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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적군'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의 침투를 당한 대한민국 안에서 비상식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메르스에 맞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집권당과 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메르스와의 전쟁에 나섰다.

정부가 마지못해 메르스와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메르스의 위험성을 축소하려는 사람들은 메르스와의 '확전'을 주장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등을 권력투쟁이나 대권 행보 차원에서 바라보는 속 좁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 그들은 메르스가 대단한 게 아니라는 낙관론을 끊임없이 유포시키고 있다. 그러더니 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시장이 고발 당하고 검찰이 사건 수사에 착수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대한민국 안에서는 '적군'에 맞서 단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대열이 갈라지는 적전분열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예측과 달리 메르스가 진정 기미가 아니라 장기화 조짐을 보이는 마당에도, 적군보다는 아군을 먼저 죽이려는 비상식적인 일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반도에 진입해서 수도권 상당부분을 기습한 메르스를 두고 "별거 아니다, 곧 수그러들 것이다"라며 "확전을 기도하는 세력은 대권을 욕심내는 세력"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일본은 별거 아니다, 우리를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라며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주장하는 세력은 민심의 혼란을 부추기는 세력"이라고 몰아세운 400년 전 조선왕조 집권당과 닮지 않았는지 한번쯤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위험하다' vs. '일본 신경 쓸 필요 없다'

일본은 15세기 후반부터 분열과 내란의 시대로 돌입했다. 이 시기를 일본어로는 센고쿠 시대, 한자로는 전국(戰國) 시대라고 발음한다. 이 시대에는 제후국 격인 지방의 국(國)들 상호간에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과거 일본어의 국(國)은 한국어의 '국'과 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벌어진 혼란의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영웅에 의해 급속히 수습되어 갔다. 그러다가 노부나가가 아케지 미쓰이데라는 부하의 기습을 받고 자결한 뒤에는 노부나가의 또 다른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완전히 수습되었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이어 권력의 정점에 오른 시점은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이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에 일본열도의 대부분을 사실상 통일했다. 그리고 그는 공공연히 조선·명나라·동남아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히데요시가 일본열도를 완전히 통일한 것은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이지만, 이미 1580년대 말부터 일본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히데요시의 해외 정복 가능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히데요시가 이끄는 당시의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지금의 일본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지금의 일본은 해외 정복을 공공연히 외치는 단계까지는 아직 가지 않았지만, 당시의 일본은 그런 기운이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상태였다.

이렇게 일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일본의 내부 분위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기운을 탐지할 목적으로 통신사 황윤길을 정사(正使, 수석 사신)로 하고 김성일을 부사(副使, 차석 사신)로 하는 사신단을 1590년에 파견하게 된 것이다. 떠날 당시, 황윤길은 집권당인 서인당 소속이고 김성일은 야당인 동인당 소속이었다. 이 문장에서 '떠날 당시'라는 표현을 꼭 기억해두자.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의 ‘달성 한일 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의 ‘달성 한일 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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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대로, 정사 황윤길은 '일본은 위험하다,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부사 김성일은 '위험하지 않다, 전쟁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경우에 임금은 아무래도 정사의 의견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사가 여당 소속이므로 임금은 더욱 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우라면, 조선 정부는 황윤길의 의견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 돌입했을 것이다.

그런데 통신사 일행이 파견됐다가 귀환하는 동안에 벌어진 정권 교체가 조선의 운명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이 파견된 1590년 상반기만 해도, 황윤길이 속한 서인당이 집권당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귀환한 1591년 상반기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상반기는 정권이 서인당에서 동인당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서인당의 정철이 광해군을 후계자로 추천했다가 선조 임금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서인당이 무너진 시기였다. 통신사 일행이 부산포를 거쳐 한양에 도착할 때쯤에는 정권이 이미 동인당의 손에 넘어갔다. 그래서 통신사 정사인 황윤길은 야당 사람이 되고, 부사 김성일은 여당 사람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위험하다'는 황윤길의 의견은 야당의 의견이 되고 '위험하지 않다'는 김성일의 의견은 여당의 의견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김성일의 의견을 채택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의 위험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과의 전쟁 대비에 큰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정리된 것이다.

'사심' 때문에, 전쟁 위기 축소한 동인당

 대마도의 서산선사라는 사찰에 있는 김성일의 탑. 위의 것에는 학봉이란 호를 따서 ‘학봉탑’이라고 새겨져 있고, 아래 것에는 ‘김성일 공양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대마도의 서산선사라는 사찰에 있는 김성일의 탑. 위의 것에는 학봉이란 호를 따서 ‘학봉탑’이라고 새겨져 있고, 아래 것에는 ‘김성일 공양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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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의 객관적 상황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전쟁 가능성이 농후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엄포를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 '조만간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조선이 도와달라'는 서한을 통신사의 손에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통신사 일행과 함께 조선에 보낸 일본 사신을 통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통보했다.

일본 군대가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가겠다는 것은 일본군이 조선에 발을 디디겠다는 말이었다. 이것은 조선 땅을 침공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마도·일본 대사관 격인 조선주재 왜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기운이 심상치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조만간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는 점은 명나라도 파악하고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히데요시가 중국을 정복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조선이 협력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본이 전쟁을 공언하고 있었고 명나라에서도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황윤길의 판단은 선견지명이 아니라 평범한 판단에 속했다.

하지만 동인당은 서인당 황윤길의 의견을 묵살하고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자신들의 정권이 안정된 뒤라면 일본과의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켜 자기 당파의 입지를 공고히 해보려는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당시는 정권을 잡은 직후였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는 상황을 안정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동인당은 전쟁 가능성을 축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런 속에서 동인당 정권 내부에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순신이라는 무명의 장수를 남해안에 배치하고 성곽을 축조·보수하는 등의 준비 작업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민심을 어수선하게 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런 작업의 상당 부분도 중지되고 말았다. 그나마 이순신이 원위치 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동래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달성 한일 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임진왜란 초기에 동래성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달성 한일 우호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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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당이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무시한 것은 그들이 국제정세에 어두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야당 사람이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제기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공론화했다가 공연히 민심을 잃을지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 막 정권을 잡은 어수선한 상황에서 전쟁 공포로 민심이 이반되면 정권 유지에 불리할 거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동인당은 일본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국토가 유린될 가능성보다는 자신들의 정국 주도권이 상실될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걱정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눈앞에 닥친 재앙에 대해 효율적으로 맞설 수 없었다. 그래서 사태의 의미를 축소하고 대응의 강도를 낮췄던 것이다. 사심이 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부적절한 대응을 한 결과가 바로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만약 조선 백성들이 의병으로 나서지 않고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천재적 활약을 선보이지 않았다면,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몇 개월 만에 국토를 상실했을지 모른다. 조선이 이런 위험에 빠진 것은 집권당이 외부의 위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외부의 위협을 강조하는 목소리에 대해 정파적 관점에서 대응했기 때문이다.

메르스의 기세가 꺾이지 않은 이 마당에도 근거 없는 낙관론을 유포하면서 메르스와의 확전을 훼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400년 전 김성일과 동인당을 닮지 않았는지 거울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는 진정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체력을 믿기 때문에 메르스 낙관론을 퍼뜨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진 기득권이 혹시라도 흔들릴까봐 메르스와의 확전을 기피하는 것인지 한번쯤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메르스, #임진왜란, #황윤길, #김성일, #당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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