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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아래 일베)에는 하루에도 수많은 게시물들이 올라온다. '일베 게시판 이용자'(아래 일게이)들은 자신의 게시물이 더 많은 화제가 되기를 갈망하며 경쟁한다.

그간 면역이 쌓여 어지간히 자극적이어서는 남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선을 넘는 경우가 생긴다. 곧이어 사회적 파장이 뒤따른다. 남에게 주는 피해보다 자신들의 게시물이 더 소중한 모양이다.

그런데 굳이 '일게이'들이 퍼트리지 않았어도 누리꾼들 사이에 유명세를 떨친 게시물이 있다. 자신을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네오'에 빗댄 짧은 글이다. '애국보수가 된 걸 후회한다'는 비장함이 감도는 제목의 글이다. 이를 접한 누리꾼들은 조소로 답했다. 왜 그런지는 원문을 그대로 옮길 테니 직접 판단해보시라.

일간베스트의 한 이용자가 '애국보수가 된 걸 후회한다'는 글을 올려 '일게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일간베스트의 한 이용자가 '애국보수가 된 걸 후회한다'는 글을 올려 '일게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 일간베스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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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좌좀(좌익 좀비)으로 생각 없이 살았다면 좋았을 것을. 빨간 약을 삼킨 네오마냥 진실을 알아버리고 이 힘든 막장 같은 싸움을 해나가야 하는 게 싫다." - '일간베스트'의 한 이용자 

영화의 해당 부분을 짧게 설명하자면,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진실을 보게 해주는 '빨간 약'과 현실에 안주할 수 있는 '파란 약' 사이에서 고민한다. 만약 '파란 약'만 먹는다면 평생 진실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네오'는 진실을 위해 '빨간 약'을 선택했다.

어처구니없겠지만 소위 '애국보수'들은 권력에 편승해 약자를 짓밟고 조롱하는 행위를 '애국'이라 믿으며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글쓴이가 아직도 착각 속에 빠져 열심히 '일베'를 하고 있을지, 아니면 '흑역사'가 부끄러워 이불을 뻥뻥 차며 누워있을지는 모르겠다. 만약 아직도 자신이 '빨간 약'을 먹었다는 이상한 '사명감'으로 '일베'를 하고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 다른 '일게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대들이 공격한 '진실'

마영신 작가는 <빨간약>에서 '일베는 우리 동무'란 만화를 그렸다.
 마영신 작가는 <빨간약>에서 '일베는 우리 동무'란 만화를 그렸다.
ⓒ 마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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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들이 진짜 '빨간 약'을 내놨다. 제목도 <빨간약>이다. 후에 출판사 관계자에게 <빨간약>이라 제목 붙인 이유를 물어보니 "<매트릭스>에서 영감을 받은 건 사실"이라면서 "소위 '종북'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빨간 약'을 바르고 위로받을 수 있기를 원하는 중의적인 바람도 담았다"라고 답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는) 불순한 만화가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자고 모였습니다. 어느 작가는 종북으로 매도되는 신부님들 선생님들 이야기를, 어느 작가는 북에서 내려온 진짜 간첩 이야기를, 어느 작가는 말 많고 탈 많은 대통령 선거 이야기를, 또 다른 어느 작가는 일베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막상 하겠다고 해 놓고 책이 나오면 혹시나 종북 만화가로 찍혀 감옥에 가는 건 아닌가 조금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으하하 웃으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답답한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쎈' 이야기를 하자고."(<빨간약> 머리말 중)

책에서 다루는 건 '일베'의 주요 공격 대상에 대한 진실이다. <빨간약>이 알려주는 진실을 듣고도 계속 이들을 매도할 수 있을까. 정작 '파란 약'을 삼키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이들이 '일게이'들이란 것을 왜 모를까.

'민주화' 현장에 있었던 그들, 사제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누구도 말 할 수 없을 때 말했고 누구도 감싸 주지 못할 때 그 일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누구도 말 할 수 없을 때 말했고 누구도 감싸 주지 못할 때 그 일을 했다.
ⓒ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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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아래 사제단)은 약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향했다. 정의와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 곳이라면 어디든 말이다. 정부와 시공사가 진상규명도 없이 철거하려 했던 용산참사 현장을 매일 미사로 지켰다. 박정희 정권 시절 명동성당에서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며 가두시위를 벌이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한 것도 사제단이다.

사제단의 기록은 '전태일'로부터 시작된다. '전태일'은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연민으로 목숨을 건 사람이다. 사제단이 지키고자 하는 건, 그 가치 자체다. 소중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조롱과 폄하를 받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고통을 자처한 이들이 사제단이다. 이들이 왜 아직도 조롱과 폄하의 대상이 돼야 하는가. 당최 모르겠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아래 전교조)도 마찬가지다. 전교조는 1989년 5월, 출범하자마자 '불법' 딱지가 붙여졌다. 국가는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즉각 해임하겠다"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가 일선 교육청에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며 배포했다는 공문 내용이다. 몇 가지 추려 소개한다. 아, 다시 상기시키지만 분명 '공문'이다.

-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창의성을 높이려는 교사
- 아이들한테 인기 많은 교사
(<빨간약>에서 재인용)

김수박 작가는 자신이 겪은 전교조 선생님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었다. 그 선생님은 "저마다 다른 특성을 '다르게' 존중해줬다"라면서 "그럼으로써 서로를 알게 했다"라고 술회했다. 그래서 힘센 친구가 약한 친구를 괴롭히지도 않았고 친구를 따돌리거나 하지도 않았단다.

김 작가는 그런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 전교조 선생님들이라고 했다. 그 경험이 이후 삶의 태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김 작가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잔인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대들은 본 적 있는가, 이 '잔인한 장면'을

김수박 작가는 전교조 선생님과 헤어지고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잔인한 장면을 목격한다.
 김수박 작가는 전교조 선생님과 헤어지고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잔인한 장면을 목격한다.
ⓒ 김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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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7월, 오랜 고난 끝에 전교조는 마침내 합법화됐다. 하지만 저 '전교조 교사 식별법'에 나오는 행동들이 불편한 사람들은 전교조에 이상한 이미지를 덧씌웠다. '일베'도 이에 편승했다.

"부당한 권력자들은 자기들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항상 불순 세력인 양 매도했고, 증오심을 키우고 이용해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자기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많은 이미지들을 사람들 머릿속에 심어 놓고 마녀사냥을 합니다."(<빨간약>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이유 없이 매도되고 배제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한없이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이다. 부디 '일게이'들이 '정독'하고 어떤 게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정도 상식은 있으리라 믿는다.

'일게이들'아, 언제까지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는 '파란 약'을 먹을 텐가. 정말 '빨간 약'을 삼킨 네오가 되고 싶거든 이 책을 읽길 바란다. 만화니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빨간약> (권용득·김성희·김수박·김홍모·마영신·한수자 지음 / 보리 펴냄 / 2015.08 / 1만2000원)



여고생 미지의 빨간약 - 단편소설로 시작하는 열여덟 살의 인문학

김병섭.박창현 지음, 양철북(2015)


태그:#일베, #빨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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