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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이주노동자 23만명 시대. 한국인들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고(3D) 피하는 일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내는 이주노동자들. 그들을 빼고 한국의 산업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노동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정작 속내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번 기획에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아닌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본다. [편집자말]
지난 1월 30일, 경기도 광주의 한 농장을 찾았다. 캄보디아에서 온 여성 노동자 헤이몸(아래 몸)을 만나기 위해서다. 오후 8시. 시내 같았으면 한창 사람과 자동차들로 도로가 북적일 시간이지만 수백 개가 넘는 비닐하우스가 밀집해 있는 농장지역은 불빛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일이 늦게 끝났다며 좀 더 기다려 달라는 몸의 요청에 기숙사에서 조금 떨어진 농로에 주차를 하고 기다렸다. 멀리 보이는 고층 아파트의 화려한 불빛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일이 늦게 끝나서 이제 저녁 먹고 씻었어요.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몸에게서 들어와도 된다는 전화가 왔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길을 더듬어 들어간 비닐하우스는 넓은 식당과 몇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누군가 씻고 빨래를 하는지 조금 열린 공동 목욕실 문 사이로 하얀 김이 쏟아져 나와 통로가 온통 뿌옇다.

몸이 생활하는 비닐하우스 기숙사. 난방이나 온수사용 등 다른 기숙사에 비해 시설이 좋은 편이다.
 몸이 생활하는 비닐하우스 기숙사. 난방이나 온수사용 등 다른 기숙사에 비해 시설이 좋은 편이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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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온수를 쓰는 데는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은 단출했다. 매트리스 하나와 옷장, 소형 냉장고와 옷가지들을 걸어 놓은 행거, 책상과 화장대를 겸한 낮은 협탁. 거울과 자잘한 화장품 병들을 보니 여자 방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이 방을 둘이서 써요. 옆 친구는 한국에 온 지 2년 됐구요. 저는 4년 되었어요. 4년 동안 3번 옮겨서 마지막에 들어온 곳이 여기에요. 여기에 있던 언니가 좋다고 해서 오게 되었는데 와 보니까 언니 말대로 지금까지 있었던 농장들 중에 가장 좋아요. 캄보디아 사람이 11명 있는데 다들 좋은 사람들이고 여기 한국 이모들도 좋고 사장님도 좋고 다 좋아요."       

마지막 일터인 이곳 농장이 제일 좋다는 몸의 말은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장이 공식 인터뷰를 거절하긴 했지만 적어도 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야학(한국어 공부)을 할 수 있도록 식당공간을 내어줄 정도로 배려하고 있기 때문.

스물두 살에 한국에 온 몸 "놀지 못하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경기도 광주의 공장형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몸.
 경기도 광주의 공장형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몸.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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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사장들은 자신의 사업장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용상태나 노동환경이 외부에 드러낼 만큼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물두 살에 한국에 왔어요. 고향은 캄보디아 깜퐁짬이라는 시골인데 우리 동네는 다들 농사를 지어요. 우리 집도 농사를 지어요. 팔아서 돈을 벌지는 않구요. 식구들이 먹고 살 정도가 나와요. 엄마아빠가 계시고 언니 둘, 남동생 동생 둘이 있어요. 큰 언니는 결혼해서 형부랑 같이 말레이시아로 일하러 갔어요. 고무농장에서 일하는데 한국보다 돈은 많이 받지 못한다고 해요. 

조금 있으면 한국 설날이라서 음식도 나눠 먹고 쉬잖아요. 캄보디아 설날은 쫄츠남이라고 하는데 4월이에요. 쫄츠남에는 음식을 많이 해서 제사도 지내고 식구들과 나눠 먹어요. 며칠씩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아요. 그럴 때면 가족들이 더 생각나요. 고향 음식도 생각나구요."

한국의 설날이 다가오니 몸도 고향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한국에서 일한 지난 4년 동안 그녀는 캄보디아 설날인 쫄츠남을 잊고 지냈다. 쫄츠남은 4월 중순. 한국에서는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에 시달리다보면 쫄츠남인지 푸춤번(추석)인지 생각도 못하고 지나버리기 일쑤였다.

"한국에 있는 동안은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는) 그런 거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일하러 왔으니까 참을 수 있어요. 돈 많이 벌어서 집에 가는 게 더 좋아요. 엄마, 아빠 도와드려야 하고 동생 학교도 보내야 하고. 남은 건 모아서 프놈펜에 공구 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에요."

고향이 그리우면 앨범을 꺼내본다. 중학생이었던 몸과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
 고향이 그리우면 앨범을 꺼내본다. 중학생이었던 몸과 초등학생이었던 남동생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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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동생을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몸.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이 그렇듯 그녀 역시 부모에게 이어받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캄보디아에서는 돈을 벌기 힘들어요. 농사를 지으니까 현금은 거의 없구요. 한창 농사지을 때 남의 집 농사일을 해주면 일당으로 4000원 정도를 받아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와서 며칠 일하면 일이 없어서 만날 놀아야 해요. 그래서 전기요금을 못 내서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도 많아요. 젊은 사람들은 프놈펜으로 가요. 프놈펜에는 공장이 많거든요. 한국공장, 중국공장, 외국사람이 사장인 공장이에요.

거기서 일하면 한 달에 90불에서 120불 정도를 받아요. 남동생 하나도 프놈펜에서 공장에 다니는데 120불 정도 받는다고 들었어요. 저도 프놈펜에서 잠깐 식당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는 한 달에 60불에서 70불 정도를 받았어요.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없으니까 가난해요. 한국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해서 왔어요. 농사철에 남의 농사 도와주고 받은 돈이랑 엄마가 빌려온 돈이랑 200불을 만들어서 한국어 학원에 다녔어요."

지금도 캄보디아에는 한국에 일을 하러 오기 위해 한국어 학원에 등록하는 청년들이 적지 않단다. 한국어 능력시험을 치르는 날은 마치 한국의 수능 일처럼 시험장에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청년이면 누구나 꿈을 꾼다는 한국행. 무엇이 이들에게 코리안드림을 꿈꾸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전기가 비싸서 많이 보진 못하지만 집에서 한국 드라마를 조금 봤어요. 드라마 속에 한국 사람들은 다들 예쁘고 잘 생기고 사는 집도 좋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아주 부자더라구요. 그래서 한국이 부자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어느 날 라디오에서 한국어 학원 광고가 나오는데 한국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그러는 거예요. 한국어 학원 광고지도 봤어요. 한국에 가고 싶어서 마구 가슴이 뛰었어요. 엄마한테 말해서 학원비를 마련해 프놈펜으로 갔어요."

당찬 아가씨가 아닐 수 없다. 순박한 시골처녀 몸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게 된 것이  라디오와 광고 전단지때문이었다니. 용감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말 너무 어려워서 힘들었어요. 하지만 어렵게 마련한 돈이니까 열심히 공부했어요. 합격을 하고 나서 어떤 일을 할지 정해야 하는데, 여자들은 농업을 신청하면 기다리지 않고 빨리 갈 수 있다고 해서 무작정 농업을 지원했어요.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었으니까 농사일은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욕하고 월급 안 주며 잔소리... 농장 전전하며 받은 상처

새싹채소를 포장하는 몸
 새싹채소를 포장하는 몸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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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일 밭일이라면 어릴 때부터 해왔기에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잘 모르는 기계를 다루어야 하는 공장 일보다는 농사가 훨씬 수월할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한국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처음에 논산 상추농장에서 일을 했어요. 그 농장은 정말 슬펐어요. 사장님이 돈을 주지 않았어요. 1년 8개월 동안 일을 했는데 돈을 잘 주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부터 돈을 안 주고 미루고 그러다가 자꾸 달라고 하면 20만 원도 주고 50만 원도 주고 그랬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주겠다고 사장님 말을 믿고 기다리다가 1년 8개월이 지났어요.

동네에 이상한 소문도 많이 났어요. 사장님하고 나하고 둘이서 일을 하니까 저보고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장님이 아무 말 하지 않아서 사모님 말이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사장님이 저한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결혼하자고도 말했어요. 하지만 월급을 주지 않으니까 저는 싫었어요."

몸은 첫 번째 일자리를 그저 사라진 시간으로 치겠다고 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으니 차라리 잊기로 한 것이다. 남들은 4년 10개월 동안 돈을 벌었지만, 자신은 3년 10개월 일했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공단에 찾아가서 신고도 했어요. 월급을 주지 않으니까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도 했어요. 그랬는데 사장님이랑 공단 사람이랑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더니 저를 다시 농장으로 보냈어요. 공단 사람이 앞으로는 사장님이 밀린 월급도 주고 월급 떼먹는 일도 없을 거라고 했지만, 계속해서 월급을 주지 않았어요. 상춧값이 떨어져서 돈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냥 일을 하지 않고 나가겠다고 했더니 나 때문에 일을 못해서 손해가 났다면서 더 돈을 못주겠다 했어요. (이직할 때 필요한 서류에) 사인해 주면서 화내고 욕하고 그랬어요."

몸의 첫 일터였던 상추농장은 절망적이었다. 한국에서 한두 달 일하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학원비와 비행기 값을 빌려서 왔는데 월급을 받지 못하니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빚에 대한 이자도 늘어가니 상추농장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상추농장에서 나와서 파프리카 농장으로 갔어요. 그런데 파프리카 농장에서는 두 달 일하고 쫓겨났어요. 점심값 때문인 거 같아요. 파프리카 농장에서는 사모님이 주는 점심을 먹으면 월급에서 밥값을 빼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점심을 먹지 않았어요. 원래 많이 먹지도 않는 편이라 기숙사 내 방에 가서 조금 만들어 먹고 와서 다시 일을 했어요. 그런데 두 달 동안 월급이 적게 나왔어요. 그래서 사모님에게 물어봤어요.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 월급이 적게 나왔다구요. 그랬더니 사모님이 막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당장 나가라고 했어요."

몸은 아직도 자기가 파프리카 농장에서 쫓겨난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면서 나가라고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첫 번째 상추농장처럼 월급 줄 돈이 없어서 그랬나 짐작할 뿐이다. 파브리카 농장에서 나와 세 번째 간 일자리는 충주의 버섯농장이었다.

"사장님이 할아버지였는데 잔소리를 너무 해요. 바깥에 나가지 말고 방에만 있으라고 했어요. 바깥에 나갔다 오면 피곤해서 다음날 일하는데 지장 있으니 쉬는 날에는 잠이나 자고 집에 가만히 있으래요. 쉬는 날에는 우리도 놀고 싶고 나가고 싶은데...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막 혼내고 욕하고 그랬어요.

시장에도 못 가게 해요. 옷도 사지 말고 신발도 사지 말고... 돈 쓰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래요. 몰래 나갔다 들키면 막 혼나고 그랬어요. 뭐든지 아껴쓰라고 잔소리를 해요. 겨울에 너무 추워서 전기난로를 사다 놨는데 사장님이 난로를 가져가 버렸어요. 전기세 나온다고 쓰지 말래요. 찬바람이 들어와서 창문을 막았더니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창문도 못막게 했어요.

겨울에 사장님 방에 가면 문밖에서도 따뜻한 게 느껴져요. 우리들 방은 추워서 옷을 몇 겹 입고 자야 하는데... 마음대로 샤워도 못해요. 일하는 날에는 일하느라 땀을 흘렸으니까 샤워를 해도 되지만 일하지 않은 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샤워를 하지 말래요. 쉬는 날에는 샤워 못하게 사장님이 물을 잠가버렸어요."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다시 오겠다는 몸

한국노래 가사를 적는 것도 좋은 한국말 공부 방법이란다.
 한국노래 가사를 적는 것도 좋은 한국말 공부 방법이란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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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대부분 비인간적이고 열악하다. 일손이 바쁜 농번기에는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휴일조차 없이 일하는 게 보통이다. 농한기의 경우에는 일이 없다고 월급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밥값과 기숙사비를 달라고 하기도 한다. 때때로 다른 농장에 외국인 노동자 인력을 빌려주고 농장 주인이 품삯을 대신 받는 편법도 일어난다.

농장 자체가 영세하다보니 임금을 밀리거나 떼이는 경우도 흔하다. 파산신청을 하고 달아난 사장을 기다리다 비자기간이 만료되어 강제출국을 당한 노동자도 있다. 어이없지만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에 대해선 '근로기준법 적용을 제외한다'는 근로기준법 63조 때문에 법적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 또한 이들의 현실이다.

"세 번 옮겨서 이번이 마지막 일자리에요. 여기서 한 번 더 옮기면 출국해야 돼요. 법이 그래요. 저녁에 같이 한국어 공부하던 친구 하나는 공장을 여러 번 옮겨서 결국엔 캄보디아로 갔어요. 매일 야근하고, 월급도 잘 주지 않고, 문짝을 만든다고 해서 갔는데 다른 일을 시키구요. 공장이 잘 안 돼서 문을 닫기도 하구요. 어쩌다가 나쁜 공장만 다니게 돼서 돈도 많이 벌지 못하고 돌아갔어요. 그 친구도 가면서 많이 울었어요."

몸도 마음 한편에 걱정이 생기고 있단다. 한국에 온 지 4년 3개월. 이제 7개월 후면 비자기간이 끝나 캄보디아로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에 들어올 때 계획했던 만큼 돈을 벌지 못해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몸에게도 꿈이 있다. 마지막으로 몸의 꿈을 들어보았다.

"지금 여기 농장은 참 좋아요. 열심히 일하고 한국말도 잘해서 한 번 더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게 꿈이에요. 지금까지 번 돈으로는 한국 올 때 빌린 돈 갚고 엄마아빠 생활비랑 동생 학비 주고 고향집 고치고 별로 남은 게 없어요. 한 번 더 와야 가게 같은 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어 공부 계속하고 있어요. 다시 오고 싶어서요. 한국에 와서 나쁜 사장님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그래서 또 오고 싶어요. 남동생한테도 말했어요.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라구요. 동생도 한국에 와서 일하게 하고 싶어요. 그래야 엄마랑 아빠랑 잘 살 수 있으니까요."         

다시 돌아올 생각이 있다니 오히려 감사하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간들도 있었을 텐데 그보다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많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국의 산업은 더 이상 이주노동자를 제외하고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저들과 손을 잡고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라면 좀 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저들의 눈물로 차린 밥상에 웃으며 수저를 얹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그:#이주노동자, #우리함께, #외국인노동자, #캄보디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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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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