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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호핑 투어, 스노클링을 하다.
 아일랜드 호핑 투어, 스노클링을 하다.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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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몇 살이에요?"

제리가 다짜고짜 내 나이부터 물었다. 이 상황에서 맥락 없이 나이는 왜 묻지? 싸움판에서 '너, 몇 살이야?' 밥그릇 수부터 따져 상대를 제압하는, 한국 사람들의 그 유치한 '기선 제압법'을 어디서 보고 배웠나?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자, 제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 나이면 깜박깜박할 때잖아요. 잘 생각해 봐요."

나이를 묻는 이유가 그거였어? 날 기억력 흐려진 노인네로 취급하네. 단수 높은 기선제압법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목소리가 반 옥타브 높아졌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죠. 정신 멀쩡합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요. 여기 도착해서 짐 풀 때, 분명히... 기억 못할 물건이 아니잖아요?"

그때, 제리가 지나가고 있던 동네 사람을 불러 세웠다.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포트 바턴에 도착한 3일 전, 관광안내소에서 만났던 동 루이즈였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강! 숙소가 여기였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제리가 또 너털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이 손님이 자기 나이는 생각하지 않고, 우리 집에서 스노클링 장비를 잃어 버렸다는 거야. 어디 다른 데서 잃어 버리고 와서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물건을 분실했다는 손님을 위로하거나 같이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이건 놀림인지 조롱인지. 

포트 바턴의 싼 숙소 방
 포트 바턴의 싼 숙소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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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는 포트 바턴에서 내가 묶고 있는 숙소의 관리인이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제리 부부가 안채에 머물며 숙소를 관리하고 있었다. 숙소 주인은 프랑스 사람인데, 프랑스에 가 있다고 했다. 가정집 정원에 코티지 세 채. 3일 동안 나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내가 나간 사이 동네 좀도둑이 잠긴 문을 따고 들어갔거나, 관리인 부부가 흑심을 품고 마스터키로 방에 들어가 슬쩍했거나, 방 구석구석 기어 다니며 날 염탐 중인 개미나 도마뱀들이 합심해 보물창고로 끌고 갔거나, 내 추측은 그랬다.

스노클링 장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고는 방에서 감쪽같이 물건이 사라질 수 없었다. 내 허접한 물건들 중에 그나마 값나가는 건, 그 스노클링 장비였다. 코론에서 식비, 숙비 줄여 큰 맘 먹고 구입한 스쿠버 다이빙 마스크. 

여권이나 현금은 전대에 넣어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카메라도 늘 들고 다녔다. 아무도 집어가고 싶지 않을, 연식 오래된 무거운 노트북이랑 다른 소지품들은 침대 한 쪽에 펼쳐놓고 지냈다. 더블베드 하나 달랑 들어있는 방이라 거기 말고 마땅히 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일랜드 호핑 투어를 나가려고 스노클링 장비를 찾아보니 안 보였다. 그 사실을 제리에게 말했더니, 다짜고짜 내 나이부터 물었던 것이다. 

나는 강력히 항의했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고. 물건을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두었는지, 상황 설명도 상세히 덧붙였다. 동 루이즈는 웃기만 했다. 그도 웃고 제리도 웃고, 나만 울상이었다. 잃어버린 물건이 아까워 속상한데다가, 제리가 자꾸 '네 나이를 생각해라' 하니 더 불쾌했다. 나만 바보가 됐다.

아일랜드 호핑 투어,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 급하게 철수하다.
 아일랜드 호핑 투어,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 급하게 철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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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여행하다 보면 돈이나 물건을 분실하는 불상사는 예사로 일어났다. 한 번은 방콕에서 카메라를 분실했다. 방문을 잠그지 않고 공동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 그 사이, 사라졌다. 인도에서는 기차 침대칸에서 덮고 자던 담요를 도둑 맞았다. 담요를 걷어들고 기차에서 내려 도망치는데 내가 어쩔 수 있었겠나.

돈부터 여권, 배낭까지 싹 다 도둑 맞은 이탈리아 청년을 만난 적도 있었다. 여행자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구걸하며, 자기 집에서 부친 짐과 돈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그 청년의 안쓰럽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팔라완은 치안 상태가 양호해서 내가 범죄에 노출되거나 소지품을 분실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팔라완 배낭 여행 31일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독 포트 바턴에서 여행자들의 소지품 분실사고가 많았다. 어쨌든 제리를 붙들고 실랑이를 더 해봐야 득도 없고, 그의 웃음 때문에 뚜껑이 열릴 것 같아서, 자리를 떴다.

할 수 없이 스노클링 장비를 대여해 어제 예약한 아일랜드 호핑를 나갔다. 아침 8시 40분, 스위스 청년 사무엘과 벨기에 젊은 남녀 5명이랑 같이 방카(필리핀 전통 나무 배)를 탔다.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트윈 리프'라는 첫 번째 코스는 해변에서 바로 보이는 코앞이었다. 바다 한가운데 방카가 멈추자, 스노클링 장비를 갖추고 바다로 뛰어 들었다.

연보라, 연녹색, 연청색, 연노랑... 파스텔 톤의 산호초들과 그 사이를 팔랑팔랑 유영하는 컬러풀한 물고기들이 환상적이었다. 소문처럼 포트 바턴의 바다는 아름다웠다.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그 신비로운 세상을 내려다보며 바다 위를 떠다니고 싶었다. 잠시 후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면엔 수천수만 개의 물 방울꽃이 동심원을 그리며 피었다. 바닷속은 딴 세상처럼 여전히 아름답고 고요했다.

포트 바턴에 와서는 매일 한두 차례 비를 맞았다. 열대우림 지역이라 그런지, 다른 지역보다 우기가 빨리 닥치는 듯했다. 어제 오후에 내린 비는 정말 대단했다. 그 거센 빗줄기를 홀딱 맞으며 아놀드, 알빈, 발빈이랑 숲길을 걸었는데. (관련 기사: 처음 본 필리핀 남자 따라나섰다 '횡제' )

불을 때 익힌 코코넛을 소달구지에 실어 코코넛오일 공장으로 보내는 가족.
 불을 때 익힌 코코넛을 소달구지에 실어 코코넛오일 공장으로 보내는 가족.
ⓒ 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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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엔 오후와 다르게 날씨가 화창했다. 그제 갔었던 원주민 시골마을에 다시 찾아가 동네사람들과 아침인사를 나눴다. 코코넛 오일을 만들기 위해 구운 코코넛을 소달구지에 싣고 있는 가족도 만났다. 그리고는 아놀드와, 그의 사촌인 알빈과 발빈이라는 14살 소년들과 낚시를 갔었다. 작은 방카를 몰고 바다로.

낚시 방법은 간단했다. 추와 바늘이 달려 있는 낚싯줄을 바다로 떨어뜨렸다. 10m쯤 내려갔다. 낚시 줄을 손으로 잡고 '신호'를 기다렸다. 미끼는 문어 다리를 잘라썼다. 선수에 앉아 있던 발빈이 먼저 손바닥만한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가자미처럼 납작한 물고기였다. 곧 이어 알빈도, 아놀드도 노란색 줄무늬 물고기들을 잡아 올렸다. 

회를 칠 줄 아냐고 아놀드에게 물었더니 물고기를 어떻게 날로 먹느냐고 깜짝 놀라는 거였다. 나는 입맛만 쩝쩝 다셨다. 그리고는 두어 시간 동안, 내 낚싯줄은 요지부동이었다. 몇 번 낚싯줄을 끌어올려 자리도 옮겨보고, 미끼도 바꿔봤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그 '신호'가 걸리지 않았다. 아놀드와 알빈과 발빈은 심심찮게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역시 선수들이라 다른가.

바다낚시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바다낚시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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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을 걸어 돌아가는 길
 논두렁을 걸어 돌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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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내심을 갖고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했다. 결국 놀림만 실컷 받으며, 오전 낚시를 끝냈다. 그래도 즐거웠다. 소년들과 함께 푸른 바다에 떠있는 것만으로도, 그 풍경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근처 작은 섬으로 방카를 몰고 갔다. 해변에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다. 아놀드의 친구 집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 오두막집 앞 해변의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놀드가 싸온 밥과 구워온 작은 생선 네 마리, 내가 사가지고 간 팬케이크 세 장을 나눠 먹었다. 아놀드 친구가 커피를 끓여왔다.

점심을 먹고는 나 혼자 해변을 따라 30여 분 걸었다. 다른 오두막집이 한 채 나올 때까지. 건조망 위에 생선을 말리고 있는 어부의 집이었다. 집 앞에 앉아 있던 중년 여자가 손짓으로 날 불렀다. 말은 안 통했지만 서로 미소를 나누며... 그녀가 따온 그린망고를 같이 먹었다.

바다낚시를 나갔다.
 바다낚시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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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시 오후의 바다로 낚시를 나갔다. 낚싯줄을 던져놓고 30여분 앉아 있었나. 그때까지 아무도 고기를 낚지 못했다. 아놀드가 하늘을 살피며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곧 큰비가 올 거라며. 결국 나는 한 마리도 물고기를 낚지 못한 채 낚시를 접게 됐다. 내가 흑흑흑 우는 시늉을 하자, 너는 물고기보다 더 큰 행운을 낚을 수 있을 거라며 아놀드가 위로했다. 고마웠다. 

방카를 빌려온 발빈의 형 집으로 향했다. 아놀드의 마을보다 4km쯤 더 북쪽 바다로 올라갔다. 방카를 해안으로 들어 올려놓고, 발빈의 형 집에 들렸다. 집에는 허리 고부라진 할머니가 혼자 계셨다. 할머니가 파인애플을 따다가 썰어, 소금을 뿌려 내주셨다. 어찌나 달콤하던지 염치불구하고 다 먹었다.

아놀드가 또 재촉했다. 비가 쏟아지기 전 떠나야 한다고.

"비 맞으면 어때?"

내가 말하자 아놀드가 웃으며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우리 마을까지도 꽤 오래 걸어야 하는데."

오후 3시 10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잡은 물고기가 든 양동이를 들고. 열대나무 숲길을 걸었다. 코코넛 야자나무 숲길도 걸었다. 뜨문뜨문 오두막집들이 보였다. 벼가 자라고 있는 논과 논바닥을 막 갈아엎은 논두렁도 지났다. 벼농사는 1년 2모작으로 직파재배를 한다고 했다.

진흙탕 속에서 머드 팩을 즐기고 있는 소, 길고 가는 나무줄기처럼 생긴 연녹색 뱀, 풀숲의 야생화들 사이를 기어 다니는 자라, 왕도마뱀, 빨간 잠자리를 구경하며 걸었다. 문명과는 거리가 먼 그 자연 속을 걸으며, 나는 숨을 쉬기도 떨렸다. 유명세 떨치는 그 어떤 여행지보다도 낭만적이고 푸른 길이었다. 그 길이 끝나는 게 아쉬워, 일부러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야생과일 따먹으며 걷는 그 길이, 꿈속만 같았다

나무 타고 올라가 열대과일 따는 발빈
 나무 타고 올라가 열대과일 따는 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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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빈이 나무에서 딴 망고를 내게 준다.
 발빈이 나무에서 딴 망고를 내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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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빈이 열대 과일이 열린 나무를 볼 때마다 타고 올라갔다. 바나나, 망고, 구아버, 칼라만시를 따왔다. 난 그때마다 와우! 환호성을 질렀다. 새콤달콤 싱싱한 야생과일을 따먹으며 걷는 그 길이, 꿈속만 같았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대로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갔다. 앞서가던 발빈이 노래를 불렀다. 나도 노래를 불렀다. 행진곡처럼 신나게 동요 메들리를. 투둑투둑 타타타탁 타악기 반주처럼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우리는 계속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입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마시며 깔깔거렸다. 마침내 아놀드의 마을에 도착했다. 방카 가솔린 값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아놀드가 끝내 거절했다. 우리는 '안녕!' 짧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포트 바턴 시내까지 혼자 걸어오는 동안, 나는 조금 울었다. 그렇게 소풍 같았던 어제 일이 떠오르자, 또 눈물이 핑 도는 거였다. 시간여행을 한 것 같았다. 난 어제 아이였고 오늘은... 하루 만에 폭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정말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네가 된 건가.

아일랜드 호핑 투어 두 번째 장소는 '와이드 리프'였다. 세 번째 장소는 '이자틱 아일랜드'라는 작은 무인도였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수영을 했다. 해먹 위에 누워 쉬었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데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스노클링을 잠깐 하고, 큰 비가 올 것 같다며 서둘러 철수했다.

그날 밤 숙소 정원에선 관리인 부부의 동네 친구들이 모여 술을 마셨다. 동 루이즈도 와 있었다. 제리가 나를 불러 산미구엘 한 잔을 권하며 말했다.

"강, 너무 낙담하지 말아요. 나이 들면 다 그렇게 깜박깜박해요."

제리는 왜 이토록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걸까. 나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제리 친구들은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밤늦도록 노래를 불렀다. 나는 내일 일찍 포트 바턴을 떠나려고, 짐을 쌌다. 

머그팩 즐기는 물소
 머그팩 즐기는 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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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팔라완, #포트바턴, #배낭여행,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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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리산으로 귀촌하였습니다. 2017년도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출간. 유튜브 <은경씨 놀다>. 네이버블로그 '강누나의깡여행'. 2019년부터 '강가한옥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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