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도시의 나무 산책기> 책표지.
 <도시의 나무 산책기> 책표지.
ⓒ 마음산책

관련사진보기

1월 초부터 지난 5월 말까지 유독 바빴다. 수요일이나 목요일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몸살기가 느껴지곤 할 정도로 힘든 날들이었다.

이런 날들을 위로해준 것은 차창 밖으로 스치는 나무들이었다. 차창 밖으로 봄이 오는가 싶게 화들짝 꽃이 피면서 봄이 무르익어 갔다. 

올 봄 특히 많이 본 것은 대화역에서 교하나 운정지구 등 외곽으로 나가는 길목 가로수로 서 있는 이팝나무다. 5월 초 어느 날 커다란 사발에 가득 올려 담은 고슬고슬한 흰쌀밥처럼 하얗게 피기 시작한 이팝나무 꽃은 한 달 가까이 그 길에 길게 피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오래전에 읽었다. 옛날 사람들은 흰 쌀밥을 '이밥'이라 했는데 이 나무가 꽃을 피운 모습이 흰쌀밥을 닮아 이밥나무라 불렀다는 것. 그러다가 비슷한 음인 이팝나무로 세게 불리다가 고정되어 오늘날 이팝나무라 불리게 됐다고 말이다.

절기상 '입하(立夏) 즈음에 피어 난다' 해서 입하나무로 불리다가 비슷한 음인 이팝나무로 불리었다던가. 여하간 그간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이팝나무 이름을 실감한 이번 봄이었다.

이팝나무는 특히 농부들에게 친근한 나무다. 한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농부들은 이팝나무에 꽃이 피는 모습을 보고 한 해의 농사를 짐작하곤 했다. 이팝나무에 꽃이 풍성하게 피어나면 풍년이 들고 적게 피면 흉년이 든다는 식이다. 이팝 닮은 꽃이 많이 피면 농사가 잘돼 내년에는 이팝을 넉넉히 먹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저 재미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오랜 경험에 의한 예측이다.

근거가 있다. 이팝나무의 꽃은 논에 모를 심어야 할 철에 피어나는데, 풍년이 들기 위해서는 우선 또 모내기가 잘 돼야 한다. 모내기가 잘 되려면, 그때의 기후 조건이 좋아야 하는데, 그건 이팝나무의 개화에도 유리한 조건이어서, 꽃이 잘 피어난다. 반대로 그 시기에 기후 조건이 나쁘면 이팝나무 꽃이 제대로 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내기 역시 잘 안 되어 흉년이 들 것이라는 이야기다. - <도시의 나무 산책기>에서.

하얗게 핀 이팝나무 꽃들을 보노라니 가을 첫 수확 후 방아 찧던 날 혹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던 흰쌀밥, 그에 얽힌 추억들이 몽글몽글 떠오르곤 했다. 무엇보다 가난한 살림인데도 우리들 먹이는 것에 동네 어떤 부잣집 못지않게 풍성한 마음을 쓰시던 부모님이, 함께 먹었던 음식들이 많이 떠오르곤 했다. 위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느 날부터 10여 분 남짓 타고 가는 노선버스 대신 이팝나무를 훨씬 많이 만날 수 있는 30분 넘게 타고 가는 노선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1월에서 5월까지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10여 분 남짓의 노선버스를 어떻게든지 놓치지 말고 타야만 한다는 것과 그 스트레스였는데 이팝나무 때문에 버스를 놓친 후 어쩔 수 없이 타야만 했던 버스를 오히려 즐기게 된 것이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만남에 불과하나 이팝나무와의 만남을 위해 집에서 20분 더 일찍 나갔다. 마을버스와 노선버스를 탄다고 아침마다 나도 모르게 뛰면서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릴 때도 있었는데, 여유 있게 나선 덕분에 뛰지 않게 되자 며칠 후 통증도 가벼워졌다.

온통 하얗던 이팝나무 꽃들은 어느 날의 가벼운 비에 꽃잎을 눈처럼 흩날리더니 엄마가 봄날마다 해주시곤 하던 쑥버무리 같은 모습으로 며칠 더 피었다가 졌다. 꽃잎이 떨어지는 한편 잎이 돋아 흰색과 연한 초록색이 섞여 멀리서 보면 쑥버무리처럼 보였으리라.

'아마 그 길에 이팝나무가 없었다면, 이팝나무가 꽃을 피웠어도 무심히 스치고 말았다면 5월 내내 뛰었으리라. 매일 출근 시간을 다퉈가며 스트레스는 좀 많이 쌓였을까.'

적다고만은 할 수 없는 나이인지라 관절을 보호한다고 탄력이 좋은 밑창의 신발만을 고집하면서도 차를 놓칠까봐 나도 모르게 뛰곤 했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조금만 신경 쓰거나 돌려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20분의 여유를 갖지 못하고 매일 시간을 다투는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추억하며 위로를 받았던 이팝나무 꽃이 거의 질 무렵, '내년 오월에 볼 일이 없어도 이팝나무 꽃을 보러 와야지'라며 아쉬워 할 즈음 매일 지나던 길, 공원에 산딸나무가 꽃을 막 피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부분 중에서 특히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은 실은 꽃잎이 아니다. 산딸나무의 꽃은 꽃송이 가운데에 올망졸망 뭉쳐 있는 구슬 같은 부분이다. 이 꽃은 워낙 작을 뿐 아니라 별다르게 눈길을 끌 만한 요소가 없다. 꽃을 피운 목적인 꽃가루받이를 이루어야 하는 산딸나무로서는 벌이나 나비의 눈에 뜨이지 않을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산딸나무는 나름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찾아냈다.

벌과 나비와 같은 수분 곤충의 눈에 뜨일 만큼 돋보이는 무언가로 스스로의 꽃을 포장하는 전략이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바로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이다. 이건 원래 꽃받침이었는데, 꽃을 수분 곤충의 눈에 뜨이도록 아름답게 변형시켜 지어낸 특별한 기관이다. 식물학적으로는 '포'라고 부르는 기관이다. 정확히 열십(十)자를 이루며 돋아나는 넉 장의 포는 결국 산딸나무의 간절한 생존 전략의 결과였다. - <도시의 나무 산책기>에서.

북한산 산딸나무 꽃, 그 '포'. 산딸나무의 생태적인 특징은 이 '포'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산딸나무를 아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북한산 산딸나무 꽃, 그 '포'. 산딸나무의 생태적인 특징은 이 '포'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산딸나무를 아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조그만 알갱이들이 뭉쳐 있는 것이 꽃이고 꽃잎으로 생각하기 쉬운 흰색의 잎은 '포'다. 이 볼품없는 꽃으로 꽃가루받이에 불리할 것이라 산딸나무는 포를 발달시켜 곤충의 눈에 쉽게 띄게 하는 생존전략을 썼다. 감탄스럽다.
 조그만 알갱이들이 뭉쳐 있는 것이 꽃이고 꽃잎으로 생각하기 쉬운 흰색의 잎은 '포'다. 이 볼품없는 꽃으로 꽃가루받이에 불리할 것이라 산딸나무는 포를 발달시켜 곤충의 눈에 쉽게 띄게 하는 생존전략을 썼다. 감탄스럽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남이섬 산딸나무다.(2015. 5.29) 아파트 단지나 공원, 관공서 뜰에 주로 심어지는 산딸나무는 산에서 자라는 산딸나무보다 꽃을 훨씬 많이 피우는 종류다.
 남이섬 산딸나무다.(2015. 5.29) 아파트 단지나 공원, 관공서 뜰에 주로 심어지는 산딸나무는 산에서 자라는 산딸나무보다 꽃을 훨씬 많이 피우는 종류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산딸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그리 크게 자라지 않는 데다가 꽃이 오래 피고 잎이 아름다워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에도 많이 심는다. 2015. 5.29일 남이섬 산딸나무 길이다.
 산딸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그리 크게 자라지 않는 데다가 꽃이 오래 피고 잎이 아름다워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에도 많이 심는다. 2015. 5.29일 남이섬 산딸나무 길이다.
ⓒ 김현자

관련사진보기


산딸나무도 이팝나무처럼 오랫동안 꽃을 보여주는 데다가 접어 펼친 것처럼 주름이 선명한 잎이 아름답다. 그리고 가을이면 막대사탕 같은 귀여운 열매까지 보여주기 때문에 도심 아파트나 공원 등에 많이 심는 나무 중 하나다.

산딸나무를 실제로 본 것은 2009년 6월 북한산에서. 해마다 6월이면 산딸나무의 이런 특징을 처음 알게 된 그 신선한 충격, 그 설렘이 떠오르곤 한다. 그리하여 산딸나무의 이처럼 영리한 생존 전략을 함께 걷는 사람에게 꼭 알려주곤 한다. 산딸나무의 생존 전략이 힘들 때 작은 위로가 되길, 또 다른 나무나 풀꽃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말이다.

<도시의 나무 산책기>(마음산책 펴냄)는 올봄 내게 많은 위안과 힘이 된 출·퇴근길의 이팝나무나 해마다 일부러 만나러 가는 산딸나무처럼 가로수로, 또는 아파트 단지나 관공서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 이야기다.

저자는 <이 땅의 큰 나무>를 시작으로 <절집 나무>, <알면서도 모르는 나무 이야기>,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나무>, <천리포에서 보낸 나무 편지>,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1·2> 등 나무 관련 글쓰기를 해온, '나무 대변인'이란 별칭이 붙은 나무 칼럼니스트인 고규홍씨.

세계 3대 조경수인 개잎갈나무를 시작으로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자주 만나는 나무들과, 특정의 나무를 보고자 일부러 들르곤 한다는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법원 뜨락의 나무들, 가로수로 만나는 나무들 등 40여 종에 가까운 나무들의 생태와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아는 나무가 거의 없다는 사람들 중 그 이유로 "산에 갈 시간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꼭 산에 가야만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보면 이처럼 책 한 권은 족히 될 정도로 우리 주변에는 나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해마다 6월이면 삶의 목적인 꽃가루받이를 위해 포를 발달시킨 산딸나무의 생존전략이 내게 주는 응원의 메시지 같아 산딸나무를 찾아 산이나 어느 아파트 단지에 가곤 한다. <도시의 나무 산책기>가 어떤 나무들 책보다 살갑게 읽히는 이유는 아파트 창문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가까이 있는 나무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자주 보면서도 이름조차 몰랐던 나무들 가까이로 가는 계기의 책이 되리라' 자신 있게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도시의 나무 산책기>(고규홍) | 마음산책 | 2015-04-30 | 15,000원



도시의 나무 산책기

고규홍 지음, 마음산책(2015)


태그:#이팝나무, #산딸나무, #고규홍, #천리포수목원, #가로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