚝으로 나를 위협한다. 어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배는 홀쭉하고, 사지는 울퉁불퉁한 세찬 근육! 나는 힘의 예술 표본을 본 듯하였다.

한번 문 안으로 들어서매, 석련대(石蓮臺) 위에 올라앉으신 석가의 석상은 그 의젓하고도 봄바람이 도는 듯한 화(和)한 얼굴이 저절로 보는 이의 불심을 불러일으킨다. 한 군데 빈 곳 없고, 빠진 데 없고, 어디까지나 원만하고 수려한 얼굴, 알맞게 벌어진 어깨, 슬며시 내민 가슴, 퉁퉁하고도 점잖은 두 팔의 곡선미, 장중한 그 모양은 천추에 빼어난 걸작이라 하겠다. - 현진건 '불국사기행'에서

석굴암을 나온 뒤 보호각 앞 언덕에서 먼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내가 신선이나 된 듯 날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제 다시 이곳을 찾기는 기약할 수 없는 일이라 그 선경들을 뒤돌아 보고, 또 보면서 그 모든 걸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동리목월문학관 현판
 동리목월문학관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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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목월문학관'

하산 길에 김병하 친구는 토함산 기슭에 세워진 '동리목월문학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거기에는 경주가 낳은 시와 소설의 두 대가 문인의 자취를 재현해 놓았다.

김동리 선생 본명은 시종(始鍾)으로, 1913년 경북 경주군 경주읍 성건동 186번지에서 태어나 계남소학교,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2년 수료 후 서울 경신학교에서 4학년 과정을 마쳤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 흉상
 소설가 김동리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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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당선되었고, 1935년에는 중앙일보에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되어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하였다. 만년에는 그분의 작품들이 영역, 불역, 일역, 독일어역으로 간행되어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나는 동리 선생에게 직접 배운 바는 없지만, 그분의 작품들은 젊은 날 나의 문학교과서였고, <무녀도> <등신불> <을화> <역마> 등은 국어나 문학교과서 실렸던 바, 이를 학생들에게 무수히 가르친 바 있었다.  

김동리 선생과 나란히 경주가 낳은 시인 박목월 선생의 유품과 자취도 정갈스럽게 전시해 놓았다.

박목월 선생 본명은 영종(泳鍾)으로, 경북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건천소학교,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33년 개벽사 발간 잡지 <어린이>에 동시 '통딱딱 통짝짝'이, <신가정> 6월호에 '제비맞이'가 당선되었고, 1940년 <문장>지 9월호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가을 어스름' '연륜' 등 작품으로 등단하였다. 1946년 같은 문장지 출신인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하여 문단에 주목을 받았다.  

두 시인의 화답(和答)

박목월 시백의 절창 '나그네'는 나의 대학 은사 지훈 선생의 '완화삼'과 화답한 시다. 내가 지훈 선생에게 강의시간에 듣기로는 일제강점기 말기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청년 조지훈은 암울한 현실 속에 안주할 수 없어 훌쩍 남도여행을 떠났다. 먼저 경주를 찾아 시우 목월에게 이 시를 건넸다고 한다.

완화삼(玩花衫)
-木月에게

차운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

그러자 목월은 시우 지훈에게 곧 '나그네'로 화답하였다고 한다.

시인 박목월 선생 흉상
 시인 박목월 선생 흉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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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芝薰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두 시 모두 3인시 옛 '청록집' 을유문화사 초판에서 원문 그대로 전재하였음)

두 분 모두 오래 전 이승을 떠나셨지만, 그 우정과 작품은 앞으로도 두고두고 여러 사람에게 회자될 것이다. 새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불초한 나는 천년의 고도 경주를 '구름에 달 가듯이' 떠났다.

우리 두 사람은 돌아오는 길 영천에서 마음의 점을 찍고 처음 만났던 대구 북부정류장에서 다시 헤어졌다. 그날 늦은 오후 원주행 시외버스에 오르자 곧 중부고속도로 시외버스 차창밖은 가을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황금 들판에는 지난날 벼를 베는 하얀 농사꾼 무리 대신에 콤바인 한 대가 추수하느라 벼논을 누볐다.

차창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갑자기 이틀간 여독이 짙은 안개처럼 몰려오기에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어느 새 친숙한 원주 치악산 멧부리가 반겼다. 이번 남도기행은 옛 친구와 동행하여 함께 지난 추억을 되새겼기에 나에게는 더욱 느꺼운 나들이였다.

나무국토대자연 조국의 산하여!

석굴암에서 바라본 동해
 석굴암에서 바라본 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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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기행 끝]


태그:#남도기행, #석굴암, #동리목월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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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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