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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충북 음성군청 현관 앞에서 지역 사회노동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을 촉구하고 있다.
 12일 오전 충북 음성군청 현관 앞에서 지역 사회노동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을 촉구하고 있다.
ⓒ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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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군의 15개 사회노동단체로 구성된 '친일파 이무영 잔재 청산을 위한 음성군 대책위원회(아래 대책위원회)'는 친일파 이무영의 잔재를 청산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대책위원회는 지난 12일 오전 음성군청 현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우리는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일제의 억압에서 풀려난 지 70년을 맞았지만 독립의 기쁨을 목청껏 외치기도,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는데 아직까지도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대책위는 기자회견문에서 "이무영은 대통령 직속기구가 낸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48쪽에 걸쳐 친일 행적이 적시돼 있다"며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7쪽 분량으로 친일문학 행적이 기록돼 있는 일급 친일파"라고 고발했다. 이어 "민족을 철저히 배신했으며, 해방 뒤 자기반성이나 사죄가 없는 뻔뻔한 친일파였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날 음성군과 기념사업을 하는 지방 언론사에 3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음성군 측에는 ▲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전시된 이무영 친필원고, 유품 등을 즉시 치울 것 ▲ 이무영 생가 마을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등 잔재를 없앨 것을 요구했다. 이무영을 기리는 행사를 주관하는 지방 언론 <동양일보> 측에는 ▲ 무영제와 무영문학상 시상 폐지를 촉구했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은 1920년까지 충주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았다. 1929년 귀국 후 교사, 출판사 직원을 거쳐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소설가로 활동했다. <동아일보>를 그만둔 1939년 경기도 시흥에 정착한 뒤에는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그의 작품에 친일이란 먹구름이 드리운 건 이때부터였다. 그는 1942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이다. 이무영은 이 소설로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대학에 출강하다 6·25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한 이무영은 1955년 국방부 정훈국장(해군대령)으로 예편한 후 1960년 사망 전까지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상정 음성군의회 의원은 "이무영은 단순한 친일, 잘 몰라서 한 친일, 어쩔 수 없어서 한 친일과는 거리가 멀고 신념을 가지고 철저하게 민족을 배신한 일급 친일파"라며 "친일파를 잔재를 보존하고 관리할 것이 아니라 잔재를 청산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필용 음성군수는 대책위와의 면담에서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전시된 이무영 관련 유물을 치우는 문제는 오는 27일 열리는 전시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게 될 것"이라며 "생가 마을 표지석이나 흉상 처리 문제도 마을 주민과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대책위 참여단체는 광복회 충북지부 북부연합지회, 광복회 충북지부 음성지회, 음성읍지역개발회, 감리교농촌선교훈련원, 가섭사, 성공회 음성교회, 음성민중연대(전국공무원노조 음성군지부, 전교조 음성지회, 공무원노조 교육청지회, 음성축협노조, 음성군농민회, 음성군여성농민회, 음성농민약국, 민주연합음성지부, 음성노동인권센터) 등이다.


태그:#이무영, #친일파, #충북 ,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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