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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 최초로 미국 연방 상·하원 합동 연설에 나선 아베 신조 총리가 끝내 과거사 사죄를 외면했다.

미국을 공식 방문한 아베 총리는 30일(한국 시각) 워싱턴 D.C 하원 본 회의장에서 상·하원 합동 연설 무대에 올랐다. 그동안 일본의 진주만 공습,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걸고 넘어졌던 미국이 처음으로 일본 총리에게 의회 연단을 내줬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전 세계가 주목한 역사적인 연설에서 한국, 중국 등 일본이 과거 침략 전쟁으로 아시아 국가들에 가했던 고통은 사과하지 않고 미국에만 고개를 숙였다. 이마저도 '침략', '사죄' 등의 단어는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아시아 국가에 고통 줬다면서 사죄는 안 해

버락 오바마(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회담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지난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회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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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는 '희망의 동맹으로(Toward an Alliance of Hope)'라는 연설에서 이날 자신이 워싱턴 D.C 국립박물관의 2차 세계대전 기념물 '자유의 벽'을 방문했다면서 "이 벽에 박힌 수천 개의 금빛 별들이 자유를 지키다가 사라진 자랑스러운 희생의 상징이라고 믿는다"며 "이 별들에서 고통과 슬픔, 그리고 숨지지 않았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미국 젊은이들의 사랑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어 "역사는 냉혹하고, 깊은 후회의 마음으로 그곳에서 한동안 묵념했다"며 "일본과 일본 국민을 대신해 전쟁터에서 쓰러진 모든 미국인의 영혼에 깊은 경의와 영원한 애도를 보낸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습을 거론하며 "치열한 싸움이었지만 원수는 마음의 유대를 맺는 친구가 됐다"고 강력한 미·일 동맹을 강조했다. 또한 "일본은 통절한 반성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의 행동이 아시아 국민에게 고통을 줬던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아시아의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며 "역대 일본 내각들에 의해 표현된 입장을 계승하겠다"고 밝혀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사죄를 대신했다.

주변국 향한 과거사 사죄 없었다

또한 국가 안보를 거론하며 뜬금없이 "전쟁은 늘 여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며 "우리 시대에서는 여성의 인권이 침해받지 않는 세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해 일본군 위안부 사죄를 피해 갔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올 여름까지 안전 보장 관련 법안을 반드시 정비할 것"이라고 천명하며 "이를 통해 미·일 동맹이 공고화될 것이고 아시아 지역 평화를 위한 확실한 억제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방미를 통해 새롭게 개정한 미·일 방위협력지침에 관해 "태평양에서 인도양까지의 넓은 바다를 법이 지배하는 평화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며 중국의 해양 진출 강화를 견제했다.

아베 총리는 자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지난 1957년 하원 연단에서 "일본이 자유국가들과 함께 연대하는 것은 민주적 원칙과 이상에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던 것을 거론하며 미국과의 유대감을 과시했다.

그는 "그 결정은 일본이 미국과 동맹을 맺고, 서방의 일원으로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라며 "그것이 일본을 성장하고 번영케 했으며 심지어 오늘 날에도 대안은 없다"고 밝혔다.

미국과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관해서도 "TPP가 양국의 경제적 이익을 넘어 안보로 이어져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TPP의 전략적 가치는 눈부시며, 결코 잊지 않겠다"고 미국과의 경제 동맹까지 과시했다.

아베 총리는 "미·일 동맹은 테러리즘, 감염, 재난, 기후 변화 등 새로운 이슈에 함께 대응하는 시대를 맞이했다"며 "미국이 전 세계에 주는 최고의 자산은 과거나 지금, 미래에도 희망이며 우리의 동맹을 '희망의 동맹'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세계를 더 훨씬 좋은 곳으로 만들자, 함께라면 분명 가능하다"고 연설을 마무리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아베 연설 방청

아베 총리는 이날 연설에서 분명하고 강도 높은 표현으로 태평양 전쟁을 사죄하고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미국에 가했던 진주만 공습에 고개를 숙였을 뿐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에 대한 과거사 사죄는 없었다.

그는 아시아 국가에 고통을 줬다고 인정한다면서도 '침략' , '사죄' 등의 표현은 쓰지 않고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것에 그치면서 공식적인 과거사 사죄를 원했던 주변국의 기대를 저버렸다.

특히 한국이 그토록 촉구했던 종군 위안부 사죄를 외면하며 전시의 여성 인권 문제로 왜곡했다. 이 밖에도 침략이나 식민 지배가 아닌 '우리의 행동', 무라야마 담화를 '역대 내각의 입장' 등으로 불분명하게 표현하면서 과거사 인정을 회피했다.

이는 전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과 하버드대학 강연에서 종군 위안부에 관해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밝힌 것보다도 강도가 낮은 언급으로 풀이된다.

아베 총리는 과거사 사죄는 외면한 채 미·일 동맹을 앞세워 집단 자위권 행사와 평화 헌법 개정, 중국 견제 등을 강조하면서 아시아 평화를 이끌겠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이날 연설을 앞두고 의회 광장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200여 명이 아베 총리의 일본군 위안부 사죄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용수 할머니는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의 초대를 받아 의회에 입장해 아베 총리의 연설을 방청했다.

2007년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을 주도했던 민주당 소속의 혼다 의원은 아베 총리의 연설 직후 성명을 통해 "70년 동안 솔직하고 겸손한 사죄를 기다린 이용수 할머니가 아베 총리의 연설을 지켜봤다"며 "할머니가 끝내 사죄를 받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밝혔다.

혼다 의원은 "아베 총리는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종군 위안부나 성 노예를 직접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며 "이는 20만 명이 넘는 (위안부 피해자) 여성들에게 모욕이며,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아베 신조, #미국 의회 연설, #위안부, #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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