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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2일 오전 9시 47분]

1851년 5월 29일, 미국 오하이오주 애크론에서 열린 여성인권 궐기대회에서 한 흑인 여성이 일어나 목소리를 높였다.   

"난 남성만큼 일하고, 음식이 넉넉할 때는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채찍질도 남성만큼 참아냈습니다. 그럼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여성이자 흑인, 그리고 노예.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을 여러 겹 지닌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1797~1883)는 여성의 역할과 이미지를 하나로 고정하고 차별적 발언을 내뱉는 이들을 향해 "나는 여성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소저너 트루스가 외친 것과 같은 물음이 10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야외무대에 울려 퍼졌다.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였다.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는 지난 8월 4일,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개정 후 명칭은 대전시 양성평등기본조례)의 성소수자 인권 보호·지원 조항이 모법인 '양성평등기본법'에 어긋난다며 삭제하도록 요청한 여성가족부에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자리였다(관련 기사 : '성소수자 배제 논란' 성평등조례 개정안, 상임위 통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총 18개 단체가 공동주최했다.

이날 기온은 15도까지 내려갔고, 의자는 갑작스레 내린 가을비에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하지만 행사를 위해 마련한 자리 150여 석이 모두 꽉 찼다. 추운 날씨에 몸을 움츠리는 참석자가 많았지만, 행사의 공식 구호인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는 외침엔 힘이 실려 있었다.

"여성가족부는 똑바로 봐라, 나는 여성이 아닌가?"

10일 열린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선 여성성소수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여성가족부를 향해 "나는 여성이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 “여성가족부는 똑바로 봐라, 나는 여성이 아닌가?” 10일 열린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선 여성성소수자의 발언이 이어졌다. 이들은 여성가족부를 향해 "나는 여성이 아닌가?”라고 질문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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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소수자 여성입니다. 저의 정체성은 별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차별은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국가 등 다양한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서 일어납니다. 성소수자 지원 및 보호 조항은 모법인 양성평등기본법의 입법취지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발언에 나선 이는 '성소수자 배제하는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 개악저지 운동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라(활동명)씨였다. 라라씨는 "성평등기본조례를 양성평등기본조례로 바꾸고, 성소수자 관련 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단순히 글자 몇 개가 바뀌는 일이 아니다"라며 "(성소수자 관련 조항은) 누군가에게는 '내가 이 도시에 있어도 괜찮다'는 위로였고, 자부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소수자 지원 및 보호 조항을 지워버린 양성평등기본조례가 어떻게 양성평등한 사회를 실현시킬 수 있을지 되묻고 싶다"고 했다.

"여성가족부는 나를 똑바로 보세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뒤이어 무대에 오른 한희씨도 같은 물음을 이어갔다. 자신을 '공대 나온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소개한 한희씨는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대학원에 입학할 때까지 남자로 살아왔다. 하지만 늘 고민이었다.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자신이 진정 바라는 모습인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지난해 커밍아웃을 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한희씨는 "학교에서의 커밍아웃은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성별정정과 수술을 안 했기 때문에 '너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 끊임없이 생길 것"이라며, "여성이 대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사회적으로 요구하는 여성성의 규범을 따르는 시스젠더(Cisgender,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의 이상이 여성만이 여성이라고 한다면, 저는 여성이 아닙니다. 그런 여성이 될 수도 없고, 그런 여성이 되기도 싫습니다. 하지만 저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왔고,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지금 저는 이렇게 이 자리에 있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해'라는 발언 제목으로 무대에 선  쥬리(활동명)씨는 첫사랑의 경험을 꺼냈다. 초등학교 친구로 만나 중학교 때부터 정식 교제를 하게 된 여자친구와 쥬리씨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부모님은 둘을 갈라놓으려 애썼고, 선생님은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라며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쥬리씨는 "내 삶을 결정하지 못하고, 언젠가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1년 정도 연애를 이어갔다. 쥬리씨는 "사랑만으론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첫사랑을 통해 혹독하게 경험했다"며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의 감정을 알고 인정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소수자의 권리를 말하며 거리에 나서면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네들끼리 사랑하면 되지 왜 남들에게 성소수자를 인정하라, 하지 말라고 하냐'고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만으론 사랑이 안 된다'고,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요. 사실 성소수자 분들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제도변화와 인식변화는 필요합니다. 또 우리 사랑을 노래할 노래와 영화, 고민을 이야기할 상대와 인터넷 게시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싸우고 있습니다."

10일 열린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다.
▲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 펼쳐진 무지개 깃발 10일 열린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 한 참석자가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들고 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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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없는' 여성가족부, 면담과 참고인 신청도 거부돼

장애여성, 60대 레즈비언, 노동운동을 하는 레즈비언, '법이 없어 아직 결혼을 못한' 레즈비언 커플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발언은 늘 같은 질문으로 끝났다. '우리는 여성이 아닌가'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은 여성·성소수자·인권단체 활동가 및 참여자들이 읽어내려간 '여성성소수자 궐기 선언문'을 통해 '여성가족부가 말하는 여성은 누구인가', '성차별은 무엇인가', '성평등은 무엇인가'로 확장됐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는 아직 이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 7일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 개정과 관련, 여성·성소수자·인권단체와 여성가족부의 면담이 예정돼 있었지만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성적지향·성별정체성(SOGI) 법정책연구회 활동가 더지(활동명)는 "7일 여성가족부 국장과 면담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여성가족부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온다', '왜 성소수자 단체가 포함되어 있느냐'고 말하더니 결국 면담을 취소했다"고 전했다.

또 "12일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질의를 할 예정이었고, '희망을 만드는 법' 소속 류민희 변호사를 참고인으로 신청했지만 유승희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이 참고인 신청을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여성·성소수자 단체들로 구성된 '성평등 바로잡기 대응회의'에 따르면, 류민희 변호사 뿐만 아니라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정민석 대표 또한 지난 10월 5일, 유승희 위원장의 거부로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대응회의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미 여야합의를 통해 결정된 참고인들임에도 이 두 명의 특정 참고인들만을 배제한 것"이라면서 오는 12일 국회 정문 앞에서 유승희 위원장의 해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게이합창단 지보이스가 공연을 마치고 무지개 깃발 등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고 있다.
▲ 무지개 깃발을 흔드는 지보이스 게이합창단 지보이스가 공연을 마치고 무지개 깃발 등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깃발을 흔들고 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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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없는' 여성가족부에 분노를 표시하기 위한 행사였지만, 이날 행사는 유쾌하게 마무리됐다. 마지막 순서인 여성 퀴어합창단 아는언니들과 게이합창단 지보이스의 합동 공연이 끝날 무렵, 한 레즈비언 커플은 무대에 올라 키스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내가 여기 분명히 존재한다'는, '그러니 어서 대답하라'는 소리 없는 저항이 아니었을까.

여성성소수자 궐기 선언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이란 오직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성차별을 없애는 것이라며, 양성평등 정책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전시는 여성가족부의 지시에 따라 <대전광역시 성평등기본조례>의 성소수자 인권 보호 조항을 삭제·개정하였다.

여성가족부는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이미 제정된 성소수자 인권 규범을 사라지게 한 주범으로서 역사에 남았다. 성차별 및 성적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남성과 여성이 따로 있다고 말하는 여성가족부, '양성평등'을 차별과 배제의 근거로 사용하는 이 한심한 여성가족부에 우리는 분노한다.

나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 우리는 성별 규범에 맞추어 살도록 강요받고, 그렇지 못할 때 비난받아왔다. 머리를 길러라, 예쁘게 미소를 지어라, 여자로 생각하고 말하라,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라…. 우리는 다양한 여성 중의 하나로,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성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변화시키는 것이 성평등에 기여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둘. 성별 임금 격차, 여성차별적 노동 환경,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은 성소수자를 비껴가지 않는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러한 차별과 폭력이 증폭된다. 나는, (우리는)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 싸워야만 온전한 우리의 인권을 쟁취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셋. 트랜스젠더는 주민등록번호, 남녀화장실, 병역 등 일상적인 성 구별 체계 속에서 고통받는다. 진짜 여성임을 증명하라고 요구받으며, 당장 몸을 깎아내고 훼손할 것을 명령받는다. 건강을 담보로 비전문적인, 높은 비용의 의료조치에 몸을 맡기라고 주문한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결정을 편견없이 인정하는 사회를 원한다. 여성의 몸과 표현은 다양하며, 누가 봐도 '여자처럼' 하나의 여성이 되기를 강요할 수 없다. 나는 (우리는)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넷.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여성 등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은 '남자 맛을 못봐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자 남성들은 남자 맛을 못봐서 여성을 사랑하는가? 이성애를 교정할 수 없듯이 우리의 섹스와 사랑을 교정할 수 없다. 우리의 섹스를 이성 간의 섹스에 비해 더 더럽거나 덜 열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동의에 의한 섹스를 성폭력이라거나 비도덕적 행동으로 폄하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성과 친밀성으로 가족을 이룰 수도 있다. 나는, (우리는) 레즈비언이고, 바이섹슈얼이다.

다섯. 아동과 청소년은 여자답지 않거나 남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는) 학교와 가정 등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할 수 있도록 교육받고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성교육과 인권교육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여섯. 나는, (우리는) 다양한 여성 중의 하나로서, 우리의 다양성은 사회적 자산이다. 우리는 세금을 내고 투표를 하는 시민이며 가족과 공동체를 돌보는 사회의 일원이다. 우리의 인권은 일개 부처가 자의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헌법적 권리이고 모든 성평등, 차별금지, 인권 규범에서 중요한 가치로 다뤄져야 한다.

일곱. 나는, (우리는) 여성성소수자이다. 여성이자 성소수자로서 인권을 보장할 책무를 국가에 요구할 수 있다. 우리는 성소수자들을 낙인찍고 차별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성차별적 의식과 제도들에 맞설 것이다. 성차별에 맞서는 모든 행동들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행동과 한 편이 될 수 없으며,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은 성평등이라 부를 수 없다. 성소수자의 인권 없이는 성평등도 없다.

우리는 질문한다. 여성가족부가 말하는 여성은 누구인가? 성차별은 무엇인가? 성평등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는) 여성이 아니란 말인가?

2015년 10월 10일
여성가족부의 성소수자 차별에 분노하는 여성·성소수자·인권단체 및 참여자 일동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성소수자, #여성, #여성가족부, #여성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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