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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3일부터 19일까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아래 ABC) 트레킹을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은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마흔 언저리의 나와 K, 두 남자가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느낀 여러 생각과 소회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익히 히말라야를 경험하신 분들께는 그때의 기억과 감흥을, 버킷리스트 한 편에 히말라야를 적어 놓고 '언젠가'를 준비하고 계신 분들에게는 설렘과 정보를 함께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 기자말

하산길에서 만난 눈사태의 흔적
 하산길에서 만난 눈사태의 흔적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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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하산입니다. 목표를 이루었다는 성취감과 해방감은 발걸음을 가볍게 합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빈 지게로 내려가는 짐꾼들의 발걸음 역시 가볍습니다. 하지만 한 번 올라왔던 코스라고 마냥 마음을 놓고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는 궂은 날씨로 눈사태가 일어난 현장을 보았습니다. 정말 아찔했습니다. 트레킹 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던 작년 10월에도 최대 4m까지 쌓이는 폭설과 눈사태로 70여 명이 사망 또는 실종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도반의 폭포. 이 곳의 분위기는 설악산 비선대를 연상케한다.
 도반의 폭포. 이 곳의 분위기는 설악산 비선대를 연상케한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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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로지의 숙소 내부. 이 곳은 트레킹 중에서 만나 로지 중 가장 깨끗했다.
 도반 로지의 숙소 내부. 이 곳은 트레킹 중에서 만나 로지 중 가장 깨끗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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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하산 코스는 기본적으로 왔던 길을 돌아가다가 막바지에 방향을 조금 틀었습니다.  내려가는 도중 도반(2590m)에서 하룻밤, 지누단다(2170m)에서 또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트레킹 코스에서 묵게 되는 로지의 숙소는 침대와 이불 한 장 외에 별도의 난방 시설이 없습니다. 발바닥과 아랫배, 등과 허리 등 온 몸에 핫팩으로 도배를 하고, 두툼한 패딩점퍼를 입고 겨울용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면 추위를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그의 꿈은 10년 뒤에도 포터, 20년 뒤에도 포터

히말라야 트레킹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포터에 대한 것입니다. 포터는 최대 20kg까지 짐을 들어주고 간단한 길 안내를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터에게 모든 짐을 맡기는 것은 좋은 산행 방법이 아닙니다. 산에서는 어떤 비상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본인의 가방에 기본적인 방한복, 비상간식, 물, 약품 등은 꼭 챙겨야 합니다.

물론 체력적으로 자신이 있거나 트레킹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라면 포터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무방하겠지만, 한국의 국립공원처럼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초행길이라면 포터를 고용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간혹 포터가 말썽을 부려 트레킹이 힘들었다고 하는 경험담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포터는 정말 최고였답니다.

그는 30대 초반에 아이가 2명 있는 가장이며 에베레스트 산악지대가 고향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많지는 않지만 착실하고 예의가 바라서, 든든하고 편안한 후배 같았습니다. 식사 때가 되면 매번 한국말로 '맛있게 드십시오'라는 인사를 하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네팔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힌두교의 계급문화가 아직까지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똑똑하고 능력 있는 그의 꿈은 10년 뒤에도 포터, 20년 뒤에도 포터였습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10년 20년 뒤에 다시 설산을 찾았을 때,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처럼 우직했던 포터는 우리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소처럼 우직했던 포터는 우리 여정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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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그의 고향, 에베레스트의 명칭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가야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에베레스트'는 19세기 제국주의 영국이 이 곳을 통치하던 시절, 영국인 측량국장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입니다. 

원래 이 산을 티베트인들은 '대지의 여신'이라는 뜻의 '초모랑마'로 불렀고, 네팔인들은 '우주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담은 '사가르마타'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에베레스트라는 명칭이 워낙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다 보니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깊은 뜻이 담긴 성스러운 최고봉의 원래 이름을 기억해두는 것은 설산을 찾는 이에게는 꼭 필요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산길에 뒤돌아 본 안나푸르나의 빛나는 설경
 하산길에 뒤돌아 본 안나푸르나의 빛나는 설경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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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게으른 아침을 만끽하고, 숙소 근처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모국어로 쓰여진 매뉴를 골라 푸짐한 식사를 합니다. 포카라는 설산을 비추는 페와 호수가 유명합니다. 거리 주변을 거닐다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호수의 물결을 바라보며 지난 여정을 반추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히말라야를 통해 구하고자 했던 것은 히말라야 자체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말라야라는 길을 수행의 수단으로 삼아 얻어지는 깊은 울림이었을 것 입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솔개의 심정으로 히말라야를 찾았던 K의 소회는 어떠할까요?  K에게는 그토록 힘들었던 고산병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생(生)과 사(死) 사이의 큰 고통을 통해 그 동안 힘들어 하던 작은 고민들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바라보는 힘'이 커졌다고 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선택 되어지는 내'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 '선택하고 실행하는 나'의 힘을 체득했다고 말입니다.

'경계없음'을 회복하고자 했던 나는 히말라야의 아주 일부분을 걸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자연의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누가 정한 것인가? 오랜 규범과 관념의 습관화와 거기에 맞춰 작동하는 인간의 심리기제…. 그 모든 걸 히말라야는 단숨에 해체시켜 주었습니다. 경외감은 동시에 거대한 우주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였고, 역설적인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별거 아닌 인생에서 다른 이의 시선이나 인정 따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홀가분함이랄까요.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을 축복한다'는 아름다운 인사말...

설산을 비추는 페와 호수의 잔잔한 물결
 설산을 비추는 페와 호수의 잔잔한 물결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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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공항에서 바라보는 안나푸르나. 구름이 잔뜩 껴있어서 설산이 보이지 않는다.
 포카라공항에서 바라보는 안나푸르나. 구름이 잔뜩 껴있어서 설산이 보이지 않는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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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립니다. 짙은 안개가 끼어 아침 9시 비행기가 3시간이나 지연되고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집 위에 있는 구름 너머에 설산이 있습니다. 떠나기 전에 안나푸르나의 장엄한 모습을 한 번 더 보지 못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보았던, 당신이 보았을,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 볼 히말라야를 한정 짓지 않을 수 있어서지요.

나와 K가 걸었던 일주일간의 설산기행을 이제 마치려고 합니다.

"나마스테."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을 축복한다는 이 아름다운 인사말을 수백 수천 번은 더 주고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내 영혼은 정화되고, 내 안의 신에게 조금 더 다가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만났던 모든 인연과 '언젠가' 이 곳을 찾을 당신을 위해, 그리고 하얀 설산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가슴 앞에 두 손 모아 "나마스테!"

궂은 날씨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히말라야는 마지막 선물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궂은 날씨 때문에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히말라야는 마지막 선물로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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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말라야, #안나푸르나, #ABC트레킹, #포카라,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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