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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서양인이야."

학부 시절 들었던 어떤 강의에서 교수가 한 말이다. 괴짜로 소문난 교수였기에 그때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국인은 한국인이지, 어떻게 서양인일 수 있는가'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말마따나 한국인은 서양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근대 이후 철저하게 서양화됐다(지금의 나로서는 과거가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서양인의 체계로 사유한다. 미적 기준도 서양인의 것을 따른다. 백인을 선망한다. 백인에게서 알 수 없는 친근감을 느끼면서도 동남아계나 흑인에게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적 없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도,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서양에서 설정한 잣대로 민족의 우열을 나누는 것이 가장 미개한 짓이다. 이를 식민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은 아직 식민성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 낀 반 주변부 국가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츠 파농이 호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파농은 탈식민화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파농, 탈식민화의 아이콘

<파농> 책표지
 <파농> 책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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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파농과 마주친 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구매하게 되면서였다. 하지만 첫 만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앞부분만 읽다 포기한 것이다. 이후 한길사의 '인문고전 깊이 읽기' 시리즈로 출간된 <파농>을 접하면서 파농이 어떤 인물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도 말이다.

프란츠 파농은 1925년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마르티니크는 1946년 프랑스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 파농은 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터라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 문화를 누릴 수 있었다. 파농은 프랑스를 자신의 조국이라 여기며 동경했다. 하지만 조국을 위해 참전한 전쟁터에서 받은 냉대와 '네그리튀드'라는 흑인 정체성 회복운동의 세례를 받은 이후 파농은 180도 변했다.

사고의 대전환 이후 파농은 탈식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전유(專有)해 탈식민화에 관한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한다. 파농은 사상 정립에서 그치지 않았다. 정치적 행동도 불사했다. 자신이 알제리인이 아님에도 알제리 독립운동에 투신해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파농의 굴곡진 삶은 그를 더욱 특별하게 한다.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태생으로서 식민모국인 프랑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누렸던 경험과 탈식민화를 위한 학문적·정치적 투쟁의 경험이 공존하는 파농의 삶은 그의 사상이 이상적인 탁상공론이 아니라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실천적인 사상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은 이 같은 파농의 삶과 사상에서 식민성을 벗어던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에 파농이 필요한 이유

누더기든 최신 유행 스타일이든 그들은 무조건 유럽식 의상을 걸친다. 그들은 유럽 가구를 사용하고 유럽식 사회담론을 구사하며, 모국어를 유럽식 표현으로 윤색할뿐더러 유럽 언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과장된 수사를 남발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유럽과 유럽인이 이룩한 업적과 대등한 위치로 상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본문 21쪽)

1920년대 마르티니크의 '니그로'와 2000년대 한국인은 매우 유사하다. 마르티니크의 '니그로'가 유럽 문화를 선망하고 그것에 집착했듯이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유럽을 미국으로 바꾸면 현재 한국 상황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정치, 사회, 문화, 학계 등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마르티니크 '니그로'와 한국인의 유럽과 미국 선망을 사례로 보여주는 것이 언어와 관련된 행태들이다. 언어는 일종의 권력이다. 마르티니크 '니그로'에게 프랑스어가, 한국인에게는 영어가 상류 계층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로 작동했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원어민 수준의 영어발음을 위해 '혀 수술'까지 감행하는 촌극이 벌어지겠는가.

파농은 이처럼 "스스로 타자가 되어 자신을 불안정한 위치에 갖다놓고 항상 전전긍긍하며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일종의 포기신경증에 해당하며 그것의 근본원인은 자기타자화 또는 자기소외라고 진단한다. 이 증상은 "신비롭게 여겨지는 집단[백인]에서 인정받고 거기에 편입되려는" 몸부림인 동시에, "자신의 개체성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본문 141쪽)

파농의 신랄한 비판이 진정성을 띠는 것은 파농 스스로 '니그로의 자기소외'에 빠져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파농은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쓴 자신이 결국 '니그로'였음을 인식했다. 파농의 자기반성은 이후 알제리 독립운동과 같은 탈식민화 정치투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파농처럼 자신을 성찰하고 자기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식민성'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알제리의 해방과 아프리카의 탈식민화라는 지상과제(54쪽)"를 위해 평생을 바친 파농은 갑작스레 찾아든 백혈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파농의 사상은 "독일의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일본의 좌익학생운동, 라틴아메리카의 반미운동, 1979년 이란혁명 등(65쪽)"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파농은 지금의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마르티니크처럼 한국도 식민지 시절을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파농이 스스로 경험했듯이 한국도 서양을 동경하고 제3세계를 경멸한다. 이러한 경향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말에서도 드러난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는 인식은 서양을 선망하고 제3세계를 경멸하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처럼 한국은 자신이 과거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다.

파농이 맹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이 내면화한 식민성을 걷어냈듯, 우리도 깊은 성찰과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진국을 선망했지만, 수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금수저'를 물기 바라지만,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긴 지 오래다. 위를 선망해서 얻은 것이라곤 결국 모멸감과 자기비하뿐이다. 우리는 이를 자각해야 한다. 파농이 그랬듯, 변혁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덧붙이는 글 | <파농(인문고전 깊이읽기)>(이경원 씀/ 한길사 / 2015.04. / 1만80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지상 최대의 경제 사기극, 세대전쟁

박종훈 지음, 21세기북스(2013)


태그:#탈식민화, #식민성, #알제리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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