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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를 출입하는 정치팀 이경태 기자가 기사에서 미처 풀어내지 못한 청와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편집자말]
남미 순방 이후 건강 악화로 안정을 취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 발언하고 있다.
 남미 순방 이후 건강 악화로 안정을 취해온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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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을 용돈제도로 만들지 않겠다던 대통령의 공약이 거짓으로 드러난 이상, 국민이 믿을 수 있는 국민연금법 개정에 나서야 합니다."

2004년 10월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중 한 대목입니다. 당시 연단에 선 이는 바로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박 대통령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 자격으로 연설에 나서 "(국민연금을)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으로 나누어 모든 국민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1인 1연금 제도를 도입해 연금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라고 공언했습니다.

11년이 흘렀습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무회의에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뒤 "해야 될 일을 안 하고 빚을 줄이는 노력을 외면하면서 국민한테 세금을 걷으려고 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야가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논의하면서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을 50%로 하는 문제까지 동의한 것을 비판한 겁니다. 특히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을 현행 40%에서 50%로 인상하는 것을 '증세'라는 인식도 드러냈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박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공적연금 강화를 주장했던 '의원 박근혜'는 공적연금 강화를 증세로 생각하는 '대통령 박근혜'로 변했습니다.

[의원 박근혜] '비전' 있는 공적연금 강화 제시

박 대통령은 11년 전 국민연금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2004년 7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때도 "국민연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음 해인 2005년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때도 "'적게 내고 많이 받는' 현행 국민연금은 파산이 예정된 시한폭탄과 같은데, 정부·여당이 근본적인 연금개혁에 나서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도 비판했습니다.

이를 참여정부 당시 야당 대표로서 '정치공세'를 펼쳤다고 폄하하긴 어렵습니다. 당시 참여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은 확실히 '재정안정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처음 제시된 '정부안'은 9%였던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15.9%까지 올리고 60%였던 소득대체율 역시 단계적으로 50%로 낮추는 안이었습니다. 이른 바 '적정부담-적정급여' 방식입니다.

문제는 기초연금도 없던 때의 '해법'이란 점입니다. 이미 연금 사각지대의 심각성이 강조되고 있었으며 2026년엔 노인인구비율이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공적연금이었던 국민연금의 약화는 곧 노후빈곤율의 증가로 이어질 게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기초연금 도입 주장은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국민연금으로 보호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해 일정 정도의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방식입니다. 

"국민연금을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으로 이원화하자"는 박 대통령의 주장 역시 유의미했습니다. 이는 1997년 국민연금개선기획단에서도 다수안으로 채택된 바 있고 OECD에서 권장했던 안이기도 합니다. 당시 봉급생활자들이 자영업자보다 더 많은 보험료를 납부하는 등 부실한 소득 파악으로 형평성 논란을 사던 국민연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 기초연금을 통해 전 국민에게 어느 정도 소득을 보장하는 만큼 소득비례연금(국민연금)의 보험률과 지급율을 낮출 수 있어 매번 반복되는 연금 재정 고갈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것으로도 분석됐습니다.

박 대통령 역시 이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2005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회담 당시 "국민연금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은 사각지대"라며 "지역가입자 50%가 혜택을 볼 수 없다, 기초연금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노후가 보장돼야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중 <경향신문>에 밝힌 '공적연금 개혁방안'으로는 "국민연금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사각지대와 재정문제이며 기초연금과 소득비례연금의 이원화가 해결의 출발점이다, 지금의 연금구조에서 기초연금을 분리하되 대상 폭을 넓혀서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소득비례연금의 경우, 낸 만큼 받도록 함에 따라 재정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대통령은 2008년 10월 국민연금공단을 대상으로 한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서 "65세 이상 어르신 중에서 34%가 빈곤가구로 OECD 국가들 평균보다도 3배나 높다"라며 "연금급여액의 소득대체율도 너무 낮다"라고 질타했습니다. 특히 "재정위기도 중요하지만 노인 빈곤 위기가 더 심각하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죠.

당시 언론들은 당대표이자 유력 대선후보를 지낸 박근혜 의원이 초선 의원처럼 정책 질의를 펼치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대통령 박근혜] '세금폭탄론'으로 공적연금 강화 토대 허물어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왼쪽 부터), 김무성 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우윤근 원내대표가 2일 국회에서 '공무원연금 개혁 및 국민연금 강화를 위한 양당 대표 합의문'을 발표하고 있다. 2015.5.2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왼쪽 부터), 김무성 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우윤근 원내대표가 2일 국회에서 '공무원연금 개혁 및 국민연금 강화를 위한 양당 대표 합의문'을 발표하고 있다. 20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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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승리 이후 변했습니다. "도입 즉시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과 중증 장애인에게 현재의 2배를 지급"하겠다고 한 기초연금은 취임 후 "소득 하위 70%에게 지급한다"는 차등 지급안으로 후퇴했습니다. 게다가 이를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바람에 앞서 얘기했던 '연금 이원화 방안'은 허망하게 사라졌지요.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 50% 인상을 증세로 치부한 대목은 더 문제입니다. 박 대통령이 이 문제를 '세금폭탄'으로 등치시키면서 향후 어떤 정권이든지 공적연금 강화를 논의할 토대를 마련하기가 더욱 어렵게 됐습니다.

여권인사조차 이것은 아니다고 말합니다. 13~15대 당시 신한국당(새누리당의 전신) 의원이었고 1988년 국민연금 설계를 맡았던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세금폭탄'과 같은 정부의 공포마케팅 때문에 공적연금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며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이 형편없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라고 비판했습니다.

역설적입니다. 박 대통령은 '세금폭탄론'까지 제기하며 '선(先) 공무원연금 개혁-후(後) 국민연금 개혁'을 주장했지만 사실상 모든 공적연금에 대한 토론을 촉발시켰습니다. 여야는 14일 청와대가 반대한 '국민연금 명목소득대체율 50%' 대신 '기초연금 강화'를 협상카드로 삼는 방안도 검토 중입니다. 박 대통령이 의원 시절 바랐던 바대로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본의 아니게 논의해야 될 상황이 된 겁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질타했던 대로 국민연금은 '용돈제도'가 된 상황입니다. 국민연금공단 통계에 따르면 현재 국민연금의 월평균 급여는 작년 8월 기준으로 대략 32만 원에 그쳤습니다.

박 대통령이 공적연금 강화에 대한 '초심'을 다시 되돌아보길 바랍니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운영위원장도 '의원 박근혜의 연금개혁방안'을 높게 평가하더군요.

오 위원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박 대통령이 주장한 이원화 방안은) 국민연금을 완전한 소득비례연금으로 전환해 돈 낸 만큼 받아갈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국민연금이) 미래세대에 부담이 안 되도록 하고 그 대신 세금으로 그 재원을 충당하는 기초연금을 월평균소득 20%로 두툼하게 지급하는 안"이라며 "이는 유럽의 복지국가 정당들이 주장했던, 굉장히 진보적인 모델이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며 오 위원장은 여기에 한 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연금정치에서는 진보·보수는 없고 여·야만 있는 겁니다. 여당일 땐 재정안정화를 강조하고 야당이 되면 기초연금을 강조합니다. 지난 10년 간의 과정을 보면 그렇습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박근혜, #국민연금, #기초연금, #공무원연금, #세금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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